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황제의 혼사는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었다. 비어 있는 중궁에 갑자기 남원의 공주를 들이겠다니, 영구와 백장간을 제외하고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궁에서는 기뻐하는 이들도, 근심에 잠긴 이들도 볼 수 있었다. 기뻐하는 이는 당연히 문무백관들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이번 혼사는 정치적인 혼인에 불과했다. 남원은 작은 나라지만 자원이 풍부했고, 서남 지역 일대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나라이기도 했다. 물론 몽달이나 북제의 공주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하긴 했지만, 남원도 나쁘진 않았기에 그들은 선뜻 혼사에 찬성했다.
서 태후도 크게 기뻐했다. 황제가 마침내 중궁에 사람을 들이려 하다니, 분명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마음을 열고 여인들을 받아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어떤 여인이든 다 좋았다.
반면 근심에 잠긴 이들은 후궁의 궁비들이었다. 황제는 현비만 총애했을 뿐, 나머지는 승은을 입은 적도 없었다.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황제가 돌아볼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박살 내며, 황제가 전쟁에 나가더니 황후를 데려올 줄 누가 알았을까? 황후는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었다. 설령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황후라고 해도 궁비들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자안궁에 문안을 드리러 간 수원상은 의견이 분분한 후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숙비가 웃으며 말했다.
“하, 정말 재미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황후를 데려오시다니. 장차 미담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늘 눈치 없이 굴던 현비가 웃으며 말했다.
“곧 황후 마마가 들어오시면 후궁을 이끌 분이 생기는 거네요.”
숙비는 빠르게 수원상의 얼굴을 훑었다.
“신첩은 양비 마마께서 황후로 제격이라 생각했습니다. 후궁을 이리 잘 돌봐 주시고 태자 전하도 잘 가르쳐 주시니까요. 어제 전하를 뵈러 갔는데 절 보고 웃어 주시던걸요.”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를 수원상이 어찌 알아차리지 못할까, 다만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신첩은 그저 황상의 짐을 덜어 드리려 본분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들은 황상께서 결정하시겠지요.”
이 귀인이 말했다.
“황상께서는 전하의 친어머니만 마음에 두시던 게 아니십니까? 그래서 줄곧 황후를 들이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어찌 마음을 바꾸신 것일까요? 이번에 들이실 황후께서 정말 황상의 눈에 드신 걸까요?”
순간 수원상은 서늘한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는 듯했다. 남원과의 전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같은 때에 별다른 조짐도 없이 전쟁에 나선 이유부터가 수수께끼였다. 더욱이 전쟁을 치른다 해도 수많은 장군들을 내버려 두고, 어찌 묵용감이 직접 나선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는데 황후까지 들이겠다니……. 다른 건 걱정되지 않았지만, 혼사를 치른 후 묵용감이 황후에게 태자를 넘길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거의 모든 걸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태자를 그녀가 데리고 있었으니, 아이에 대한 감정도 남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서 태후는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차를 들이켜며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곁눈질로는 수원상의 안색을 살폈다. 원한이나 불만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표정에 서 태후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여인의 마음은 워낙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녀 또한 후궁 여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었다.
서 태후는 이들 중에서 수원상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후궁에서는 언제나 남을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어쨌든 수원상이 묵용린을 돌보고 있으니 만약 태자에게 화풀이를 한다면, 대죄를 짓는 일이 아니던가? 후궁들의 잡담에 머리가 아파진 그녀는 그들을 모두 물리고 수원상만 남게 했다. 그녀가 다정하게 수원상의 손을 잡았다.
“양비, 요즘 고생이 많습니다. 황제가 돌아오면 애가가 상을 내리라고 할게요.”
“신첩은 그저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어찌 상을 바라겠습니까. 그저 그르친 일이 없기만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잘 해내는데 그르친 일이라니요. 다른 이들은 모른다 해도 애가는 다 압니다. 태자를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서 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이왕 양비에게 후궁과 태자를 맡겼으니 애가도 조만간 황제에게 얘기를 꺼내려 했습니다. 양비가 곧 중궁에 들 줄만 알았습니다. 한데 황제가 전쟁을 치르고 공주를 데려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라 간에 수교를 맺기 위해 황제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 마음 쓰지 마세요. 황후에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귀비의 자리에 청하는 것은 문제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비만큼은 애가가 늘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수원상이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불야께서 그리 신첩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신첩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첩, 노불야께서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신첩은 어떤 지위든 개의치 않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지요. 그저 황상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고, 황상께서 신첩을 신임하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황상께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셨다면, 신첩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평안을 바랄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그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셨으니까요. 그러니 노불야께서도 마음 놓으십시오. 황후께서 입궁하시면 신첩은 황상을 존경하는 것처럼 황후 마마를 존경할 것입니다.”
