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남문우도 사슴이 수놓인 붉은색의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금관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덕분에 그의 백옥처럼 흰 얼굴과 붉은 입술이 더욱더 도드라졌다. 좁고 기다란 봉안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축하주를 마시러 온 귀부인과 아가씨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문우는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이따금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 앞에서 폭죽 소리가 들리자 그는 옷자락을 걷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혼자이던 그가 혼인을 하는 날. 드디어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이 여인은 부군도 있었고 아이를 낳은 적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오히려 사람이든 물건이든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야만 더 귀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마를 내려놓으니 혼례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신부를 내려주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아리따운 자태를 지닌 신부는 붉은 면사포 아래로 갸름한 턱만 드러내고 있었다.
남문우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백천범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을 터. 시중을 드는 이들이 신부의 자그마한 손을 신랑의 손에 쥐여 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들어가 혼례를 잘 치르라는 말을 전했다.
남문우는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이날만을 위해 걸어온 듯했다. 그가 막 새로운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주위에 있던 이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백천범이 천천히 쓰러졌다.
몹시 놀란 남문우가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고 초조하게 물었다.
“닙닙아, 왜 그래? 대체 이게 무슨, 닙닙아, 닙닙아! 어떻게 된 거야…….”
주변에 있던 이들이 서둘러 말했다.
“어서 침대로 옮기십시오. 의원을 모셔야 합니다.”
“신부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병이 난 게 아닐까요? 아이고, 어쩌다 이런 때에.”
“신부가 숨을 돌려야 하니 우리는 뒤로 좀 물러납시다.”
마음이 어수선해진 남문우는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토록 경사스러운 날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그는 백천범을 안고 신방으로 향한 뒤, 저택의 의관을 불렀다. 한참 동안 그녀의 맥을 짚고 눈을 살펴보던 의관은 오랫동안 쌓인 근심이 병이 되었다며 아무래도 과로인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남문우는 의관의 말에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백천범은 늘 평락궁에서 편히 쉬었고 혼사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과로라니?
의관은 심신을 다스리는 약을 처방해 주며 편히 쉬면 금방 깨어날 거라고 말했다. 남문우는 곧장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물리고 홀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붉은색 화촉에서 천천히 촛농이 흘러내렸다. 남문우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정말 무서우리만큼 창백했다. 입술마저 핏기가 사라져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남문우는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의 가슴이 터져버릴 정도로, 날렵한 바늘은 그를 찌르고 또 찔렀다.
뒤숭숭한 마음에 남문우는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곁눈으로 보니 백천범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곧장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남문우가 나지막이 물었다.
“닙닙아, 좀 어때, 괜찮아?”
겨우 눈을 뜬 백천범은 낯선 풍경에 조금 놀란 듯 눈을 굴렸다.
“여기가 어디야?”
“우리 신방, 잊었어? 오늘이 우리 혼삿날이라고.”
흠칫 놀란 백천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써 혼삿날이구나.”
그녀가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린아는?”
남문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의 머릿속은 한순간 파도에 씻겨내려가는 듯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누구?”
“내 아이, 린아.”
백천범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남문우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 어, 잘못 들었어.”
“린아는? 오늘이 내 혼삿날인데 린아가 화동을 해야지.”
남문우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묵용린의 기억을 떠올리고도 혼사는 당연히 여긴단 말인가? 그렇다면 묵용감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어찌 이리 기이한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린아의 이야기는 천천히 해 줄게. 곧 길시니까 어서 혼례부터 올리자. 하객들도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안 돼. 린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백천범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얼굴을 차갑게 굳힌 모습을 보니, 린아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남문우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대화가 잘 통했지만, 한번 따져 묻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린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기억해?”
백천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기억이 잘 안 나. 오라버니가 우리 모자를 데려온 것까진 기억나. 모황께서 내가 그간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다 보상해 주실 거라고 하셨어. 아무래도 그간 그리 편한 생활을 한 것 같진 않아.”
“내가 알려 줄게.”
남문우가 그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린아의 아버지는 동월의 황제야. 하지만 너희 모자를 버렸어. 그래서 폐하께서 대황자를 보내 너희를 데려오신 거야.”
“린아의 아버지가 왜 우리를 버렸는데?”
“네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으니까. 동월과 남원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적국의 공주가 황제와 함께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 네가 그 사람 곁에 남아 있으면 그자를 모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게다가 동월 황제도 널 필요로 하지 않았어. 그자의 후궁은 미인들로 넘쳐나거든. 네가 없어도 되니 너와 린아를 버린 거야.”
