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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8)화 (527/1,192)

제528화

남문우는 백천범을 황궁으로 데려다주었다. 궁에 들어가자마자 당장 대전으로 들라는 남류청의 명이 떨어졌다. 분명 여제는 그를 호되게 혼내려 이를 갈고 있을 터였다. 남문우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일찍 쉬어. 내일 다시 올게.”

백천범은 정신이 나가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여주의 시중을 받아 목욕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바다를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기억 위로 둥둥 떠다녔다. 그녀가 떠날 때, 그 사내는 왜 혼이 나간 것만 같은 표정이었을까? 슬픔과 절망으로 메워진 그 눈망울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향기를 떠올렸다. 따뜻한 숨결, 강한 힘이 느껴지던 커다란 손, 잔잔하고 드넓은 바다처럼 그윽한 눈동자까지…….

어렴풋이 그녀 위에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발가벗은 몸으로 땀을 흘리며 고통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싼 채 그와 더 가까이 붙으려 애썼다…….

백천범은 기이한 장면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얼핏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런 음흉한 꿈까지 꾸다니, 설마 그 잠깐 사이에 그 사내에게 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사내와 남문우를 비교해 보았다. 남문우는 예쁜 얼굴을 가졌지만 어딘가 음험한 면이 있었다. 반면 그 사내는 남성적인 면이 강했고, 눈매에 늠름한 기상이 느껴졌다.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히 놓이는 사내였다. 그가 곁에 있는다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가 어떻게든 하늘을 떠받치고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오늘 처음 본 이에게 느끼고 있었다. 영문 모를 신뢰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감정은 남문우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점박이를 불렀다. 점박이는 곧장 장막을 가로질러 가볍게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커다랗고 따뜻한 짐승이 그녀의 옆에 몸을 웅크렸다.

백천범은 점박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점박이 너, 오늘 실수할 뻔했어. 사람을 그렇게 물면 어떡해. 다음번에도 그렇게 했다간 깜깜한 방에 가둘 거야.”

점박이는 말귀를 알아듣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백천범은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백천범이 점박이와 장난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자 밖에 서 있던 여주 역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마침 고개를 돌리는데, 창밖으로 대제사의 모습이 보였다. 여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차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니 대제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여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여겼다.

* * *

역시 남문우의 예상대로였다. 그가 대전에 들어오자마자 남류청의 매서운 고함이 떨어졌다.

“대체 왜 그자를 놓아주었느냐?”

남문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계획대로 했을 뿐입니다. 잘못되었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힌 남류청이 잠시 뒤에야 말을 이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잡아 두면 우리에게 유리했겠지.”

“무엇이 유리하단 말씀이십니까? 놓아주어도 그자는 곧 병력을 데려와 공격을 해 올 겁니다. 하지만 잡아두었다간 동월국이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 공세를 퍼붓겠지요.

물론 지도자가 없으니 무질서한 상태가 되겠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는 수년간 동월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최측근들이 군을 평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대군이 쳐들어오면 그대로 우리를 억압하고 계획까지 망칠 겁니다. 그리한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게 아닙니까?”

남류청이 의심이 담긴 눈초리로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옛정 때문에 그자를 놓아준 것은 아니고?”

남문우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선 신을 그렇게 보셨군요. 신이 남원에서 지낸 몇 해간 폐하께 충심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폐하를 위해서라면 신은 양부에게마저 손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이것으로도 신의 입장이 불분명하단 말씀이십니까?”

당당히 따져 묻던 그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신은 그 해 묵용연 때문에 궁지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죽어서도 그 원한은 잊지 못합니다. 묵용연이 묵용감의 손에 죽었다 한들, 신은 이미 원수의 가문과 공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묵용씨의 천하를 빼앗는 것은 폐하의 바람이자 신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 일에 있어서 신은 영원히 폐하 편에 설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신을 의심하셔도 좋지만, 이 충심만큼은 믿어 주십시오.”

남문우의 말에 남류청의 의심은 전부 사라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데 남문우가 돌연 그녀를 원망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폐하, 그간 신을 감시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신이 시장 동쪽에 병력을 매복해 두었는데 범음梵音군까지 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도 함께 죽길 바라셨던 것입니까?”

남문우는 점점 분노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묵용감이 범음진을 뚫지 못했다면 신도 지금쯤 숨이 넘어갔을 것입니다.”

남류청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알지 않나? 범음진은 보기엔 무시무시해도 목숨까지 앗아 가진 않는다는 것 말일세. 짐이 그들을 보낸 것은 그저 동월의 황제를 생포하기 위해서였네.”

그러나 남문우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내력内力에 위해를 가하기 마련입니다. 폐하께서는 우리 무술인의 노고를 너무 모르십니다. 십 년 넘게 쌓은 내공이라 해도 그런 공격을 받으면 쉽게 무너지는 법이지요.”

