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2화
사장풍은 물기를 짜낸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며 웅얼거렸다.
“잠깐 속인 것뿐인데 이렇게 울 일입니까? 그리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데 창피하지도 않아요?”
사앵앵은 수건을 가로채 직접 얼굴을 닦더니 다시 사장풍에게 넘겨주었다.
“당신을 따라온 순간부터 내게 체면이란 건 없었다고요. 당신 때문에 망신을 얼마나 많이 당했는데요.”
“내가 뭘 그리 망신을 주었다고.”
사장풍은 억울해하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뭐든 다 내 책임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사앵앵은 몇 차례 힘껏 코를 풀더니 천천히 마음을 다독였다.
“하나만 물을게요. 선봉에 서려는 이유가 그 애 때문이에요?”
사장풍이 곧바로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빨리 대답하는 걸 보니 확실하네요. 뒤가 켕기는 거잖아요!”
지금껏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녀가 어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상처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 애 때문에 곧장 출전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상처가 다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방금 다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마당을 대여섯 바퀴는 돌았습니다.”
사장풍이 옷을 벗는 시늉을 했다.
“아니면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까?”
사앵앵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고 싶대요?”
사장풍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오해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애 때문에 또 무슨 일을 더 벌이겠습니까? 그 부군이 떡하니 위층에 있는 것을. 지금 제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 군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군대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잠시 정신이 나간 탓에 앞길을 망치지 않았다면 임안성에 쳐들어간 공로는 저에게 있었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호국대장군은 되고도 남았겠지요. 서북에서 역참을 운영하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겁니다…….”
사앵앵이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한 말이 얼마나 많은데 어떤 말을 말하는 겁니까?”
“앞길을 망쳤다는 말이요.”
“잠시 정신이 나가 제 발로 앞길을 망쳤습니다.”
사앵앵이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사장풍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땐 귀신에 홀렸던 것인지,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사앵앵이 찌푸렸던 미간을 폈지만, 무언가를 생각한 듯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정신이 나가지만 않았으면 나랑 이곳에 와서 역참을 돌볼 필요도 없었고 계속 장군으로 지냈을 거리는 뜻이에요?”
“…쿨럭, 크흠, 사실 역참을 돌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장군으로 지낼 때보다 돈도 더 많이 벌고, 높으신 황제도 멀리 계시니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사앵앵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듯 누그러졌다.
“전쟁을 나가겠다면 막진 않을게요. 하지만 하나만 알아 둬요. 돌아오지 않으면 이 역참은 다 내 거라는 걸요.”
사장풍이 얼굴을 굳혔다.
“농을 쳐도 꼭. 이렇게 큰 장사를 혼자 독차지하겠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올 겁니다.”
사앵앵은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알겠어요. 그만 나가 봐요. 당신이 무슨 짐을 싸요. 내가 쌀게요. 그리고 저녁에는 맛있는 걸 준비하라고 부엌에 일러둘게요. 송별연은 해야죠.”
사장풍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좋아요. 집안일을 잘 돌보는 착한 부인.”
사앵앵이 일부러 그를 흘겨보았다.
“뭐라고요?”
사장풍은 밖으로 나가며 대꾸했다.
“누군진 몰라도 당신한테 장가가는 사람은 정말 땡잡은 겁니다.”
“썩 나가요!”
사앵앵은 그의 엉덩이를 발로 힘껏 차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어휴, 정말!”
복도로 나온 사장풍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열린 방문 사이로 좁지만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사앵앵은 그곳에 서서 그 대신 짐을 싸 주고 있었다. 손끝으로 가지런히 갠 옷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정은 만조처럼 천천히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지금 곁에서 흘러가는 시간이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는 난생처음 깨달았다. 어쩌면… 이게 행복이 아닐까?
* * *
남문우가 평락궁에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백천범은 복도에 서서 새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점박이가 앞발을 움찔거렸다. 새 우리를 발로 낚아채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었다. 점박이는 질투심이 많아서 주인이 다른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싫어했다.
남문우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곁으로 다가간 그가 말을 건넸다.
“너, 또 질투하는 거지? 네가 사내였다면 질투심이 정말 대단했을 거야.”
백천범은 미소를 지으며 점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한 사내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눈가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매서웠고 안색도 좋지 않아, 누가 봐도 성이 난 얼굴이었다. 사내가 질투심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말투로 물었다.
“나와 저자 중에 누굴 선택할 것이오?”
백천범은 잠시 넋을 놓았다. 그 사내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했다. 사내는 얼마 전 그녀가 마주한 그 사람이었다. 남문우의 옛 친구라던 그 사내.
