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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38)화 (537/1,192)

제538화

남제화는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넌 애당초 남원에 속한 적 없었으니,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널 이곳에 데려왔듯, 지금도 널 배웅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오면 좋겠구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백천범이 말했다.

“동월에 놀러 오세요.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남제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월과 남원은 친구가 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잠시 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닙닙아, 꼭 기억하거라. 동월과 남원의 사이가 어떻든 난 언제나 네 오라비다. 이 사실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

“오라버니도 꼭 기억해 주세요. 제가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라는 걸요. 이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예요.”

남제화는 큰 위안을 받은 듯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모자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래, 어서 가거라. 성 북문에 내 사람들이 있다. 내 영패를 가져가면 널 보내 줄 것이다.”

그는 금색 영패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더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백천범은 그런 그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모황과 문우는 화가 많이 났겠죠?”

“이런 상황에 무엇 하러 그들까지 신경 쓰는 것이냐?”

남문우의 모습을 떠올린 남제화는 그저 우스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남 장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더구나. 웃는 호랑이가 아니라 포효하는 호랑이가 되었지. 모황은… 닙닙아, 부디 모황을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모황께서도 고충이 있으시니까. 마음속으로는 널 정말 끔찍이 아끼신다.”

백천범은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고삐를 당기며 북문으로 향했다.

잠시 뒤, 그녀는 그제야 남제화가 왜 수하들을 북문에 배치했는지 깨달았다. 북문으로 빠져나가야 동월의 국경과 가장 가까웠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세심한 사람이었다. 누가 그의 아내가 될지 몰라도 참 복이 많은 여인일 터였다.

북문에는 많은 이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소달구지부터 노새 수레, 마차까지. 대열에 섞여 들어간 백천범은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녀의 차례가 가까워질 무렵, 멀찍이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탄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봉에 선 사람은 남문우의 부장 용삼도龍三刀였다. 남문우가 그녀를 데리고 궁 밖을 나갈 때 언제나 그들을 호위하던 사람이었다.

화들짝 놀란 백천범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용삼도가 성문을 지키는 이에게 말했다.

“남 장군의 명이오. 지금부터 내가 성문을 관리하겠소.”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남제화의 측근이었고 인솔자는 여화餘華라는 자였다. 그는 당연히 물러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목청을 높였다.

“대황자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소. 대황자의 명령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소.”

용삼도의 목소리도 커졌다.

“성문을 지키는 책임은 애당초 장군에게 있소. 대황자께서는 그저 장군을 도와주시려는 것뿐이니 어서 철수하시오.”

여화는 더욱더 강경하게 나왔다.

“우린 대황자의 명령만 따를 뿐, 다른 건 모르오. 대황자께서 직접 명을 내리신다면 철수하겠소.”

용삼도가 눈을 부릅떴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오?”

어느새 그의 수하들이 하나둘 검을 꺼내 들었다.

여화 측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패도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듯한 상황에, 지켜보던 백천범의 마음이 술렁였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싸움이 난다면 혼란한 틈에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백성들은 성밖으로 앞다투어 도망칠 테고, 그 안에 섞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별안간 용삼도가 손을 내젓더니 수하들에게 검을 넣으라고 분부했다.

“철수하지 않아도 좋소. 함께 관리하면 되지 않소? 만약 남 장군께서 잡으려는 이를 놓쳤다가는 대황자께서도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

그가 순순히 협력할 줄은 몰랐기에, 여화는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용삼도의 검문이 시작되었다. 그는 횃불을 든 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명 한 명 자세히 확인했다. 어찌나 꼼꼼한지, 백천범은 남장을 했어도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행렬 뒤쪽에 서 있는 호화로운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웅장하고 커다란 차체엔 네 개의 기둥이 솟아 있었고, 그 위로 부드러운 비단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볍게 흩날리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상급 비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마차를 타는 사람은 엄청난 부자이거나 귀한 신분일 터. 그런 이들이라면 검문을 피해 성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 틈에 섞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호화로운 마차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위쪽의 어두운 그늘로 몸을 숨겼다. 앞에 앉아 있던 마부는 눈치채지 못한 듯 앞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단번에 마차의 주인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마차가 흔들린 순간, 그녀는 곧장 문 발을 올려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뻗어 마차에 앉은 이를 붙잡은 찰나, 백천범은 상대의 눈을 보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어찌, 이곳에?”

백청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온 성이 공주를 찾고 있는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인가?”

백천범은 다짜고짜 그에게 비수를 들이댔다.

