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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0)화 (539/1,192)

제540화

사앵앵은 커다란 산수화가 그려진 병 앞에 도달해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사장풍이었다면 이렇게 말하고도 남았다.

‘방법이 왜 없습니까? 당장 이혼장을 써 주겠습니다. 됐죠?’

하지만 지금은… 흥,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이제 그도 영 신통치 않았다.

부루퉁해 있던 사장풍의 얼굴을 떠올리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제 그녀가 승리할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연신 기세등등한 미소를 짓던 사앵앵은 결국 참지 못하고 깔깔 웃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두 종업원이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설마… 정신이 나가신 건가?”

“에휴, 주인어른이 뱀에 물리셨잖아. 다들 얼마 못 갈 거라던데… 사 사장님이 실성을 안 할 수 있겠니?”

* * *

무양 공주를 태운 마차는 느긋하게 임안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야 공주의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을 잘 보여 줄 수 있다고 여기듯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행렬의 속도는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차 주위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이들도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다. 줄곧 창밖을 내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공주도 천천히 침묵에 빠져들었다.

동월 국경에 진입한 부대는 청목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천엽성에 다다랐다. 천엽성의 회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공주 일행은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그 소식에 사앵앵은 짙은 서운함을 느꼈다. 백천범과 조금 기묘한 사이라고는 하나, 그녀를 오랫동안 보지 못해 그립기도 했다. 더구나 예전보다 예뻐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니 직접 보려고 했건만.

백천범의 기이한 일화가 궁금한 것도 있었다. 계산대 앞에 서서 시간을 때울 때면, 그녀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녀도 백천범처럼 죽은 줄 알았던 모친이 찾아와 어느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모친은 그곳의 황제이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공주가 될 테지! 그녀가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홍정상인이 되어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 주고 싶을 뿐.

그런 상상을 펼치다 보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나 사앵앵은 현실을 아는 여인이었다. 상상은 상상일 뿐, 할 일을 미뤄 둘 순 없었다.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쉰 그녀는 사장풍의 방으로 향했다.

약을 많이 발랐음에도 그의 상처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종아리까지 퉁퉁 부어오른 상태라, 조만간 허벅지까지 번질 기세였다. 그녀는 온몸이 퉁퉁 부은 사장풍의 모습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사장풍은 낙담했는지 며칠 동안 축 처져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녀도 속상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사장풍 앞에서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방에 들어오니 사장풍은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오늘은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

사장풍은 목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아예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무양 공주를 태운 마차 행렬이 서북에 들어섰대요. 알고 있었어요?”

그제야 사장풍의 고개가 돌아갔다.

“도착했답니까? 그럼 준비를 해야겠군요. 뒤채 객실을 다 빼고…….”

“청목채에는 오지 않아요. 길을 돌아갔대요.”

“아, 그렇군요.”

“듣자니 천엽성에 있는 의관이 뱀에 물린 치료를 전문으로 한다던데, 내일 같이 가 봐요.”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운명에 맡기지요.”

“무양 공주 일행이 천엽성 회관에서 묵는대요.”

“거기가 우리 역참보다 좋으니 잘되었습니다……. 어느 의관이 유명하다고요?”

“천엽성 남가南街에 융행행隆杏行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갈씨 의원이 유명하대요. 뱀에 물린 상처 치료를 전문으로 한다니까 가 보는 게 어때요?”

“…그러죠, 뭐.”

“사장풍!”

정신이 팔려 있던 사장풍은 사앵앵의 호통에 화들짝 놀랐다.

“왜 이래요? 놀라 죽게 할 셈입니까?”

“왜 이러는지 묻고 싶은 건 나라고요!”

사앵앵이 분노를 못 이겨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백천범 이야기를 꺼내니 정신을 차리는군요? 의원을 찾아가자고 했을 땐 들은 척도 않다가, 그 애가 천엽성에 있다는 말에는 곧장 가겠다고 하다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예요, 봉? 날 봉으로 여기는 거죠? 그게 아니면 뭐예요? 말해 봐요!”

사앵앵이 화를 내면 낼수록 사장풍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날 따르던 그 날부터, 당신을 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날 끈질기게 쫓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봉이 아니면 누가 봉이겠어요?”

부아가 치민 사앵앵은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당장 그를 흠씬 패 주려는데 퉁퉁 부어오른 발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결국 들어 올렸던 손을 힘껏 뿌리치고 다시금 욕을 퍼부었다.

“좋아요. 난 그쪽 봉이었어요. 하지만 오늘부턴 당신 시중을 들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요. 설령 다리에 구더기가 생겼다고 해도 신경 안 쓸 거라고요!”

말을 마친 사앵앵이 문을 부서뜨릴 듯 세게 닫았다. 뒤뜰에 있던 점원들마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이윽고 점원들은 분주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두 분이 또 싸우시나 보네.”

“오랫동안 병을 앓으시니 주인어른도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지!”

