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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9)화 (528/1,192)

제529화

어렴풋이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원상은 곧장 내전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눈썰미가 어찌나 좋은지, 그는 먼 거리에서도 그녀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왔다.

“아이고, 소인 양비 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오늘은 별 일 없으셨습니까?”

수원상은 결국 억지로 나와 그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총관리가 신경 써 준 덕에 본궁도 잘 지냈네.”

“태자 전하께서 장난을 치진 않으시고요?”

“전하께서는 늘 말을 잘 들으신다네.”

“전하께서 오늘은 무엇을 드셨습니까? 맛있게 드셨습니까?”

“뱅어 볶음과 메추리알 찜, 춘권, 타락죽과 완자를 드셨네. 전부 기홍 고고가 가져다준 것인데 아주 맛있게 드셨지.”

“어젯밤엔 편히 주무셨습니까? 몇 번이나 뒤척이셨는지요? 물을 찾진 않으셨습니까?”

“아주 잘 주무셨다네. 한 번도 뒤척이지 않으셨고 물도 찾지 않으셨네.”

수원상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었다. 학평관이 매일 같은 질문을 던지니 그녀도 이골이 나 있었다.

“다행이군요. 소인은 전하가 너무 가엽습니다. 모후도 안 계시는데 부황마저 곁에 없으시니 마마께서 정말 노고가 많으십니다. 소인도 어린아이를 돌보는 게 무척 힘들다는 것 잘 압니다. 눈 밑이 거뭇해지신 걸 보니 혹 밤잠을 설치는 것은 아니신지요.

부디 전하 때문에 몸을 너무 혹사하진 마십시오. 황상께서 돌아오시면 소인이 그간 마마께서 고생하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마께서 후궁의 본보기가 되시고자…….”

한참이나 이어지는 허풍에 수원상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눈치 빠른 학평관은 그녀의 심기를 파악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경수궁에서 나온 그는 자안궁의 서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러 향했다. 서 태후는 여느 때처럼 황제의 소식을 물었다. 학평관은 그녀의 질문에 빠짐없이 답한 후,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현비를 만나기 위해 조금 더 뒤쪽으로 향했다. 현비는 사비 중 으뜸인 데다 한동안 황제가 눈여겨보던 후비였으니,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현비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총애를 받든 잃든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어쨌든 많은 것들을 얻었고 황제도 그녀를 어찌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후궁의 몇몇 사람들이 그녀가 총애를 잃었다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녀는 두 귀를 닫고 자신의 처소에서 즐겁게 지냈다.

학평관은 그녀의 음식이나 의복 등에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심지어 규율에 맞게 전부 좋은 것들만 있는 걸 보니 수원상이 그녀를 괴롭히진 않는 듯했다. 현비도 엄지를 치켜세우며 수원상을 칭찬했다. 후궁을 잘 돌보는 것은 물론 그녀에게도 매번 사람을 보내 세심히 챙겨 준다는 것이었다.

후궁을 한 바퀴 둘러본 학평관은 퍽 만족스러웠다. 별다른 소란 없이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황제가 돌아온다 해도 마음 편히 상황을 보고할 수 있을 터였다.

막 전정으로 돌아가려는데, 길가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태감이 눈에 들어왔다. 상의를 벗어 던진 그는 이등 내감이 입는 하의를 입고 있었다. 햇빛이 이렇게나 강하게 내리쬐는데 어지럽지도 않단 말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생판 모르는 얼굴이긴 해도 잘생긴 얼굴에 다부진 몸집, 탄탄한 근육까지, 태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학평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지위가 낮은 후궁의 처소라 궁인들도 몇 없는 곳이었다. 다가가 알아본 상황은 이러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태감은 이 귀인貴人의 처소 사람으로, 잘못을 저질러서 벌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라 했다.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학평관은 이 귀인을 찾아 몇 마디 거들어 주기로 했다. 지위가 낮은 궁비들은 황제의 총관리인 그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던 터였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을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귀인은 그의 말에 공손히 대꾸할 뿐만 아니라 듣기 좋은 말을 한가득 쏟아 냈다.

학평관은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향했다. 마침 무릎을 꿇고 있던 태감이 다른 소태감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고 있었다. 순간 마음이 동요된 학평관이 배웅하러 나온 이 귀인에게 말했다.

“혹 저 애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손발이 빠른 자로 다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저 애는 제가 데려가 잘 가르쳐 보겠습니다.”

이 귀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해 준다면야 더 바랄 게 없을 것일세. 상귀常貴는 시중을 들 만한 재목이 아닌 듯하네. 저리 멍청해서야, 원.”

* * *

사장풍이 떠난 뒤, 사앵앵은 매일 손을 꼽아가며 날짜를 헤아렸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의욕을 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점원이 그녀를 놀렸다.

“사장님, 주인어른이 보고 싶어서 입맛까지 잃으신 것이지요?”

단골손님마저 그녀에게 농을 던졌다.

“이봐, 사 주인장, 그자 대신 내가 대신 놀아 주지!”

사앵앵이 곧바로 쏘아붙였다.

“그쪽이 그이랑 비교나 되는 줄 아세요? 그이가 산 위의 매라면 그쪽은 땅 위의 메뚜기예요.”

그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난 그자한테 잡아 먹힐 신세라는 말이구먼? 이걸 어쩌나, 난 그자 말고 주인장한테 잡아먹히고 싶은데!”

여기저기서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사앵앵이 경멸을 감추지 않으며 그자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은 제 지아비라고요, 어디 방귀만도 못 한 게!”

