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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34)화 (533/1,192)

제534화

이천행의 부름에 남문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지 장군은 이미 죽었지. 난 남 장군이다.”

그가 황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따로 얘기 좀 할까.”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병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남 장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뛰어난 기상과는 다르게 묘하게 풍기는 불량배 같은 분위기가 위화감을 자아냈다.

“전투에 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뱀이나 맹수와의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황제의 차가운 눈빛이 남문우를 관통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장군을 보내어 막고, 홍수가 밀려오면 흙으로 둑을 쌓아 막는다. 수장이라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도 모르는 것이냐?”

황제는 준엄하게 말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더는 보낼 맹수도 없을 테니, 이제 병력으로 싸워야 하지 않겠나?”

남문우가 고개를 젓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폐하께서는 냉혹하고 무정한 분이 아니시지. 젊은이들을 전장에 내보내 공연히 죽게 하는 일은 없거든. 워낙 인자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셔서 말이야. 그래서 병사들은 없어. 오직 본 장군뿐이다.”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이냐?”

남문우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없단 말이지. 남원 사람들은 목숨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서 말이야. 한 명이라도 죽으면 폐하께서는 한나절을 슬퍼하시지. 한데 어찌 전장에 내보내겠어.”

황제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아 재차 물었다.

“정말 이 맹수들로만 전쟁을 치르겠다고?”

“맞아.”

남문우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그 또한 남원의 일부인데 남원을 위해 출전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결국 황제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짐을 멸시하는 것인가?”

“어찌 감히?”

남문우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타국의 눈에는 남원이 신비해 보이겠지만 이곳은 저주받은 나라다. 수백 년간 남원의 인구는 계속 감소하였지. 결국 약소국이 되어 강대국에 굴복했고.

이곳은 금광도 풍부하지만 하천, 산천, 밀림, 다른 자원도 훌륭하다. 꽃과 날짐승도 많아 어느 곳에서든 화려한 꽃을 볼 수 있고 맹수를 키우는 사람도 적지 않아. 맹수가 사람 수보다 많을 정도지. 사자나 호랑이가 거리를 거닐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그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닙닙이도 표범을 기르잖아? 이 나라는 뭐든 잘 기르는데 유일하게 사람은 기르지 못하는 듯하더군. 노래나 춤에는 능한데 싸움에는 영 소질이 없어. 그러니 남원은 지금껏 전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지.”

“지난번에 짐이 본 병사들은?”

“맞아. 우리 폐하의 호위병들이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원의 여제가 날 잡으려 했단 말인가?”

남문우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타국의 황제가 몰래 국경을 넘어 잠입했는데 그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황제가 갑작스레 그의 말을 되짚었다.

“방금 그녀를 뭐라고 부른 것이냐?”

남문우는 더욱더 우쭐해지고 있었다.

“난 그 애를 닙닙이라고 불러. 넌 이렇게 불러 본 적 없겠지. 그 애의 아명이자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니까.”

질문을 던지는 황제의 어조는 아직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그녀가 남원 여제의 딸이란 말이냐?”

“물론, 틀림없는 사실이지.”

“아버지는?”

남문우가 미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황제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온 이유는 무엇이냐?”

“두 가지야.”

남문우가 매끄럽게 말했다.

“첫째, 난 너와 필사적으로 싸울 거야. 네가 내 여인을 빼앗아 가려 하니까.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거든. 둘째, 남원을 대표해서 화의를 청하러 왔어.”

황제의 얼굴에 노기가 번져나갔다.

“그 사람은 내 여인이다. 내가 데려가는 것이 당연한 도리란 말이다!”

“곧 나와 혼사를 치를 여인이라니까!”

“그렇다 한들 내가 그녀를 폐위하는 게 우선이다.”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하며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엔 불꽃이 이는 듯했다. 한참 서로를 노려본 끝에, 남문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결투를 벌여 볼까? 이기는 자가 그녀를 데려간다.”

황제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덤비거라.”

남문우는 검을 뽑아 들고 말에서 내렸다. 황제도 말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허리를 약간 숙인 채 발걸음을 옮기며 신중한 자세로 잠시 대치했다.

남문우가 선제공격을 하자 황제는 물러나는가 싶더니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보검은 허공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남문우의 등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남문우는 조급해하지 않고 몸을 돌려 예리한 칼끝을 비켜 나갔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더니 대붕전시大鵬展翅(대붕이 날개를 편 모양) 수로 황제를 공격했다. 황제는 몸을 숙이고 바닥을 구른 뒤 다시 뛰어올라 그의 허리를 발로 가격했다.

두 고수의 싸움은 몹시 통쾌했기에 병사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검술이든 권법이든 미세하긴 해도 황제가 한 수 더 높은 무예를 선보이고 있었다. 거의 오십여 합을 겨루자, 남문우의 패색이 짙어졌다.

반면 황제의 기세는 점점 더 맹렬해졌다. 결국 황제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남문우의 손에서 장검이 튕겨 나가더니, ‘칭’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 바닥에 꽂혔다.

황제가 다가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는가?”

남문우가 코웃음을 쳤다.

