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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33)화 (532/1,192)

제533화

수민이 서둘러 자안궁에 다다르자, 서 태후는 역시나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녀가 수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 대인, 황상이 서북에서 남원과 전쟁을 치른다던데, 맞는가?”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불야께 아룁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께서는 용병에 뛰어난 군신이셨습니다. 게다가 서북에는 이미 강한 주둔군이 배치되어 있으니 분명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실 겁니다.”

서 태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승패를 떠나 황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네. 이제 겨우 나라가 평안해졌는데 어찌 또 전쟁이란 말인가? 화살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애가는 정말 걱정이네.”

수민은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남원과 동월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설명하던 그는 마지막엔 가슴에 손을 얹고 황제가 무사 귀환할 거라며 호언장담까지 했다. 서 태후는 그제야 겨우 걱정을 내려놓고 그를 보내 주었다.

자안궁을 나온 수민은 곧장 경수궁으로 향했다. 수원상도 그에게 궁금할 게 많을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수원상은 곧장 질문을 퍼부었다. 다만 그녀의 관심은 황제의 안위가 아니라 전쟁에 있었다.

“아버님, 말씀해 보십시오. 황상께서 왜 남원을 치시려는 겁니까? 남원은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남원에 황금이 엄청나다던데, 설마 황금 때문입니까?”

수민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그런 것에 욕심을 내는 분이 아니시다. 지금처럼 태평한 때에 다른 나라에 손을 뻗으시다니. 지금은 휴식을 취할 시기라는 걸 황상께서도 잘 알고 계실 터, 아무래도 이 전쟁은…….”

“아무래도, 무엇입니까?”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전쟁이겠지!”

잠시 침묵하던 수원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설마…….”

수민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진정하거라. 모든 건 그저 추측일 뿐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보자꾸나. 머지않아 내막을 파악할 수 있겠지.”

* * *

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자 전고가 울렸다. 햇살 아래, 가지런히 대열을 갖춘 동월의 병사들은 반짝이는 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남원의 병사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지만, 전고 소리는 유난히 힘차게 울려 퍼졌다.

또한 고수鼓手(전쟁에서 북을 치는 사람)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오색 천을 싸맨 채 통일된 동작을 선보였다. 단순히 북만 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춤 동작이 섞여 있어 꼭 연극을 보는 듯했다.

처음 이 장면을 보았을 때, 동월의 병사들은 큰 흥미를 느꼈다.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사장풍과 이천행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체 이게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전쟁터에 병사들이 없다니? 설마 북을 치고 춤을 선보인 뒤에 전쟁을 끝낸다는 황당한 수작인가?

이천행이 영구에게 물었다.

“전쟁에 응한다고 한 게 아니던가? 병사들은? 설마 무서워서 백기라도 들려는 작정인가?”

영구는 무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더니 살짝 턱을 들어 올렸다.

“왔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달려오는 속도가 느렸지만,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키와 덩치가 무척 커서, 꼭 담장을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대체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동월의 병사들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그때, 남원의 전고 장단이 바뀌었다. 격앙되면서도 낮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박자도 훨씬 빨라졌다. 고수들은 입으로 기이한 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더디게 다가오던 거대한 형체가 갑작스레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앞으로 질주했다.

사장풍이 질겁하며 소리쳤다.

“코끼리 떼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사병들은 동요했지만, 황제의 평온한 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그가 침착하게 명을 내렸다.

“대열을 세 진으로 나누고 각각 한 진영씩 맡거라. 영구는 남쪽, 사장풍은 서쪽, 이천행은 북쪽으로 빠르게 흩어지거라. 추격을 당하거든 말을 버리고 코끼리에 올라타거라!”

세 사람은 곧장 명을 받들고 빠르게 대열을 이동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흥분한 코끼리 떼가 코앞까지 달려왔다. 역시나 코끼리는 사람이 보이는 족족 발로 짓밟았다. 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대비해 둔 덕분에 큰 타격은 없었다. 황제는 예리한 눈빛으로 코끼리 떼를 바라보다, 그에게 몸을 부딪치려는 코끼리가 다가올 땐 민첩하게 몸을 피했다.

영구가 반사적으로 황제를 보호하려 하자 이천행이 호통을 쳤다.

“무턱대고 덤비지 말게, 그러다 일을 그르치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황제는 어느새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늠름한 코끼리였다.

부채처럼 커다란 귀에 높게 들어 올린 기다란 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까지, 처음 보는 이들에겐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코끼리의 두꺼운 가죽을 붙잡은 황제는 허리에서 비수를 꺼내 코끼리의 머리를 힘껏 찔렀다. 고통을 느낀 코끼리는 몸을 비틀며 그를 떨어뜨리려 했다. 황제는 비스듬하게 매달린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은 제각기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코끼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저 한쪽 손에 든 비수를 연이어 찔러 댈 뿐이었다.

