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사정을 모르는 마부는 다시금 마차를 세우며 짜증을 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이미 수색을 하지 않았소? 우리 나리의 시간을 이리도 빼앗다니, 감당할 수 있겠소?”
남문우가 코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하면 본 장군의 일을 그르치는 것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마부는 그제야 마차를 세운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청음이 발을 걷어 올렸다.
“남 장군, 재수색을 하려는 것인가?”
남문우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본 장군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전하께서 한 번만 더 양해해 주시지요.”
“알겠네. 들어오게.”
백청음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창가에 기댔지만, 늘어뜨린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하필 이 순간에 남문우가 나타나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끝내겠습니다.”
다소 고압적인 태도였지만 백청음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침상을 가볍게 두드린 후 큰소리로 말했다.
“좋네. 그럼 밖에서 기다리지.”
백청음이 마차에서 내리자 남문우는 잽싸게 안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다시 허리를 펴고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침상 덮개를 여니, 그 아래 누워 있던 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담겼다.
그는 백천범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까맣고 커다란 두 눈으로 가만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가를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말들이 내포된 눈물이었다. 아련한 눈빛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슬슬 위화감을 느꼈다. 마차 안을 전부 뒤진다 해도 이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인데. 그러나 누구도 안으로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바깥에서 기다린 백청음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마침내 그가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남문우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백청음은 마음을 놓긴 했지만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살짝 놀란 얼굴로 마차에 타려는데 남문우가 다시 말을 건넸다.
“몸조심하십시오.”
백청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네.”
남문우가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의 외침은 울부짖듯 터져나왔다.
“통행을 허가한다!”
마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어두운 거리에 남아 우두커니 선 남문우의 눈가에 뿌연 물안개가 서렸다. 이내 눈물로 번져 두 뺨을 타고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대가 이 마음도 가지고 떠난다는 걸 그댄 알기나 할까…….
* * *
백청음이 침상 밑에서 꺼내주었을 때, 백천범은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성을 빠져나온 일도, 남문우가 놓아준 일도 모두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으므로,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빨리 달리라고 해 주세요. 남문우가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 애가 어떻게 절 놓아 주겠어요.”
마지막 문장은 꼭 혼잣말처럼 들렸다. 백청음이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남 장군이 공주를 발견했다고?”
백천범이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 애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 어떻게든 절 찾아내곤 했어요. 지난번에도 두 번 다 그 애가 절 찾아냈죠. 이번에도 제가 어디 있는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들어오자마자 곧장 침상 덮개를 열었거든요.”
백청음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공주에게 향고香蠱를 심은 것인가?”
“향고가 뭐예요?”
“남원은 꽃이 많이 피는 나라인 만큼 향을 만들어 즐기는 사람이 많았네. 향고도 그중 한 방식이지. 향을 매개로 누군가의 몸에 심어두는 것인데, 무색무취라 당사자는 알 수 없지. 그 독특한 향은 오직 향의 주인만 감지할 수 있네. 그렇기에 남 장군이 공주의 근처에 있을 땐 바로 공주를 찾아내는 것이고.”
“왜 향고를 쓰는 건데요?”
“예전엔 기르는 동물에게 심었네. 그리하면 잃어버려도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연인에게 심어 주기 시작했지. 남문우는 남원에서 나고 자란 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똑똑하고 향을 즐겨 쓰는 고수라네. 공주에게 향고를 심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겠지.”
백천범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팔을 들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역시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어디를 가든 찾을 수 있단 말이에요? 세상 끝까지 간다고 해도요?”
“그렇진 않네. 조금 전에도 말했듯 근처에 있어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어. 거리가 멀어지면 불가능하지.”
백청음이 발을 걷어 올리고 바깥을 살폈다.
“지금이라면 절대 찾을 수 없겠지. 다만 향고가 깊이 심어졌을 수도, 얕게 심어졌을 수도 있네. 깊이 심어져 성충이 되면 앞으로도 공주를 찾을 수 있을지도.”
그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남 장군이 공주를 놓아준 게 확실한가? 공주가 저택에서 도망친 걸 알았을 때만 해도 분노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는데. 지금껏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보았네.”
백천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침상 밑에 누워 있었을 때, 남문우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절망에 빠졌지만, 그의 눈빛 역시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덮개를 다시 덮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 기척이 나더니 마차 밖으로 멀어져간 게 아닌가. 백청음이 갑작스레 이마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바다를 보고 나니 강물은 물 같지 않고, 무산巫山의 구름을 보고 나니 다른 구름은 구름 같지 않구나. 꽃밭에 와도 돌아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그대 때문이기도 하네.”
백천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를 정말 잘 지으시네요. 안타깝게도 전 시를 잘 모르지만요.”