“못 본 사이에 기술은 제법 늘었군. 예전에도 내가 한 수 뒤떨어졌으니 날 이겼다 해도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니지.”

황제는 실소를 흘렸다. 아직도 어릴 때처럼 억지를 부리다니.

“그렇다면 무엇을 겨루고 싶은 것이냐?”

“물론 활쏘기지. 감히 나와 겨룰 수 있겠나?”

남문우의 태도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다른 건 몰라도, 활쏘기만큼은 언제나 묵용감을 앞섰던 그였다.

황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승부에 응했다.

그 순간 모래바람이 천지를 뒤덮는 통에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쉭쉭대는 소리가 연달아 세 번 들려왔다. 병사들이 겨우 눈을 뜨고 둘러보니, 남문우가 쏜 세 발의 화살이 동월군의 커다란 깃발에 꽂혀 있었다. 검은 화살 깃이 햇볕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황제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활을 들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그는 마찬가지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남원의 깃발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남문우가 쏜 화살은 일자로 늘어선 반면, 황제의 화살은 전부 같은 곳에 꽂혀 있었다. 한 자리에서 펼쳐진 화살 깃이 꼭 피어난 꽃처럼 보였다.

남문우가 그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이야, 제법인걸. 날 이기려고 그동안 실력을 갈고닦았나 보군?”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구나. 네가 진작 죽은 줄 알았대도.”

남문우가 도발하듯 내뱉었다.

“움직이는 걸 맞혀 보는 게 어때? 병사 두 명이 걸어가는 동안 투구 위의 깃을 맞히는 거지. 더 먼 거리에서 맞힌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고.”

그의 제안에 황제는 곧장 몸을 돌려 산 표적이 될 지원자를 찾았다.

병사들을 앞다투어 손을 들었고 황제는 아무나 한 명을 골랐다. 남문우도 남원의 고수 중 한 명을 골라 자신의 투구를 머리에 씌워 주었다.

첫발은 남문우가 쏘았다. 휙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투구의 깃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황제를 힐끔거렸다.

황제는 가뿐하게 화살을 쏘아냈다. 마찬가지로 사병의 투구 깃에 화살이 박혀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병사가 시야에서 멀어지길 기다렸다. 마음이 초조해진 사장풍이 조용히 이천행에게 물었다.

“황상께서 어찌 활을 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이러다 사정거리를 벗어나겠습니다.”

이천행이 참을성을 발휘라하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황제와 남문우가 동시에 활을 쏘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자 이천행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인내심을 겨루는 거라네. 누가 더 침착하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지. 먼저 활을 쏘았다간 명중했다 해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네. 나중에 쏠수록 최대 사정거리가 될 테니 승리를 거머쥘 수 있지 않겠는가.”

다들 눈을 크게 뜬 채 결과를 지켜보았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고 앞으로 걸어가던 두 병사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투구를 벗었다. 한 사람은 투구를 들어 올리며 흔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과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월의 사병들은 곧장 환호하기 시작했고 남문우의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구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곧 두 개의 투구가 두 사람에 앞에 놓였다. 남문우의 화살은 깃 아래쪽에 꽂혀 겨우 붙어 있었고, 황제의 화살은 정확히 깃 한가운데를 명중한 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 *

이번 전쟁이 얼마나 기이했든 동월은 승리했고, 남원은 패배를 인정했다. 곧 두 국가 사이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

묵용감의 요구 사항은 한 가지뿐이었다. 백천범을 다시 동월로 데려가는 것. 남문우는 남원의 여제를 대표해 겨루다 패배했으니 그 제안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한들, 돌아가 여제의 뜻도 들어야 했다.

묵용감은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국경에 대군을 배치했다. 사흘 안에 소식이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백천범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이튿날, 남문우가 그의 군영을 찾아와 여제의 뜻을 전했다. 여제는 이제 막 딸을 찾았는데, 제대로 해 준 것이 없어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게다가 지금의 백천범은 남원의 무양 공주로 지내고 있는데 어찌 조용히 남원을 떠나보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여제는 동월의 황제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한다면 무양 공주의 체면이 설 수 있게 정식으로 맞이해 세간의 시답잖은 말을 막아 달라고 제안했다.

묵용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백천범만 데려갈 수 있으면 족했다. 다만 남원 여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제 백천범은 한낱 승상의 딸이 아니라 이웃 국가의 공주가 아니던가. 응당 예를 갖추어 그녀를 신부로 맞이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백천범과 혼사를 치를 때, 그 대신 진왕이 그녀를 맞이했었다. 당시엔 대충 혼사를 치를 생각뿐이었다. 그때 그녀를 무성의하게 대한 덕분에, 이런 고된 길을 걷는 것은 아닐까.

그래, 그도 정식으로 예를 갖춰 백천범을 궁으로 맞이해 황후의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지금껏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잠깐을 못 기다릴까. 묵용감은 선선히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의 대군은 여전히 경계를 지키며 무양 공주가 올 때까지 대기했다. 그는 우선 도성으로 돌아가 혼사에 필요한 절차를 처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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