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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37)화 (536/1,192)

제537화

신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모두가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심지어 남문우의 분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진심으로 백천범에게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를 좋아했던 건 그녀의 단순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계략 따위를 쓸 줄도 몰랐고 거짓말을 할 줄도 몰랐다.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는 계략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단 한 번 썼을 뿐이다. 하필이면 그 계략은 그를 상대로 쓰였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를 공격하다니, 체면이 고꾸라지는 건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객들도 대충 이상을 감지한 것 같았다. 길시가 되었는데도 신부는 나오지 않고 새파랗게 질린 남 장군만 후원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여제 역시 하객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었기에 몇몇 족장들과 함께 곁채에 따로 머물렀다. 남문우가 굳은 얼굴로 들어서자 여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 장군, 어찌 그리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인가?”

남문우가 노기등등해서 외쳤다.

“폐하의 따님께 여쭤보셔야겠습니다. 무양 공주가 도망쳤거든요. 신이 어찌 수습해야 좋겠습니까?”

여제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찌 도망을 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언제?”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미 성에 계엄령을 내렸습니다.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겁니다.”

여제가 눈짓을 보내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자리를 물린 후, 여제의 수행원이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애가 자네에게 뭐라고 하였는가?”

남문우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폐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듯합니다. 그 애가 전부 기억해 냈거든요.”

여제가 질겁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전부 기억해 냈다고? 그건 불가능하네. 대제사가 분명…….”

“대제사가 그랬죠. 닙닙이는 통제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라고요.”

여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 전부 기억해 냈단 말인가?”

남문우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묵용린에 대한 얘기를 하긴 했지만, 남원에 오기 전 일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제는 초조해하며 방 안을 서성였다.

“그날 묵용감을 만난 탓에 기억해 낸 게 틀림없어. 어서 그 애를 잡아 와야 하네.”

그때, 남제화가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황, 닙닙이가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쳤다. 그 애에게 진심을 다했는데, 이 어미를 두고 달아났구나.”

남제화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남문우를 힐끔거렸다.

“모황,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닙닙이는 이 혼사에 확신이 서지 않아 달아났을 것…….”

남문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끊었다.

“내게 시집을 오고 싶지 않아 달아났단 말입니까?”

“난 그 애가 남 장군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던데.”

“그 애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설마 대황자를 좋아한단 말입니까? 대황자께서는 그 애의 친오라버니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였다. 여제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그만하지 못할까! 닙닙이는 묵용린을 기억했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서둘러 그 애를 찾아야 해. 절대 그 애를 동월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

남제화와 남문우도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서둘러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여제는 허물어지듯 의자에 앉아 이마를 쓸어내렸다. 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려움이 설핏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계획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닙닙아, 대체 왜 모황의 고통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이냐? 이 모든 게 전부 남원을 위해서거늘!

* * *

지난 두 차례의 탈출과 달리 이번엔 갑작스러운 탈출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그녀는 시녀를 쓰러뜨린 뒤, 옷을 맞바꾸고 신방에 놓여 있던 간식과 가벼운 금은 집기만 들고 빠져나왔다.

장군의 저택은 아주 떠들썩했다. 곳곳엔 등불과 천 장식들이 드리웠고, 정원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하인들은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분주히 일하느라 그녀가 빠져나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군과 공주의 혼사에 저택 밖도 떠들썩하긴 마찬가지였다. 축하주를 마시러 오는 하객들을 위해 성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장사꾼들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거리에 죽 늘어서서 노점을 연 장사꾼들은 큰소리로 호객 행위를 했다.

거리가 제법 떨어진 야시장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춤을 추는 이들까지 더해져 어느 때보다 활기찬 광경을 자아냈다.

백천범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어둠을 틈타 야시장으로 향했다. 우선 옷가게에 들어간 그녀는 은촛대와 맞바꿔 평범한 옷을 사 갈아입었다. 시녀의 옷을 입고 있다간 곧장 발각될 게 뻔했다.

뒤이어 전당포로 향한 그녀는 가져온 금은 집기를 전부 은전으로 바꿨다.

변장을 마친 그녀는 보따리를 든 채 사람들 틈에 섞였다. 면사까지 쓰니 다른 여인들과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커다란 찐빵 네 개를 사서 보자기에 넣은 뒤, 시장 상인들에게 마차 파는 곳을 물었다. 지난번 탈출로 교훈을 얻은 그녀는 마차를 빌리는 대신 사기로 결정했다. 마차를 몰아 본 적은 없지만 말은 타 봤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차는 그녀의 생각보다도 비쌌다. 그녀는 거의 모든 돈을 쏟아부은 뒤에야 겨우 평범한 마차를 살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날쌘 말을 고르는 데 신중을 기했다. 남원 백성들은 보통 조랑말이 끄는 마차를 사용했다. 작은 말이긴 해도 그리 느리지 않았고 산길을 능숙하게 달리기 때문이다.

