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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6)화 (525/1,192)

제526화

남문우는 개보다 더 민감한 후각을 가졌기에 묵용감을 쫓는 일쯤은 손쉬웠다. 그 덕분에 마음 편히 영구와 시답잖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후각의 영향도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백천범의 몸에 심어 둔 향고香蠱였다. 그는 그녀가 근처에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언제 그녀에게 향고를 심었는지 아는 사람은 남문우 본인뿐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연회, 그때 어렴풋한 확신을 가졌다. 이 여인은 결국 그를 따르게 될 거라는 확신.

묵용감은 백천범의 얼굴에 면사를 덮어 주고 그녀를 품 안에 안은 채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 어귀를 지나니 큰 거리가 펼쳐졌다. 이대로 왼쪽으로 향한다면 시장이 나올 터였다. 저 끝에서 북적대는 인파가 보였다. 그 틈에서 사장풍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는 망설임 없이 시장으로 들어섰다. 역시 많은 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하지만 야식을 먹는 백성들이 아닌,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장풍은 말뚝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묵용감은 그제야 남문우를 잘못 보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위지문우가 아니었다. 여전히 조금 까불거리긴 해도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묵용감 일행의 도주로를 예상하고 그들을 이 거리로 몰아넣은 셈이었다.

남문우가 묵용감을 얕잡아 본 게 아니라 묵용감이 남문우를 너무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이리 될 줄 알았다고 해도, 묵용감에게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천범을 데려가야 했으니.

뒤에선 병사들이 그를 추격해 오고 있었고 앞은 포위되었다. 영구와 사장풍은 생사도 알 수 없으니, 지금은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는 그제야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시장까지 달려오는 내내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그를 따랐던 그녀는, 땅에 발을 디딘 후에야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대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대…….”

묵용감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품 안에는 아직도 그녀의 온기와 향기가 생생했지만, 혀끝은 수많은 말을 물고 어물거리기만 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일 년 넘게 떨어져 있었던 탓인지, 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시선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허공을 맴돌기만 했다.

백천범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그의 품에 더 안겨 있고 싶었다. 꼭 오랫동안 떠돌았던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온 듯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소란을 피우는 대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른 이들이 몸을 만지는 걸 싫어하는 그녀로서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남문우가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 남문우가 종종 손이나 어깨를 잡을 때면 반사적으로 밀어내는 그녀였다. 한 번은 남문우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는 척 입술을 들이밀기에 호되게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다른 이의 손길을 싫어하는 그녀가, 어째서 이 남자는 밀어내지 않았단 말인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그녀의 직감이 온 힘을 다해 이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사내가 자신을 데려가는 데엔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피를 흘리며 말뚝에 묶여 있는 사람을 발견하니 더욱더 확신이 섰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면사를 벗고 호통을 쳤다.

“저자를 풀어 주거라. 저들을 돌려보낼 것이다!”

병사들은 그녀가 적을 위해 나서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백천범이 직접 말뚝으로 다가가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 순간, 사장풍은 마음속에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째서 그녀는 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한데도 그녀의 얼굴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답고 슬펐다.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잠시 기절했던 터라 멋쩍게 몸을 살폈다. 몸은 피범벅이었지만, 상처 자체는 깊지 않았다.

호위병 총령이 다가와 무양 공주에게 예를 갖췄다.

“공주 마마, 저들을 돌려보내시면 아니 됩니다. 폐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이들입니다.”

백천범이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그것이…….”

총령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이들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다만 상부의 명이 내려왔으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이 밧줄을 풀고 묵용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부축해 줘요.”

묵용감은 그녀의 생각을 헤아리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자신들을 보내 주려 한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사장풍에게 물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예.”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떠나야겠습니다. 영구는요?”

“영구도 올 것이다.”

묵용감이 백천범의 팔을 붙잡으며 또렷하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갑시다.”

백천범은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요.”

호탕한 그녀의 대답에 묵용감은 조금 의아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알겠다고 했으니 우선 돌아간 뒤에 다시 얘기를 나눠 보면 될 일이었다.

반면 백천범은 이왕 도와주기로 했으니 성 밖까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병사들이 다시 그들을 에워쌌다. 총령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양 공주 마마. 말장은 저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백천범이 허리춤에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보이느냐? 남 장군의 패도다. 검은 그 사람을 대변하는 법. 내 말은 소용없다 해도, 이 검이면 되겠지?”

“그것이…….”

