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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7)화 (526/1,192)

제527화

사장풍을 무너뜨린 진법은 범음진梵音陳이라고 불렸다.

남문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잇달아 허리춤에 달린 나선형의 무언가를 잡아당기더니 힘껏 불기 시작했다. 곧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처음엔 낮고 굵은 소리였다가 점점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날카로운 소리는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했고, 꼭 매서운 파도가 치는 바다에 맨몸으로 던져진 듯했다. 물속을 허우적대듯 몸이 위아래로 요동쳤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묵용감은 남원의 신비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법 자체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 순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백천범의 안전이었다. 그녀가 별 탈 없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자신이 문제였다. 몸 안의 피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 소리는 아마도 내공 심법과 관련되었는지, 무공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때문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그와는 달리, 백천범은 안전했던 것이다.

영구와 사장풍을 바라보니 역시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도 기괴한 소리에 저항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묵용감은 서둘러 주변을 훑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몸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새 따뜻한 피가 코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피는 뱀처럼 길게 이어지며 끊임없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검을 땅에 꽂고 몸을 겨우 지탱했다. 남문우 쪽을 바라보니 그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 몸을 보호할 방도가 있는 줄 알았더니, 정신 나간 놈이 따로 없었다. 자신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 게 아닌가?

그때, 희미한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간들간들한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백천범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라간 그녀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열심히 목청을 드높였다. 그러나 기괴한 소리는 거대한 풍랑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덮쳐누르고 있었다.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가슴이 시려 왔다. 그러나 백천범의 행동은 묵용감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근처에 있던 탁자를 집어 들고는 있는 힘껏 땅에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누군가가 놀란 듯 음이 조금 낮아졌다.

영구와 사장풍은 서둘러 그를 따라 했다. 비틀거리며 주변에 있는 의자와 탁자를 들어 사정없이 내동댕이 쳤다. 노래만으로 부족했음을 깨달은 백천범도 서둘러 의자를 집어 던졌다.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잡음이 끼어들자, 마침내 기괴한 소리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그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고 근처에 있는 병사들부터 무자비하게 참살했다. 남문우가 검을 들고 그를 공격하러 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번개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백천범은 엄청난 양의 선혈이 흩뿌려지는 걸 보며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저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그녀를 아프게 찔렀고, 그 아픔은 곧 슬픔이 되어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문우의 검 끝이 사내의 가슴을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멈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른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남문우와 묵용감은 재빨리 그녀의 안색을 훑었다. 남문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미소를 지었고, 묵용감은 어두운 얼굴에 빛을 밝히듯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천범은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묵용감은 한 차례 찔리긴 했지만, 계속해서 병사들을 무참히 공격했다. 남문우가 등 뒤까지 다가왔을 땐 그도 이미 방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상은 깊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적을 유인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남문우가 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을 때, 그의 검 끝도 남문우의 가슴에 명중했다. 두 고수는 어떻게 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지 잘 알기에 몸을 재빨리 뒤틀었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다시 격전을 이어갔다.

남문우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 애가 또 날 걱정하네.”

묵용감의 목소리는 사막과도 같이 건조했다.

“아니, 날 걱정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땅에 착지했다. 한 사람은 가슴을 움켜쥐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검을 들고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남문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여인을 빼앗아 가려 하다니, 정말 뻔뻔하군.”

묵용감이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받아쳤다.

“누가 뻔뻔한 것인지, 본인이 잘 알고 있겠지.”

영구와 사장풍은 남은 병사들을 처리하며 천천히 묵용감 쪽으로 합류했다.

묵용감이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사장풍은 천범을 데리고 떠나고 영구는 나와 그 뒤를 엄호한다.”

사장풍은 영구를 바라보았지만, 영구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날려 백천범을 붙잡았다.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묵용감이 성을 내며 호통쳤다.

“아니 된다!”

영구에게 안 될 건 없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겐 묵용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 일을 마칠 수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는 아까처럼 백천범을 묵용감에게 날렸고, 묵용감은 어쩔 도리 없이 그녀를 받아야 했다.

결국 백천범을 받아 낸 묵용감은 격투를 멈추고 격전지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등 뒤에서는 급박한 발소리와 참혹한 전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잔뜩 성이 난 남문우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당장 뒤쫓고 성문을 잠가라!”