돈을 지불한 그녀는 곧장 끌채에 앉아 성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마차는 얼마 못 가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기만 할 뿐이었다.

마차 가게 주인장은 그녀가 호탕하게 값을 치르자 자연스레 살뜰히 챙겨 주었다.

“아가씨, 마부를 고용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리 비싸지도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셔서 돌아갈 여비만 챙겨 주시면 됩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주 먼 곳을 갈 거라서요. 마부를 고용하긴 어렵습니다. 주인장께서 조금만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주인장은 온화한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는 선뜻 말을 모는 방법과 방향을 돌리는 방법, 언덕을 오르거나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 마차를 끄는 방법 등을 알려 주었다.

백천범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 뒤, 다시 마차를 몰았다. 역시나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주인장은 마차 아래에 서서 그녀의 동작을 고쳐 주었고, 가르쳐 주는 대로 금방 익히는 그녀의 총명함을 칭찬했다.

그녀는 주인장과 수다를 떨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손을 저으며 성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긴박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말을 몰고 성문을 향해 질주하는 호위병들이 연신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졌다. 성문을 봉쇄하라!”

그 순간, 거리에 있던 백성들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일부는 재빠르게 성문을 향해 달려갔고 일부는 거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계엄령이 내려지다니?”

“오늘은 남 장군의 혼삿날이 아니던가? 계엄령을 내리다니 설마 자객이라도 든 건가?”

“어서 가자고. 이러다 성문이 닫히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걸세.”

“오늘 밤은 야간 통행 금지를 해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문을 닫으면 우린 어찌 돌아가라고?”

백천범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마차에 앉아 있었다. 호위병들이 그녀 곁을 스쳐 간 뒤에야 그녀가 고삐를 당겨 다른 성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고삐를 잡아끌더니 마차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가 그녀의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오며 말했다.

“어딜 가려고?”

깜짝 놀란 백천범은 곧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들어갔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닙닙아, 가더라도 오라비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더냐.”

백천범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라버니, 절 잡아갈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정말 그러려 했다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백천범의 의심 어린 눈길이 남제화의 모습을 훑었다. 무명옷을 입고 머리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차림새가 남원의 대황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챙 끝에는 넓은 천을 늘어뜨려 눈매를 가리고 있었다. 남제화는 그녀에게 보따리를 쥐여 주며 말했다.

“예전에 남장을 했던 것 다 안다. 해서 남자 옷을 챙겨 왔으니 안에서 옷을 갈아입거라. 그동안 망을 봐 주마.”

의심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간 백천범이 보따리를 풀어 보니 정말로 사내 옷이 들어 있었다. 옷가지뿐만 아니라 가슴을 동여맬 천과 마부들이 자주 쓰는 모자도 있었다.

옷 밑에는 남원과 동월의 은표도 한가득했다. 게다가 통관에 필요한 문첩과 작은 병 몇 개도 함께였다. 일련의 물건들을 바라보던 백천범은 어느새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남제화와 그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건 아니니, 감정도 그리 깊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예쁜 장신구를 사다 주었고, 지금도… 도망치려는 그녀를 위해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 주었다.

코를 훌쩍이며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쓴 뒤 남제화 옆에 앉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날 오라버니라고 불러만 준다면, 언제든 널 도와줄 것이다. 닙닙아, 전부 다 기억났더냐?”

“네, 다 기억나요. 남문우는 린아가 동월 황궁에 있다던데, 절 속인 건 아니죠?”

“그렇다. 린아는 동월 황궁에 있어.”

남제화가 문득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닙닙아, 이 오라비가 널 속여서 원망스럽지?”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도 사정이 있었겠죠.”

“그동안의 이유는 알려 줄 수 없다만, 이렇게 된 이상 난 네가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네가 원하는 행복은 동월에 있을 테니.”

남제화가 별안간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닙닙아,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란다. 예전에 묵용감이 다른 황후를 들였다고 한 말은 거짓이었다고 하나, 여러 명의 후궁을 들인 건 사실이다. 저택에 있던 측왕비도 궁으로 불러들였지.

닙닙아, 이제 그는 너만의 부군이 아니다. 감정적인 문제는 이 오라비도 조금은 안다. 누군가의 마음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을 땐,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네. 조심할게요,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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