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0화
사장풍은 몸을 뒤집으려고 애를 썼다.
“사, 상처는 뒤, 뒤에 있다고요.”
“알아요. 앞쪽도 자세히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상처가 났는데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더운 날씨에 다 썩어 문드러지고 말 거라고요.”
“…뭐가 썩어 문드러진단 말입니까?”
“당연히 상처죠.”
사앵앵이 그를 뒤집고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상처가 아님 뭐겠어요?”
사장풍은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맞아도 싸지, 자신의 방정맞은 입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한바탕 분주히 움직인 사앵앵은 더러워진 물을 버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젖은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고 상처에 지혈분을 바르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통증도 다소 가라앉았다. 사장풍은 긴긴 숨을 내쉬곤 침대 꼭대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은 참 좋은 일이었다.
사앵앵은 대야에 담긴 물을 쏟아 버리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돌아왔으니 되었다.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입맛을 잃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한참 동안 마당에 서 있던 그녀가 방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침대 옆에 가 보니 사장풍은 잠들어 있었다. 가늘게 코를 고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속에서 격렬한 무언가가 치솟았지만, 그녀는 애써 발걸음을 돌렸다.
* * *
황제와 영구도 부상을 입었지만, 사장풍만큼 심각하진 않았다. 대부분 도망칠 때 생긴 상처였다. 사장풍은 한 발 뒤처진 탓에 허리에 화살을 맞았다. 깊은 상처였지만 다행히 효능이 뛰어난 상처약을 챙겨온 영구가 곧장 상처를 처치해 주었다. 제때 약을 바르지 못했다면 지금쯤 목숨을 잃었으리라.
황제는 가슴에 칼을 찔렸지만 깊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더운 날씨에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 탓인지, 상처가 아물지 않아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몸의 통증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그의 가슴이 문드러지는 듯한 고통보단 못할 터였다.
분명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결국엔 남문우를 따라가다니,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를 마음속에서 지워 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무슨 수를 써도 그녀를 지워 낼 수 없었다. 그리움을 견디느라 식음도 잊고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세상은 절망뿐이었고, 그녀를 뒤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데, 그 모든 것들이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다. 그가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다른 사내와 평생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황제는 홀로 술을 들이켜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영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말리진 못했다.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이천행이 결국 다가왔다.
“나리,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계획은 내일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도 지금의 모습은 천위에 걸맞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지금의 그는 준엄한 황제가 아니라 부인을 잃은 사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와 사장풍 사이에 아무 일이 없을 때도 질투가 하늘을 찔렀는데, 이제는 진짜였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인정했고 곧 다른 사내와 혼사를 올린다고 하지 않는가.
대체 왜?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는 그녀를 잘 알았다. 부귀영화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발 물러나 차선책을 택하는 데도 능했다. 어디에서든 즐거움을 찾으며 열심히 사는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어쩌면 그녀에게 사랑보다 자유가 더 소중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얽매이는 걸 싫어했고 언제나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녀가 처음 그의 곁에서 도망쳤을 때처럼.
다만 이번 선택은 결이 달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지 않은가. 린아를 두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이마에는 시퍼런 핏대가 섰다.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이 산산이 조각나며 황제의 분노를 드러냈다. 영구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깨진 조각을 치웠다.
이천행이 다시 한번 그를 타일렀다.
“나리, 제가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부축을 받고 계단을 올랐다. 탁자를 정리하던 영구는 문득 기홍을 떠올렸다. 긴 시간 떨어져 있으니 그녀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영구에게서도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잠에서 깬 사장풍은 홀로 누워 있음을 깨닫고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사앵앵이 아닌데. 더구나 전력도 있는 여인이 아닌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뒤늦게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내밀어 옷을 찾는데 사앵앵의 옷만 잔뜩 있을 뿐, 그의 것은 한 벌도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사앵앵의 방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사앵앵은 어느 방에서 잤단 말인가?
그때, 문이 열리더니 사앵앵이 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깼어요? 세수부터 해요.”
사장풍은 조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괜히 번거롭게 했습니다. 내려놓으면 내가 할게요.”
“번거롭긴요. 우린 부부잖아요.”
사앵앵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늙어서 당신이 몸져누우면 내가 똥오줌도 다 받아 내고 시중을 들어야 하잖아요? 미리 연습하는 셈 칠게요.”
“…내가 왜 몸져눕는단 말입니까?”
사앵앵이 방긋 웃어 보였다.