그러나 그 손님의 얼굴은 여간 두꺼운 게 아니었다.

“거참. 알겠네, 알겠어. 난 사 주인장이 뀐 방귀일세. 되었나?”

울적했던 사앵앵마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북을 오가는 사내들은 말을 험하게 하긴 했지만 본성이 그리 나쁘지 않았고 농담을 할 때도 선을 지켰다.

날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역참 주변의 나무는 사장풍이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 심어 둔 것인데 제법 잘 자라고 있었다. 다만 키가 작고 가지도 얇았다. 그리 많지 않은 잎은 작열하는 태양 빛을 받아 축 늘어져 있었다. 꼭 역참 주변에 가는 깃대를 여러 개 꽂아 둔 듯한 모양새였다.

사앵앵은 점원들을 불러 지붕에 모초茅草(지붕을 이는 재료로 쓰는 풀)를 깔았다. 물독의 물은 매일 사용하다 보니 금방 줄어들었다. 남제화가 떠난 뒤, 사장풍이 물을 길어 왔는데 이제는 사장풍도 없으니 점원들이 할 수밖에 없었다. 가여운 사내들은 더운 날씨에 물독을 옮기고 진이 쭉 빠지고 말았다. 더위 먹은 개처럼 뒤뜰에 축 늘어진 그들도 사장풍이 유난히 그리운 날씨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두운 밤, 누군가 사앵앵 방의 문을 퍽퍽 두드리더니 소리를 질렀다.

“큰일 났어요, 사장님! 어서 나와 보세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사앵앵이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산적이라도 왔어?”

“아뇨, 주인어른이 오셨어요.”

옷을 챙겨 입은 사앵앵은 문을 휙 열며 점원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이가 오면 온 거지, 왜 그리 야단법석을 떨어!”

그녀는 하고 싶은 욕이 많았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우선은 사장풍부터 보는 게 중요했다.

재빨리 응접실로 내려간 그녀는 점원이 왜 그리 소란을 피웠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장풍은 꼭 죽은 사람처럼 꼿꼿이 누워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춘 그녀는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게 어찌……?”

영구가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죽진 않았습니다.”

그 말에 사앵앵은 사장풍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매서운 주먹이 퍽 소리를 내며 꽂히고, 그녀의 앙칼진 외침이 이어졌다.

“날 놀라게 하려고 죽은 척하는 거죠?”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천행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흠흠, 목숨이 붙어 있긴 해도 상처가 워낙 심해 장담할 수 없네.”

사앵앵의 안색은 곧장 사색이 되었다. 조심스레 사장풍의 코에 얼굴을 가져가 보니 희미하지만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는 게 아닌가. 마음마저도 그의 손아귀에 잡힌 듯 욱신거렸다.

사장풍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죽지 않을 겁니다. 쿨럭, 당신 주먹이 너무 세서, 쿨럭쿨럭, 상처가 터진 것 같습니다…….”

사앵앵은 뿌옇게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여 사장풍이 볼까 봐 빠르게 옷소매로 눈을 문지른 그녀는 재빨리 상처를 확인했다.

“어딜 다친 거예요? 제가 볼게요. 붕대도 다시 동여매야겠어요. 가서 지혈분을 찾아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영구가 그녀에게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이 안에 다 있으니 찾아서 해 주십시오. 제 손길은 원치 않더군요.”

사앵앵이 곧장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네, 제가 할게요. 이이가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걸 워낙 싫어해서요. 너무 개의치 마세요.”

영구는 웃음을 꾹 참으며 사장풍을 흘깃 바라보았다. 사장풍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얼굴을 붉혔지만, 딱히 반박하진 않았다.

사앵앵은 점원들을 불러 사장풍을 방으로 옮기라고 분부한 뒤, 문을 닫고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미 사앵앵에게 나체를 보여 준 적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사장풍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쿨럭, 그냥 동여매면 되지 무엇 하러 옷을 벗깁니까.”

사앵앵은 농담 같은 진심을 섞어 말했다.

“당연히 벗겨서 확인해 봐야죠.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안 보겠어요.”

“…….”

심각한 상처를 입은 터라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가눌 수만 있었다면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터였다. 절대로.

사앵앵은 이미 그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빠르게 옷을 벗겨 냈다. 상의를 벗긴 뒤, 하의도 거침없이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사장풍이 덥석 허리춤을 잡았다.

“바지는 안 벗어도 됩니다. 다친 곳은 허리라고요.”

“허리니까 벗어야 해요.”

사앵앵은 다짜고짜 이불 속으로 손을 넣고 바지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사장풍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 속에서 벗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서로 민망한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개를 돌려보니 사앵앵이 물이 든 구리 대야를 탁자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내 수건을 적셔 물기를 꼭 짠 뒤, 그의 얼굴을 세심히 닦아 주었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한란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끝까지 차오른 말은 좀처럼 나올 줄을 몰랐다.

사앵앵은 그의 얼굴과 목, 팔까지 닦아 준 뒤, 이불을 조금 더 내려 그의 상체를 닦아 주었다. 많은 상처를 발견한 그녀는 약을 발라 주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상처가 이렇게 많은데 왜 말 안 했어요? 제때 처치하지 않으면 더 심해진다고요.”

사장풍은 도마 위에 놓인 고기처럼 사앵앵의 손길이 닿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사앵앵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생긴 상처를 놓치지 않고 꼼꼼히 처치해 주었다. 한 번 겪어 본 일이기에, 그는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때 아래쪽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란 사장풍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사앵앵이 그를 힘껏 눌렀다.

“움직이지 말아요.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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