“짐도 다 알고말고. 오늘 고생 많았네. 녹용과 삼을 보낼 테니 기력을 잘 보충해 두게. 당분간 조정에 나오지 않아도 되니 저택에서 몸을 추스르는 데 전념하게. 묵용감은 돌아가자마자 곧장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겠지. 그땐 짐이 또 장군을 의지해야 하지 않는가.”

영리한 남문우는 한발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폐하의 걱정을 나누는 것이 신의 본분이니 응당 그리해야지요. 밤이 늦었으니 신은 그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 * *

수원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가 아니라 조상을 떠받들어도 이보다 곤란하진 않을 터였다. 묵용린이 말을 듣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끊임없이 찾아와 그녀의 궁에서 유난을 떨었다.

그나마 기홍이 대하기 편한 이였다. 묵용린의 음식을 담당하는 그녀는 올 때마다 예의를 잊지 않았다. 또한 그리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묵용린이 식사를 마치면 곧장 식기를 정리해 자리를 떴다.

녹하도 경수궁을 자주 찾았다. 녹하는 묵용린이 입을 옷을 관리하는 데다, 아이들은 워낙 금방 자라기 때문에 옷을 자주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녹하는 새로 만든 옷을 가져다주거나 묵용린의 치수를 잴 때마다 경수궁을 찾아왔다. 어쨌든 그녀가 묵용린을 보러 올 이유는 차고 넘쳤다.

녹하 역시 오랜 시간 묵용감의 시중을 들었기에 제법 관료다운 모습을 갖추고 예를 잊지 않았다. 다만 기홍의 공손함보다 훨씬 못 미칠 뿐이었다.

녹하가 올 때면 가동도 함께 따라왔다. 가동은 유난히 묵용린을 귀여워했다. 입으로는 전하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하긴 해도, 행동만큼은 거리낌이 없었다. 묵용린을 높게 들어 올리며 목마를 태워 주는데, 이런 놀이를 싫어하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덕분에 묵용린도 가동을 보면 절로 미소를 지었다.

혹여 묵용린이 무서워할까 봐 가동이 걸음을 멈추면, 묵용린이 옷깃을 잡아당기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가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에 곧장 다시 놀아 주며 웃음꽃을 피웠다.

가장 자주 찾아오고 가장 오래 머물다 가는 사람은 월규였다. 그녀는 올 때마다 태자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태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끝없는 관심과 자애가 담겨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가 아이의 어머니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월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찾았다. 특히 태자가 목욕을 할 땐 반드시 왔다. 다른 이들은 태자의 성격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늘 자신이 목욕을 시키곤 했다. 물론 수원상은 그녀의 의도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목욕을 핑계로 누군가 묵용린을 학대하진 않는지 몸을 확인해 보려는 게 아니겠는가.

이들로 그치는 게 아니라 서 태후도 매일 그녀를 찾아왔다. 자안궁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매일 귀여운 손자를 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묵용린은 좀처럼 서 태후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서 태후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묵용린의 환심을 얻어 내고 말았다.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를 데려와 묵용린에게 보여 준 것이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싫어하는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묵용린도 고양이와 놀며 즐거워했다. 서 태후는 기뻐하는 태자의 모습에 만족스러워하며 경수궁에 고양이를 두고 가겠다고 했다. 다만 수원상은 내키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만 푹 빠지면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 태후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하기 어려웠던 터라, 고민 끝에 그녀는 아이가 고양이와 놀다 상처가 생길까 봐 걱정이라고 답했다.

그 말에 서 태후는 곧장 생각을 바꿨다. 자신은 묵용린이 던진 병에 이마가 찢어져도 상관없었지만, 귀여운 손자는 머리카락 한 올 빠지는 것도 안쓰러웠다. 그녀는 실제로 묵용린의 머리를 빗겨 주는 궁녀에게 머리를 빗을 때 나온 머리카락을 모조리 가져오라고 분부하기까지 했다.

서 태후에게 전해진 머리카락은 향낭에 고이 담겨 불상 앞에 놓였다. 서 태후는 매일 그 앞에서 불공을 드리며 태자의 평안을 빌었다.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는 다 참을 수 있었다. 정작 수원상의 짜증을 부르는 이는 학평관이었다. 학평관은 태자를 보러 오는 것인지 그녀를 건드리러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태감다운 화려한 말솜씨로 말끝마다 그녀를 칭찬하고 떠받들어 주었다.

피곤하시진 않느냐, 고생이 많으시다, 아이라 장난기가 심하니 부디 잘 보살펴 달라 등등……. 그녀는 태자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기며 기르고 있는데, 학평관은 오히려 그녀를 외부인으로 여기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만 쏙쏙 골라서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분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부 한패였다. 그녀가 누굴 나무란다면 분명 황제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어렵사리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는데,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망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던 그녀는 그저 꾹 참고 또 참았다. 도도했던 성질은 이미 사그라들었으니, 이젠 그저 태자를 잘 기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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