“자꾸 그렇게 말대꾸하면 진짜 그렇게 만드는 수가 있어요.”
“…….”
늙어서 몸져눕지 않기 위해 사장풍은 얌전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고분고분하게 있던 그는 그녀가 자리를 뜨자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겨우 이십 대인데 어찌 그리 멀리까지 내다본단 말인가? 정말 그때에도… 그의 곁에 사앵앵이 있을까?
그는 남제화처럼 검을 들고 천하를 누리는 협객이 되고 싶었다. 온 세상을 집으로 삼아 더는 속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남제화는 진짜 협객이 아닌 듯하니 굳이 그런 자를 따라 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뒤, 사앵앵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더니 작은 밥상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밥상에는 반찬 몇 가지와 죽 한 그릇, 커다란 찐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터라 사장풍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얇은 이불이 몸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가 서둘러 이불을 붙잡고 웅얼거렸다.
“그만 볼일 보십시오. 다 먹으면 부를 테니.”
사앵앵은 늘 그렇듯 예를 차리지 않고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말 유난이네. 나라고 당신 몸이 보고 싶은 줄 알아요? 볼 것도 없으면서. 바깥에 당신보다 나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어요. 영구며 이 장군님이며 장군님이 데리고 다니는 수하들까지, 그 팔뚝이랑 가슴 좀 보세요. 죄다 당신보다 잘났거든요? 내가 정말 보고 싶으면 그 사람들을 보고 말지!”
사장풍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다, 다 큰 여인이 어찌 그런 말을!”
“난 성별을 잘못 골라 태어난 것뿐이에요. 우리 아버지도 저더러 몸은 여인인데 마음은 사내라고 했거든요. 나랑 부부가 되는 게 싫거든 형제도 좋아요!”
사장풍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대체 그는 어떤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단 말인가!
* * *
이튿날, 황제는 조금 늦게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대로 숙면을 취한 듯했다.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안색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젯밤처럼 처량하거나 수심에 잠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천행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큰일을 하는 사람은 달랐다. 어떤 일이든 감당하고 내려놓을 수 있다니, 역시 황제의 자리에는 누구나 오르는 게 아니었다.
그와는 별개로 황제가 그의 구역에 있는 이상, 그는 늘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황제의 이번 행차는 서북 지역의 순찰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황제는 도성 호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 그렇게 조정 대신들의 눈을 속인 뒤 한통이 중간에 호위병들을 데려갔고, 황제와 영구만 서쪽으로 온 것이다.
이천행은 가슴에 바위가 세 개쯤은 놓여 있는 듯했다. 황제가 임안성에서 무사히 서북에 도착했을 때 하나의 바위를 덜어 낼 수 있었다. 황제가 영구와 사장풍을 데리고 남원에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바위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 황제가 임안성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남은 바위도 말끔히 치울 수 있을 터였다.
이천행은 오늘 황제와 이야기를 나눠 본 뒤 돌아갈 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차질 없이 준비해 두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침을 먹은 황제는 사장풍의 상태를 살피고 바깥으로 나가 복도를 거닐었다. 이천행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왔다.
“나리,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별거 아니다. 괜찮다.”
“역참에 직접 와보시니 어떠십니까?”
“사 주인장이 잘 꾸며 놨더구나.”
“예,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바깥은 고된 법이지요. 내리쬐는 이 볕 좀 보십시오, 지금은 더워도 구월만 지나면 어찌나 추워지는지요. 바람이 불면 꼭 칼로 얼굴을 베는 듯합니다.”
마침내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하하, 소인은 그저 나리께서 언제쯤 돌아갈 계획이신지 여쭙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리를 모시고 돌아갈 인원을 준비해 두어야 하니까요.”
황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돌아갈 계획이 없다.”
이천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가슴에 바위가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면… 언제쯤 돌아가실 계획이십니까, 나리?”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이요?”
이천행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 나리, 대체 누구와 전쟁을 하시단 말씀이십니까?”
“남원과.”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그는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 있고,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이대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는 그녀 때문에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는데, 그녀는 어찌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졌을까? 그는 밤낮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는데, 그녀는 윤택한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을까. 그는 늘 백천범 모자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며 피를 흘렸는데, 그녀는 그를 잊은 것처럼 편하게 살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혼사를 치른 그의 부인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빼앗았다면 그가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그녀의 마음이 어딜 향해 있든, 그녀만큼은 다시 그의 곁에 돌아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