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영구는 황제의 결정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묵용감을 잘 아는 만큼, 이미 짐작한 일이었다. 황제가 남원을 벗어날 무렵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다른 이들은 묵용감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고 여겼다. 후궁까지 들였으니 옛일을 전부 포기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시간 황제의 곁을 지켰던 이들은 그가 왕비를 잊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황제는 왕비를 찾는 이들을 철수시키지 않았고, 장생전의 위패도 비워 두었다. 황릉 밖에 자리한 무덤도 옮기지 않았다.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황제였지만, 지금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어찌 빈손으로 돌아가겠는가?
사장풍은 전쟁과 관련된 일은 까마득히 모른 채 며칠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밖으로 나오고 싶어도 발가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이천행처럼 줄곧 걱정에 애를 태웠다. 사앵앵을 만날 때마다 늘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께선 돌아가셨습니까?”
사앵앵은 늘 아니라는 대답만 들려 주었다. 며칠간 날짜를 헤아리던 사장풍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임안성으로 돌아가 황제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데, 이 작은 역참에 남아 무얼 한단 말인가?
사앵앵이 찾아왔을 때, 그는 이천행이나 영구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나 그에게 찾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가 그를 찾았고, 문을 열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상처가 다 아물었으면 어서 일어나시오. 곧 전쟁을 해야 하니까.”
사장풍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저, 전쟁이라니, 누구와 전쟁을 한단 말입니까?”
영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힐끔거렸다. 꼭 바보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장풍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가 바깥을 가리켰다.
“그분께서 남원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하셨단 말입니까?”
“그럼 누구와 하겠소?”
사장풍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이불을 젖혔다.
“이렇게 혈기 왕성한 대장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좀 이상한 느낌이 든 그는 서둘러 이불을 가져와 흐흐 웃었다.
“그, 번거롭겠지만 앵앵이 좀 불러 주십시오.”
영구는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사앵앵이 안으로 들어왔다.
“날 찾았다면서요. 왜요?”
“앵앵, 내가 미안합니다.”
침대에 앉은 사장풍이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좋은 물건을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앵앵은 뜻밖의 말을 들어 생소한 기분이었지만,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돌아왔으니 되었어요.”
“당연히 돌아오죠. 여기가 내 집인데 안 돌아오면 어딜 가겠습니까?”
사앵앵이 얼굴을 붉히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금 수줍어하며 물었다.
“점심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아무거나요. 당신이 먹여 주는 대로 먹겠습니다.”
사앵앵은 고개를 숙이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앵앵,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요.”
“며칠 동안 계속 누워 있었더니 너무 찌뿌둥합니다. 좀 걷는 게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사앵앵은 그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옷을 가져다줄게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사장풍은 긴 숨을 내쉬었다. 사앵앵은 상대가 강하게 나가면 더 강하게 맞서는 성격이니, 그녀를 상대할 땐 지혜를 발휘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앵앵이 옷을 가지고 돌아와 그에게 입혀 주었다.
“괜찮아요? 힘들면 말해요. 이렇게 심한 상처는 하루 이틀 만에 낫지 않으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야 해요.”
“네, 서두를 게 뭐 있겠습니까.”
사장풍이 복도의 기둥을 붙잡고 나섰다.
“당신은 가서 볼일 보십시오. 혼자 걸어 보겠습니다.”
사앵앵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식당 일이 바쁜 건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 줄게요…….”
“괜찮습니다. 다들 바쁠 텐데 누구한테 시중을 맡기겠습니까? 어서 가십시오. 난 괜찮으니까.”
그는 손을 저으며 사앵앵을 보냈다.
사앵앵은 제법 안정적으로 걷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떠나자 사장풍은 곧장 길을 돌아 뒤뜰로 향했다. 건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간 그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영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접니다.”
영구가 문을 열어 주자, 사장풍은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묵용감에게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이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덤덤히 말했다.
“보아하니 많이 나아진 듯하구나.”
“거의 다 나았지만, 표현을 못 할 뿐이지요.”
영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요?”