한 호위병이 대답했다.

“장군, 성문은 이미 잠가 두었습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안고 남쪽으로 질주했다. 추격병을 따돌리려 내공을 발휘해 경공輕功(먼 거리를 바람처럼 빨리 달리는 무예)을 선보였다. 너무 많은 힘을 쓴 탓에 상처에선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피는 어느덧 백천범의 옷소매를 적시고 끈적하게 묻어났다. 놀란 백천범이 소매를 털며 소리쳤다.

“어서 멈춰요.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요.”

묵용감은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랐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죽진 않소.”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과다 출혈로 죽고 싶은 거예요? 어서 멈춰요. 상처를 묶어야지요!”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매섭게 혼냈다.

더 이상 추격하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묵용감은 한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제서야 그녀를 땅에 내려 주고, 잠시 숨을 돌렸다. 경공으로 내공을 많이 소진했으니 그도 쉴 틈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백천범은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더니 상처가 난 그의 가슴을 힘껏 싸맸다. 묵용감은 그녀를 내버려 두며 묵묵히 따랐다. 빠르게 들썩이는 가슴만이 그가 느끼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그가 의아했는지, 백천범이 상태를 살폈다.

“너무 꽉 조여서 숨쉬기 힘든가요? 조금만 참아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피가 멈추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를 대했다. 가책을 느끼거나 미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어제도 그를 만난 것과 같은 익숙한 태도에, 묵용감은 하마터면 그녀를 그대로 품에 안을 뻔했다.

그때, 갑작스레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뛰어들더니 낮게 울부짖었다. 묵용감은 미처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덮친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 맹수임을 깨달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꺼내 힘껏 휘둘렀지만, 백천범이 그를 발로 걷어찼다.

“점박아, 어서 피해!”

그러나 표범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묵용감을 물려 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걷어차이긴 했지만 단도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팔을 들어 맹수를 찌르려는데 백천범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거의 흐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양심 없는 인간 같으니,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내 표범을 죽이려는 거예요!”

그녀가 기르는 표범이라니! 묵용감은 그간 그녀가 길렀던 작은 동물들을 떠올렸다. 닭이며 토끼 등등. 한데 이제는 맹수를 기를 줄이야. 일 년 동안, 그녀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표범이 달려들어 그를 물고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는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눈앞이 아찔할 만큼 강한 충격에 귓가에서는 끊임없이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 벌떼가 있는 것만 같았다. 혹은 격투가 이어지고 있거나.

묵용감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몸을 가누었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엄청난 수의 병력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남문우는 백천범의 팔을 붙잡더니 곧장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표범은 곧장 그의 발아래로 달려왔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묵용감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했다.

“넌 도망 못 쳐.”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궁수 대열이 담장으로 올라오더니 그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남문우가 명령만 내리면 온몸에 구멍을 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문우는 백천범을 골목 밖으로 끌고 갔다. 백천범은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부르며 쫓아왔다.

“천범, 돌아오시오!”

그러나 길 한가운데를 막아선 표범이 끊임없이 포효하며 앞길을 막아섰다. 이미 백천범을 골목 끝까지 데려간 남문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점박아, 돌아와!”

표범이 잽싸게 몸을 돌려 달려가자, 담 위의 궁수들이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당장이라도 온몸이 꿰뚫릴 위기였건만, 묵용감은 백천범의 뒷모습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그림자가 궁수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더니 묵용감의 양옆을 지켜 섰다. 누군가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활을 쏘거라, 도망치게 두어선 안 된다.”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져 내렸다. 영구와 사장풍은 서둘러 검을 휘두르며 묵용감을 보호했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화살이 검에 맞아 튕겨 나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검을 휘두르며 묵용감을 데리고 반대쪽 담벼락으로 넘어갔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병사들은 서둘러 그들을 뒤쫓았다. 여제가 필요로 하는 자들을 놓쳤다간 모든 이들이 책임을 져야 했다. 분주한 그들의 발목을 남문우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쫓을 필요 없다!”

남 장군의 명이 떨어졌으니 이 일은 남 장군의 책임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병사들은 모두 부대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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