피를 흘리던 코끼리는 결국 울부짖기 시작했다. 늠름한 기세를 잃더니 비틀거리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여전히 마구 몸을 부딪치던 다른 코끼리들도 점차 속도를 늦췄다.

그때 황제가 큰소리로 외쳤다.

“창으로 바꿔 포위 공격하라. 한 마리씩 공격한다!”

장병들은 곧장 대형을 갖추어 코끼리 떼를 분리했다. 무수히 많은 창이 코끼리의 몸을 찌르자 선혈이 솟구쳤다. 한바탕 살상이 이어지자, 거대한 형체는 맥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때, 남원의 전고가 뚝 멈췄다. 아직 죽지 않은 코끼리들은 사병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멈추더니 돌아왔던 길로 빠르게 질주했다.

사장풍은 바닥에 쓰러진 코끼리 시체를 바라보며 하찮다는 듯 말했다.

“기병奇兵이라도 내보내는 줄 알았더니, 겨우 이거였네.”

곧이어 멈췄던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날카롭고 급박한 소리였다. 이윽고 하늘 저편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이 빠르게 동월의 병사들에게 번져 왔다.

자세히 바라보니 구름이 아니라 새 떼였다. 그리 큰 새는 아니었지만 저마다 매우 뾰족한 부리를 가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빠르게 하강한 새가 있는 힘껏 부리를 내리쳐 병사들을 공격했다. 수법이 상당히 노련한 걸 보니 특별히 훈련을 받은 새가 틀림없었다. 사병들은 피범벅이 된 눈가를 부여잡고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잔혹한 방식에 분노한 병사들은 검과 창을 휘저으며 허공에 날아다니는 새와 전투를 시작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천행이 궁수들에게 연달아 화살을 쏘라고 분부했다. 화살에 명중한 새가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것도 잠시, 더 많은 새가 날아들었다. 더구나 새들이 어찌나 영민한지 다른 병사들은 내버려 두고 궁수만 골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병사들이 궁수들을 도와주려는데 먼 곳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거대한 새 떼가 날아들고 있었다. 기다란 꼬리를 늘어뜨린 채 병사들 사이에 내려앉은 새들은 갑작스레 꼬리를 펼쳤다. 곧장 파란 불길이 일며 병사들의 전포戰袍(병사들이 입는 군복)에 옮겨붙었다. 새들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된 전장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변모했다.

황제가 침착하게 소리쳤다.

“모래를 날리거라!”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서둘러 장검과 창으로 모래를 일으켰다. 불을 끄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힘만 세게 주면 화살 깃처럼 무기로 쓸 수도 있었다.

큰 새들은 워낙 덩치가 육중해서 땅에 내려앉는 즉시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작은 새들도 모래바람에 균형을 잃더니 하나둘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결국엔 동월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동월군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남원의 전고가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천행이 결국 욕을 퍼부으며 삿대질을 했다.

“제기랄, 능력이 있으면 제대로 겨룰 것이지, 이따위 잡동사니를 보내는 건 무슨 수작이란 말이냐?”

영구가 차가운 얼굴로 한곳을 노려보았다.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을 내밀고 바라보아도 지평선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장풍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디 있다는 것입니까?”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어둡게 깔렸다.

“발밑을 조심하거라.”

병사들을 그제야 바닥을 뒤덮은 모래 사이로 꿈틀거리는 까만 형체를 알아차렸다.

“뱀이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영구와 사장풍은 황제의 곁을 지키며 다가오는 뱀 떼를 노려보았다.

뱀 떼는 사람이 아닌 말을 물었다. 깜짝 놀란 말들은 장병들을 등에 태운 채 이리저리 날뛰었다. 한 병사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뱀 떼가 곧장 그를 뒤덮더니 꿈틀거리며 온몸으로 그를 파묻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황제는 당황하지 않고 연이어 명령을 내렸다.

“전포를 벗어 창에 묶거라. 횃불로 사용하겠다.”

냉정하고 침착한 황제의 모습에 병사들은 마음을 다잡고 그의 말을 따랐다. 화절자火折子로 전포에 불을 붙이자 불길이 속속들이 치솟았다. 곧장 뱀을 향해 내던지니 역시나 형세가 역전되었고 엄청난 기세로 몰려들던 뱀 떼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세 번의 교전을 치르고 나니 동월군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장은 줄곧 그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소나무처럼 곧고, 태산처럼 강인한 수장은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있는 한, 남원이 무슨 수작을 부려도 두렵지 않았다.

북소리는 다시 멈췄고 온 하늘에 모래바람이 휘날리더니 죽음 같은 적막만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긴장을 늦추는 이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지평선에 고정된 듯했다.

한참 뒤, 마침내 점처럼 작은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형체를 예의주시했다. 누군가 말에 올라탄 채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들 기이한 표정으로 그자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사람이 나타나긴 했지만, 고작 한 명이었다. 설마 저 한 사람이 천군만마를 무찌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란 말인가?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보탑寶塔 같은 모양의 투구 아래로 훤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천행이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이름 하나를 읊었다.

“위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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