서 태후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수원상의 손등을 다정히 토닥였다.
“마음씨가 이리도 곱다니, 그리 생각하는 게 맞긴 해도 양비를 서운하게 했습니다.”
* * *
동월국 황제가 남원의 무양 공주와 혼사를 치른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남원의 공주가 어떤 여인일지 궁금해했다. 또한 그녀가 황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화두에 올랐다.
황제가 초왕일 때 초왕비를 끔찍이 아꼈다는 소문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황제가 황후를 들인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세월은 이겨 낼 수 없다고 여겼다.
남원 여제는 정성을 다해 무양 공주의 혼수를 챙겼다. 십 리에 달하는 혼수 행렬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며 하서회랑에서 북쪽으로 향했고, 동월국 국경에 들어섰다. 공주는 꽃마차를 타고 있었다.
차체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고, 끌채에는 은방울과 명주 끈이 달려 있었다. 공주를 배웅하는 호위병들은 금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조롱박 피리와 북을 치는 소리 덕분에 떠들썩한 경사 분위기가 풍겼다.
국경에는 이천행이 그들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를 수행하는 궁녀와 마마嬷嬷들을 제외한 호위병들은 다시 남원으로 돌아갔고 국경에서부터는 동월의 병사들이 공주를 호위했다.
무양 공주가 떠나는 날, 남원 황궁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다. 여제는 공주를 배웅하기 위해 직접 성벽까지 향했고 눈물 어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사실 이날은 두 명의 남원 공주가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한 사람은 동월로 시집가는 무양 공주, 다른 한 사람은 남 장군에게 시집가는 단령 공주였다.
단령 공주와 남 장군의 혼사는 일찍이 정해져 있었기에 남원의 백성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게다가 동월로 시집을 가는 무양 공주의 어마어마한 혼수 행렬에 이목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소식은 쉽게 묻혀 버렸다.
가마는 밤이 되어서야 남 장군의 저택으로 향했다. 흔들거리는 가마에 앉아 있던 백천범은 괜스레 마음이 초조했다. 꼭 눈앞에 천 길 나락이 펼쳐진 듯했다.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내디디면 깊은 나락에 빠져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혼사를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청매죽마인 그녀의 짝과.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어째서 이토록 위태로운 기분이 든단 말인가?
흔들거리는 가마 때문일까?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는 가마 벽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곧장 그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윽한 눈빛이 꼭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대체 누구시길래, 왜 계속 제 머릿속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이더니 긴 한숨만 내쉬었다. 그녀는 그제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유난히 까맣고 티 없이 맑았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본 아이는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벼락이 내리친 듯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몸인데, 어찌 그녀를 어머니라 부른단 말인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온 아이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아이를 안아 주었다. 아이는 아주 익숙한 자세로 그녀의 목을 감싸더니 자그마한 얼굴을 비볐다.
젖비린내가 났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이대로 아이를 내려놓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도 아이에게 볼을 부비다 입을 맞췄다. 아이는 간지러운지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녀는 아이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이토록 기쁘긴 오랜만이었다.
그때, 사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천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오? 나와 린아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
그녀는 의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해도, 린아는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그 두 글자를 듣는 순간 가슴이 이리도 저릿한 걸까?
품에 안긴 아이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조그만 입을 달싹였다.
“어머니, 제가 린아예요. 제 이름은 묵용린이고, 저분은 제 아버지 묵용감이시고요. 그리고 어머니는 제 어머니이자 초왕비인 백천범이세요.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요!”
그 순간, 백천범은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붉은 면포를 걷어올린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이제서야 모든 게 떠올랐다. 그녀는 초왕비 백천범이었고 그녀의 지아비는 초왕 묵용감, 두 사람의 아이는 묵용린이다. 그녀와 아이는 납치되었고 남제화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남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누군가 머리를 바늘로 쑤시는 듯했다. 대체 그 뒤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그녀의 린아는? 린아를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린아는 어딜 가고 매일 표범만 그녀의 곁을 지켰단 말인가?
그녀의 곁엔 린아가 있어야 했다. 린아, 우리 린아, 우리 린아를 잃어버리다니, 이제 무슨 낯으로 묵용감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산굴에 있을 때만 해도 분명 린아를 품에서 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남원에 와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묵용린의 돌잔치까진 기억할 수 있었다. 금빛 찬란한 두봉을 입은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린아, 이 어미가 미안하다. 제발 기다려 주렴. 이 어미가 어떻게든 널 찾아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