“닙닙아, 왜 그래?”
남문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가볍게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냐.”
백천범은 억지로 미소를 띠며 모이를 전부 우리 안에 넣어 주고는 한쪽에서 손을 닦았다.
남문우가 의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멍해 보였는데, 불편한 데라도 있는 거야?”
“아니, 날이 더워서 그런 거겠지.”
백천범은 분주히 손을 닦으며 대꾸했지만, 사실 남문우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최근 넋이 나간 상태였다. 매일 밤 끊임없이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늘 똑같은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커다란 체구에 흐릿한 얼굴.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날 밤 그녀를 데려가려던 그 사내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번 만난 사내 때문에 이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는 매일 그녀의 꿈에 나타나 다양한 일들을 함께했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길을 걷거나, 서예를 하거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거나…….
그런 사소한 일 외에도 깊은 상황들이 펼쳐졌다.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는 눅진한 피곤함에 시달려야 했다. 꿈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낮에도 넋을 놓고 있으면 그가 어른거렸다. 그는 꼭 그녀의 그림자처럼 어디에 눈을 두어도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두려웠지만, 내심 그와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았고, 그의 곁에서 세상일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잠겨 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는 것도 너무나 좋았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만의 작은 비밀은 나날이 또렷한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그녀가 그제야 남문우에게 물었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남문우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곧 전쟁이 시작될 거야. 난 수장이고.”
백천범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전쟁?”
“동월이 남원의 가장 귀한 걸 빼앗으려 하거든. 내가 맞서 줘야지.”
백천범이 알기로, 남원에서 가장 귀한 것은 황금이었다. 귀한 자원이다 보니 이를 쟁탈하기 위해 두 나라가 교전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남문우가 불쑥 물었다.
“동월국을 알아?”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머리 장신구를 선물로 줬는데 동월에서 가져온 거라고 하셨어. 남원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하던데.”
남문우가 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그런 강대국과 싸우러 가는데, 하고 싶은 말 없어?”
백천범이 무심히 이야기했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랄게.”
“이겨서 돌아오라는 말은 안 해?”
“무사히 돌아오는 게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깐.”
그래, 어쨌든 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남문우가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다.
“준비할 일이 너무 많으니 그만 가 볼게.”
“응, 어서 가.”
그녀가 더는 할 말이 없어 보이자, 남문우는 옅은 미소를 지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
몸을 돌려세우자마자 그의 미소도 사그라들었다. 이마저도 하늘의 뜻이리라. 그녀가 남원의 승리를 기원하지 않은 것은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묵용감과 실력을 제대로 겨룰 날이 왔는데, 쉽게 패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남원과의 전쟁 소식은 금세 동월국 조정으로 퍼졌고, 조정은 순식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런 연유도 없이 어찌 전쟁을 일으킨단 말인가? 더구나 황제가 그곳에 있다니. 칼이 어디에서 날아들지도 모르는데, 혹여 옥체가 상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새 황제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조정은 큰 동요를 견디기 어려웠다.
이제 막 내전을 마쳤는데 또다시 인접국을 공격하는 건 병력과 재산을 낭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때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대신들은 남문 관청에 모여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그 속에서 수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따금 신하들이 그에게 간언을 내뱉었다.
“수 대인, 뭐라 말씀 좀 해 보십시오.”
“맞습니다, 수 대인. 황상께서는 서북 순시를 가신 것이 아닙니까? 갑자기 전쟁이라니요? 분명 무언가 내막이 있을 것입니다.”
“수 대인, 소관이 보기에는 서둘러 병력을 파견하고 황상을 조정에 모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수 대인…….”
머리가 복잡했던 수민은 백장간에게 예를 갖추며 화살을 돌렸다.
“장군, 들으셨지요. 다들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장군은 어찌 보십니까?”
백장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심상하게 대꾸했다.
“증원이 필요했다면 황상께서 분명 칙서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칙서가 없다면 증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병력을 이동하지 않는 전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한 신하가 타박하듯 입을 열었다.
“너무 먼 곳이라 황상의 안위도 알 수 없는데, 백 장군께선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백장간의 차디찬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다들 잊지 마십시오. 성상聖上께서는 과거 혁혁한 공을 세우신 군신이셨습니다. 게다가 서북의 병사들은 유달리 용맹하지요. 한데 다들 무엇이 그리 겁나십니까?”
그 한마디로 신하들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 자안궁에서 사람을 보낸 이가 도착했다. 후궁에도 소식이 전해져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 태후가 수민을 찾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