“기분이 나쁘다고 부인이랑 다투면 어떡해, 사내답지 않게!”

점원 한 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너흰 몰라. 우리 주인어른보다 더 사내다운 사람은 없을걸.”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을 꺼냈던 점원은 손을 내저으며 어깨에 통을 짊어졌다.

“남 나리께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누군가는 고된 일을 해야지.”

그는 또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자리를 떴다. 나머지 점원들은 콧방귀를 뀌며 뿔뿔이 흩어졌다.

모진 말을 퍼부었지만, 사앵앵은 사장풍을 내버려 두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역참을 몇몇 관리인들에게 맡기고, 사장풍과 함께 천엽성의 의원을 찾아갔다.

사장풍은 걷지도 못하는 신세였기에 사앵앵의 뜻대로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사앵앵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왜 잔뜩 골이 났어요? 당신이 의원을 보러 가겠다고 했잖아요? 백천범이 회관에 있으니까 가서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사장풍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내가 모를 거 같습니까? 하루만 묵고 떠난 걸요.”

“그래서 가기 싫다는 거예요?”

화가 치솟으니 절로 사앵앵의 손이 근질거렸다. 이제 겨우 조금 편안한 날들을 보내나 싶었는데, 이 자식이 속을 또다시 뒤집어 놓지 않는가.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인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사앵앵은 그의 멀쩡한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사장풍은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겨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상처가 이리 심한 사람을 걷어찰 수 있는 겁니까?”

사앵앵이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인간이긴 해요? 당신은 다리를 다쳤지만 난 마음을 다쳤다고요.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아요?”

그녀는 분을 못 이겨 자신의 가슴을 연신 내리쳤다. 풍만한 가슴이 끊임없이 들썩거리니 사장풍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떨궜다.

“왜요, 뒤가 켕겨서 차마 내 얼굴도 못 보겠어요?”

사앵앵이 발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얼굴은 왜 붉히는데요? 본인이 생각해도 마음에 걸리는 거잖아요, 맞죠?”

그녀는 문지른 곳은 다리였지만, 사장풍은 가슴이 문질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다리를 위아래로 쓸어내리니 이상한 간지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이를 꽉 깨물고 견뎠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참나,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제 말이 맞죠?”

사앵앵은 조금씩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사장풍이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커다란 그의 손엔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릴 듯 힘이 실려 있었다.

“아야, 아파요. 어서 놔요. 그러다 뼈 부러지겠어요. 사장풍!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얼른 놓으라니까! 아프다고……!”

사앵앵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외쳤다.

사장풍은 손을 놓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호랑이가 얌전히 있다고 해서 병든 고양이로 여기다니. 그를 몰아세우면 다리를 부러뜨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 * *

사앵앵과 사장풍이 천엽성으로 떠난 날 밤, 역참에 스무 명이 넘는 상대商队가 도착했다. 비록 주인 부부는 자리를 비웠지만 관리인들은 사앵앵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관리인들은 건물 한 채씩을 도맡아 관리했다. 손님이 오면 점원이 말을 뒤뜰로 데려가 건초를 먹인 후 털을 빗겨 주었다. 손님들은 좋은 술과 음식을 잔뜩 대접받고, 배가 부르면 깨끗하고 편안한 객실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곳에서 푹 자고 나면 여행의 피로가 전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규율에 따라 신분이 고귀한 이들은 개인실에 묵었고, 나머지 수하들은 단체실에서 함께 묵었다. 관리인은 개인실에 묵는 손님들을 응대했고, 수하들은 점원들의 몫이었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누군가 오른쪽 방에서 빠져나오더니 어둠을 뚫고 뒤뜰로 향했다. 이내 쏜살같이 마구간으로 들어간 그림자는 잔뜩 쌓인 건초에 비스듬히 기대 잠들었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 점원이 마구간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자고 있는 걸 알아차린 점원이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고, 어찌 이곳에서 주무십니까?”

그자는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더니 작게 웅얼거렸다.

“일찍 일어나서 말한테 건초를 먹이다가 깜빡 잠들었네요.”

점원이 그를 칭찬했다.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해도 뜨기 전인데 말 먹이부터 챙기시다니. 말한테 건초를 먹이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돌아가서 좀 더 주무세요.”

“아녜요.”

상대는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곧 날이 밝을 텐데 더 자서 뭐 해요. 일해야죠.”

점원은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착각이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사내가 아니라 순간 청초한 여인처럼 보였다. 아리따운 미소와 눈빛을 마주하니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점원은 머리를 힘껏 가로젓고 다시 한번 그의 외모를 살폈다. 역시 여인이 아니라 사내가 틀림없었다. 다만 얼굴은 확실히 반반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했는데 두 눈썹이 유독 짙고 곧았다. 꼭 칼로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뻗어 있었다. 입가에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나 튀는지, 얼굴을 다 망치는 느낌이었다. 저 두 가지만 아니었으면 분명 아주 수려한 사내였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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