남문우는 모든 병사들의 수장이었다. 그들에게는 남문우가 여제보다 더 위엄 있는 사람이었다. 백천범이 들고 있는 건 분명 남 장군의 패도였고, 무양 공주는 남 장군과 곧 혼사를 올릴 정혼자니 총령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총령의 고민을 깨트렸다.

“저들을 포위하라. 본 장군이 생포하겠다!”

드디어 남문우가 온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총령이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곧장 세 사람을 바짝 에워쌌다.

묵용감은 당황하지 않고 냉소만을 비쳤다.

“어찌, 나와 단둘이 싸우긴 겁이 나더냐?”

“웃기지도 않는 소리. 겁을 먹은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제 호위무사는 버려두고 내 여인을 데려갔으면서, 뻔뻔하긴.”

남문우는 건들거리며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총령에게 말했다.

“저자와 한 판 겨룰 테니 아무도 끼어들지 말거라. 덤비는 자가 있거든 본 장군이 목을 베겠다.”

총령은 연신 알겠다고 대꾸했다. 남 장군은 줄곧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잔혹함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그들은 군말 없이 남 장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남문우가 백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저쪽으로 가 있어. 잘못하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백천범은 남문우가 가리킨 곳으로 가는 대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그 틈에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

“저자와 혼사를 올리기로 했다던데?”

“네.”

백천범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옛 친구라고 하니 혼삿날 축하주라도 드시러 오세요.”

순간 묵용감은 속이 다 뒤틀리는 듯했다. 곧장 몸을 돌려세운 그는 검을 휘날리며 긴 기합을 넣었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긴 했지만 속으로 그의 몸놀림에 감탄했다. 다만 그가 왜 분노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격전이 시작되었다. 남문우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묵용감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그를 얕잡아 보진 않았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조금 전 죽 가게에서의 전투로 묵용감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용감의 그림자가 그를 덮친 순간, 그는 스치는 불길함에 눈을 부릅떴다. 차마 그와 맞서지 못하고 몸을 틀어 자리를 피했지만, 이미 묵용감의 장검이 왼쪽 팔을 스친 뒤였다.

백천범이 놀라 소리쳤다.

“조심해, 문우야!”

남문우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읊조렸다.

“들었지? 저 애가 날 걱정하네.”

묵용감은 그저 칼을 휘두르며 남문우에게 접근했다. 그에 남문우도 더는 여유를 부리지 않고 수비 태세를 갖췄다.

병사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 장군의 실력은 남원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번개처럼 빠른 쾌검과 기이한 초식까지, 남원에서 그의 적수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아니던가. 한데 지금 남 장군과 겨루는 사내는 보다 빨랐고, 보다 흉포한 초식을 선보였다. 병사들 중 남 장군의 팔을 베는 광경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핏방울이 떨어진 후에야 베였음을 알아차릴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병사들은 두 그림자가 위아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았다. 도와주고 싶어도, 함부로 다가갔다간 제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때, 사장풍의 귀에 영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둡고 급박한 목소리였다.

“어찌 멍하니 있는 것이오, 어서 부인을 데려가지 않고!”

사장풍은 꿈에서 깬 듯 움찔하더니 백천범의 팔목을 붙잡고 밖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단숨에 주변을 에워쌌다. 영구는 날개를 펼친 커다란 새처럼 병사들의 머리를 밟으며 단번에 묵용감과 남문우가 싸우는 격전지로 뛰어들었다.

사장풍은 백천범이 얌전히 그를 따를 줄 알았다. 말뚝에 묶여 있는 자신도 풀어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손을 힘껏 뿌리쳤다.

“같이 가야죠.”

사장풍은 세 사람이 함께 가야 한다는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 뜻은 좋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찌 모두가 함께할 수 있을까?

잠시 주저하는 사이, 병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장풍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하며 백천범에게 소리쳤다.

“어서 숨으십시오. 이러다 다치십니다.”

영구와 병사들의 개입으로,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묵용감의 근처에 도달한영구는 서둘러 묵용감에게 눈짓을 보내며 그의 싸움을 대신했다.

“어서 부인을 데리고 떠나십시오.”

그러나 남문우는 묵용감이 또다시 도망치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큰 소리로 호령했다.

“진을 치거라!”

그 말에 사장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가 서둘러 소리를 질렀다.

“저 진을 조심하십시오!”

그가 정신을 잃고 포박된 것도 다 저 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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