사장풍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앵앵이가 워낙 독불장군이라서요.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제 눈에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난감하다는 말투였지만 영구는 사장풍이 약간의 자랑 섞인 말을 늘어놓았음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사앵앵이 그를 엄청나게 아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영구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조금 민망해진 사장풍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가 다시 두 손을 모아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나리, 이번 전쟁에서 선봉에 설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사장풍은 그가 이렇게 흔쾌히 허락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내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나리, 정말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황제의 허락은 그를 군으로 복귀시켜 예전처럼 전쟁에 참여하게 해 준다는 의미였다. 그는 어쨌든 군인 출신이었으니, 역참에 틀어박혀 하는 이 잡다한 일들과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일들은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혈기 왕성한 사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지금은 병력이 부족하다. 너와 영구, 이천행이 거의 다일 테니.”
사장풍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서북의 주둔군으로만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묵용감의 미소에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그리 작은 나라에 무엇 하러 전국의 병력을 쓴단 말이냐? 서북군으로도 충분하다.”
황제가 군을 운용하는 데 능하다는 건 사장풍도 익히 알고 있었다. 남원은 확실히 국력이 약했고, 서북에도 제법 많은 주둔군이 있으니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짐부터 싸거라. 이천행이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으니 내일쯤 출발할 수 있겠지. 선봉에 서고 싶다면 선발대와 함께 떠나거라.”
“예!”
밖에선 군신의 예를 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장풍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신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근심에 휩싸였다. 사앵앵에게 출전한다는 말을 어찌 전해야 한단 말인가?
‘에잇, 관두고 우선 짐부터 싸자. 떠나기 직전에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시간이 촉박해서 소란도 피우지 못하겠지. 그래, 그렇게 해야겠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보자기에 짐을 챙겼다. 날이 더우니 물건도 별로 챙길 게 없었다. 씻고 갈아입을 옷 몇 벌이면 될 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사앵앵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잔뜩 성이 나 삿대질을 해 댔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역참에 있던 모든 이들은 사장풍이 사앵앵에게 쫓겨 이리저리 도망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사장풍은 이따금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쫓아오지 마십시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다고요!”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도… 하!”
사앵앵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었다. 전쟁에 대한 얘기는 기밀이니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두 부부가 다투는 모습은 평소에도 늘 보던 것이지만 이렇게 요란하게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모두들 눈으로 두 사람을 좇으며 키득거렸다.
어느새 역참은 새해를 맞은 듯이 떠들썩해져, 객실 안에서도 밖의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영구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리 시끄러운 것이냐?”
영구는 상황을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앵앵이 사장풍을 혼내 주나 봅니다. 다들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직접 창밖을 확인했다. 역시나 사앵앵이 사장풍을 잡으러 뛰어다녔고, 구경꾼들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이내 아래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황제는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연스레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또한 백천범과 앙숙인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남들 눈에는 그가 체면을 구긴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곤혹스러운 표정도 다 꾸며 낸 것이었다.
무술까지 익힌 사내가 어찌 여인을 이기지 못하겠는가. 그저 약한 모습을 보여 상대의 분을 풀어 주었을 따름이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소란을 피운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장풍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아무래도 스스로 사앵앵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막 도착했을 때 사앵앵과 연극까지 보여 준 걸 보면 그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었다. 처음엔 그도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해 우스운 일을 수도 없이 겪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녀를 다른 이에게 보낼 뻔하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추억이 물러가니 헛헛한 감정이 밀려왔다.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한번 정에 휩싸이면 가축과 다를 게 무엇일까. 그가 가장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었다. 부인은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데, 그는 죽기 살기로 그녀를 데려오려 했다. 그는 응당 단념하고 그녀를 지워 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그는 가축으로 전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사앵앵은 분에 못 이겨 들고 있던 방망이를 힘껏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장풍을 맞추지 못하자 그녀는 발을 구르며 주저앉았고, 이내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구경꾼들은 웃음기를 거두고 사장풍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사 주인장, 어찌 헌신적인 아내를 울린단 말이오? 어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시오!”
“뭘 그리 도망가는 것이오. 무술에 능한 사내가 여인에게 몇 대 맞아 주는 게 뭐 어때서!”
“맞소, 사내가 응당 양보해야지, 어찌 여인을 울린단 말이오!”
“저리 착한 부인을 울리다니, 소중한 걸 알아야지.”
전국 각지의 말씨로 혼이 난 사장풍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사앵앵이 울음을 터트리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뒤, 사앵앵 곁으로 다가간 그는 엉엉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사앵앵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