“그럼 우리 린아는?”
“황제는 널 버린 뒤에 금방 아들을 낳을 수 있을 줄 알았나 봐. 하지만 하늘이 복을 내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아이를 얻지 못했어. 그래서 린아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어. 하지만 네가 돌아오는 건 절대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
백천범이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가 입술을 악물며 애처롭게 말했다.
“나도 그런 사람은 필요 없어. 하지만 린아만큼은 있어야 해.”
“린아는 그 사람의 아들이야. 묵용씨 성을 가진 아이잖아. 그자가 린아를 돌려줄 일은 없을 거야.”
남문우는 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가 그렇게 좋으면 앞으로 많이 낳으면 되지.”
“아니, 난 우리 린아를 찾아야 해.”
“린아는 이미 동월국 황궁에 있어.”
“정말이야? 날 속이는 건 아니고?”
남문우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공작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전부 다 진짜야.”
남원 사람들은 공작신을 추앙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건 진심이었다. 눈꺼풀을 내리깐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더니 이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문우야, 린아는 내 아들이야. 내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라고. 그 애의 아버지가 누구든 내가 데려와야 해. 약속해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애를 찾아오겠다고.”
남문우는 정말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토록 애처롭게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뒤, 호기롭게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 혼사를 치르면 내 아들이기도 하니까. 반드시 린아를 찾아올게.”
“고마워, 문우야.”
백천범은 감격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남문우의 손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문우는 그녀의 접촉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크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니 나가서 혼례를 올리자.”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신발을 신고 한 걸음을 내딘 순간 또다시 눈앞이 핑글 돌았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그녀를 남문우가 붙잡아 주었다.
“많이 힘들어?”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백천범은 머리를 감싸 쥐며 침대가에 몸을 기댔다.
“조금 더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 문우야, 먼저 나가서 하객들이랑 인사부터 나눠. 손님한테 뭐라도 대접해야지. 손님치레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뒷말이 오갈지도 몰라. 난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으니까 일어나는 대로 알려 줄게.”
그녀의 말에 남문우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저택에 왔으니 그와 그녀는 한 가족이 된 셈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에게 더욱더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짧게 대답한 후,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이윽고 그가 흐뭇한 마음으로 하인을 불러 그녀의 시중을 들게 했다.
정원의 연회장은 하객들로 가득했다. 남문우가 밖으로 나오자 하객들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추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큰 경사를 맞아 기분이 좋았던 남문우도 활짝 웃으며 일일이 응했다.
잠시 뒤, 남문우는 관리인을 불러 다시 혼사를 진행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관리인은 이미 길시가 지났으니 대제사가 다시 점을 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남문우는 어쩔 수 없이 손님들에게 먼저 연회를 즐기라고 전달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혼례를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터였다.
그는 줄곧 하객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누군가 축하주를 권하면 수행원들이 그 대신 술을 마셔 주었다. 그는 혼사를 치르기 전엔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스레 술 냄새가 나면 백천범이 싫어할까 봐 걱정이었다. 신부를 기쁘게 해야 초야를 잘 치를 수 있었다.
마침내 관리인이 그에게 헐레벌떡 뛰어와 소식을 고했다.
“장군, 길시입니다.”
남문우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공주를 밖으로 모시거라.”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신부의 시중을 들던 이가 달려와 말했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공주 마마께서 방에 안 계십니다.”
그 순간, 남문우는 줄곧 그의 가슴을 팽팽하게 당기던 활줄이 탁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미 화살은 어딘가로 쏘아져 날아간 듯했다. 불안한 기운은 줄곧 그를 괴롭혔지만, 혼사를 맞이해 너무 긴장한 탓이라 여겼다.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억누르던 불안은 기어이 사달을 불러오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신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가 방을 나설 때와 달라진 거라곤 누군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백천범이 아니라 시중을 들라고 불렀던 시녀였다. 바닥에 쓰러진 시녀는 정신을 잃고 혼절해 있었다.
분노가 치민 그는 주위에 있던 이들의 뺨을 때렸다. 쓰러진 시녀를 일으켜 뺨을 몇 대 날리자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손찌검에 정신을 차린 시녀가 멍하니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남문우가 매섭게 시녀를 쏘아보았다.
“말하거라, 공주는 어딜 간 것이냐?”
시녀가 곧바로 흐느끼며 답했다.
“장군, 고, 공주 마마께서 도망치셨습니다. 절 때려 쓰러뜨리시고는, 도, 도망치셨습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온 성에 계엄령을 내려 무양 공주를 추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