“내 위치를 알리면 죽여 버리겠어요.”

백청음은 흉악한 그녀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그가 가볍게 비수를 밀쳐 냈다.

“청을 할 줄 알았는데, 위협이라니. 더욱이 날 죽일 수나 있는가?”

백천범이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결국 손을 내려놓았다.

“거래를 할까요?”

“말해 보게.”

“성을 빠져나가게만 해 준다면 곧장 떠날게요. 제가 떠나면 남농화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

“단령 공주가 남문우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 제가 떠나면 남농화를 도와주는 셈이죠.”

백청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못된 도움이라네. 남문우는 그 애를 연모하지 않아. 억지로 이어 주었다간 불화만 가득한 부부가 될 테고, 그 애는 결국 행복하지 않을 걸세.”

“…그럼 다른 조건을 제시해 주세요.”

백청음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공주는 날 잘못 봤네. 난 거래를 싫어하는 사람이지. 그리고 공주는 류청의 딸이니 내 딸이기도 해. 한 명은 망가져 버렸으나 나머지 한 명까지 그리되게 둘 수는 없지. 아무런 조건 없이 데리고 나가 주겠네. 그저 공주가 자신의 행복을 찾길, 그리고 류청이 날 너무 탓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백천범에게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었다.

“제가 도망치게 내버려 두시겠다고요?”

“그래, 내버려 둘 것이네. 류청 대신 내가 사죄하는 셈 치겠네.”

“모황께서 절 남원에 붙잡아 두는 건 무얼 위해서죠?”

“그건 말할 수 없네. 다만 류청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너무 미워하지 말게.”

백청음이 일어나더니 마차 안에 놓인 침상을 열었다. 침상 아래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가 안을 가리켰다.

“힘들겠지만 이곳에 숨어 있게. 성을 나가면 다시 꺼내 주겠네.”

백천범은 감격스러운 마음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잽싸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깥에서 백청음이 덮개를 잘 닫아 주었다. 덮개 양쪽 끝에는 공기가 통할 수 있게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위에서는 안을 볼 수 없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금세 성문 입구에 도착했다.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호화로운 마차의 등장에 곧장 태도를 바꿨다.

“어느 분께서 성을 나가시려는 것인지요? 혹 명패銘牌를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명패는 남원 백성들의 신분증이었기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성을 오갈 때도 명패로 신원을 확인했다.

마부는 조금 도도한 태도로 마차 뒤에 달린 등롱을 가리켰다.

“우리 나리의 마차도 확인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사병은 등롱에 커다랗게 쓰인 백 자를 바라보았다. 남원에서 이 성을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여제의 국서國壻였다. 덕분에 백씨 성을 가진 이들은 지난 몇 해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고, 누구든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 애썼다.

사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씨 나리의 마차였군요.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성을 나가십니까?”

마부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나리께서 성을 나가신다는데 그 이유도 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병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통과!”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시오.”

용삼도였다. 그가 마차를 보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백씨 나리께서 탄 것입니까? 제 체면을 봐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 백청음이 발을 걷어 올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나일세.”

용삼도가 곧장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갖췄다.

“전하셨군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백청음의 태도는 흔들림 없이 담담했다.

“내 딸이 성 밖에 있지 않나. 그 앨 보러 가기 위해서지. 용 대인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용삼도가 얼굴을 붉혔다. 그도 남농화의 일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상관인 남문우와 관련된 일인 만큼 어쩐지 민망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공무를 처리하는 중이니,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전하, 오늘 밤 남 장군께서 범인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해서 모든 이들을 수색 중이온데…….”

백청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수색하게.”

용삼도는 사양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을 둘러보던 그에게 백청음이 말했다.

“용 대인이 수색하기 편하게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낫겠나?”

용삼도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한번 둘러보면 되는걸요.”

마차 내부는 그리 넓지 않은 편이라 사람을 숨길 공간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백청음은 남류청의 국서가 아닌가? 그가 무양 공주를 숨겨줄 까닭이 무엇일까. 수색을 마친 용삼도가 마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통과시켜라!”

마부는 용삼도를 흘겨본 뒤 채찍을 휘둘렀다. 백청음은 그제야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침상 밑에 숨어 있던 백천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한숨 돌리려는데, 긴박한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발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멈춰라!”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백청음과 백천범은 심장이 덜컥 멎는 듯했다. 남문우였다. 백청음은 지척에 있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마부를 재촉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도망친다 한들 붙잡힐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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