백청음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은 시가 아니라 동월의 시라네. 그저 지금의 상황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어떤 상황이요?”
백천범이 불쑥 물었다.
“지금처럼 겨우 화를 면한 상황이요?”
백청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내가 흠모하는 여인을 잃고 느끼는 무력감을 생각했네.”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한 백천범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글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감정의 문제란 참으로 기이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한들, 상대의 마음이 꼭 저에게 오지 않았다. 설령 기억을 조작하더라도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건 헛된 일이 아닌가.
다만 그녀에게 잘해 주었던 남문우의 모습을 떠올리면 미묘한 가책도 느껴졌다. 그녀는 더 이상 불편한 주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제가 기억을 잃은 것도 향 때문인가요?”
“그렇네. 다만 시간이 필요하지. 조금씩 기억을 잃게 한 뒤, 그들이 미리 준비해 둔 것들로 공주의 기억을 대체했을 걸세.”
“제가 갑자기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는데, 걱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대제사가 직접 나설 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지. 공주만이 예외였네.”
“왜죠?”
백청음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제사 말로는 단순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통제하기 어렵다더군. 아마 공주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대제사는 누구인데요?”
“남원의 신이지.”
“신선이요?”
“남원 백성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네.”
문득 백천범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얀 장포를 입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을 현혹시키는 눈매를 가진 사람. 꽃밭에서 신선을 만난 줄만 알았는데, 설마 그 사람이 대제사였단 말인가?
* * *
남류청은 조급한 발걸음으로 대제사의 궁전에 들었다.
“대제사, 어서 점괘를 봐주세요. 이렇게 결정적일 때에 도망이라도 쳤다간 잃는 게 더 많을 겁니다.”
대제사는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가 평온한 얼굴로 합장을 했다.
“모든 건 하늘의 뜻입니다. 운명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법, 저 또한 무양 공주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남류청이 잠시 멍해졌다가 물었다.
“대제사,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계획에서 그 애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했겠지요. 지금은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말을 마친 대제사는 두 눈을 감았다. 노승이 입정入定(참선하는 불교 수행법의 하나)을 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남류청은 더 이상 대제사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남류청은 밖으로 나와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신부 행렬을 뒤쫓아 속력을 높이라고 전하거라. 반드시 백천범보다 먼저 임안에 도착해야 한다.”
* * *
사앵앵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원에서 돌아온 사장풍은 유독 부상이 심했다. 오랜 시간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한 뒤에야 겨우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속상한 일이었다. 다들 전쟁을 마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돌아왔는데, 그만이 부상을 안고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번 부상은 참 별났다. 뱀에게 물려 상처가 난 것이었는데, 처음엔 아픔도 가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작은 상처에 불과했다. 사장풍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연고만 대강 발랐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 줄 몰랐다. 다만 아무런 통증이 없었기에, 그는 개의치 않고 부대원들과 함께 철수했다.
역참에 돌아오고 나서야 상처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발등이 꼭 발효된 찐빵처럼 퉁퉁 부어오르는 게 아닌가.
서북 지역에도 독사가 많은 터라, 역참에는 뱀의 독을 치료하는 약이 있었다. 먼 길을 오가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해 둔 약이었다. 사앵앵은 서둘러 약을 가져와 발라주었고 무명천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둥글둥글한 공처럼 부어올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사앵앵은 속상한 마음에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당신 꼴을 봐요. 어린 나이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걱정할 일만 저지르는지. 다른 이들은 멀쩡한데 왜 당신만 부상을 입은 거예요? 당신 몸이 철로 만들어져 있는 줄 알아요? 눈이 엉덩이에 달리기라도 했나요? 어떻게 뱀 한 마리를 제대로 못 보고…….”
사장풍은 그녀의 말에 움츠러드는 듯했지만, 변명을 멈추진 않았다.
“당신이 그 광경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뱀이 어찌나 많은지, 발 디딜 틈도 없는데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그 뱀은 왜 영구 대인 발은 안 물었는데요? 이 장군님 발은요? 왜 하필 당신 발만 문 건데요? 당신한테 원수라도 졌대요? 아님 당신이 마음에 들기라도 했대요?”
“거참, 왜 그리 억지를 부립니까? 뱀이 누구를 물지 내가 어찌 안다고.”
“당신이 달려들었으니까 뱀이 덥석 문 거겠죠!”
“그게 아니라 내 외모가 워낙 출중하고 늠름하니…….”
“뻔뻔하긴!”
“이리 뻔뻔한 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건 당신이 아닙니까?”
“나라고 달리 방법이 있겠어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에게 시집을 왔는지.”
“…….”
사장풍은 금세 말문이 막혔다.
기세등등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사앵앵은 곧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사장풍은 분했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침대 꼭대기만 바라보며 끊임없이 탄식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