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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5)화 (524/1,192)

제525화

사장풍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준비 따위는 필요 없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묵용감은 어금니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설령 그녀의 마음이 변했다 해도, 그는 그녀를 데려가야만 했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나 다름없는데,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우선은 그녀를 데려간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그만이었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영구가 입장을 밝혔다.

“저도 나리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일은 빠르게 대처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을 확인한 이상, 오늘 하시는 게 옳습니다. 앞쪽 골목은 큰 거리와 맞닿아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장입니다. 지금은 사람이 많으니 쉽게 추격을 따돌릴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성문이 있으니 성을 빠져나가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장풍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와 영구가 선봉에 설 테니 나리께서는 시장에서 기다리십시오. 부인을 모셔온 뒤, 시장에서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나와 영구가 간다. 넌 시장에서 마차를 빌려 놓거라. 시장에 도착하는 대로 성을 떠날 것이다.”

묵용감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위지문우는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뭐든 나와 겨루려 했으니, 내가 나타나야 직접 응할 테지. 내가 그자를 상대하고 있으면 영구, 네가 천범을 데려가거라. 만약 내가 뒤따라가지 못하거든, 먼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너희 뒤를 따라갈 테니.”

“안 됩니다.”

영구와 사장풍이 동시에 답했다. 황제가 위험에 빠진다면 호위로 나선 그들은 맞아 죽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군주를 잃게 되면 동월에는 대혼란이 일어날 테고, 그들은 동월의 대역 죄인이 되고 만다.

묵용감의 목소리가 한없이 어두워졌다.

“감히 명을 어기려는 것이냐?”

영구와 사장풍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 영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상황이라도 묵용감을 홀로 남기고 갈 수 없었다.

사장풍은 영구와 묵용감을 번갈아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구를 잘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묵용감의 목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구가 저리 말했다면, 분명 대책을 세워뒀다는 뜻이리라.

하늘은 회색 장막을 드리운 듯 점점 어두워졌다. 하늘 끝을 물들이던 붉은 석양도 다 타 버리고 남은 재처럼 빛을 잃었다. 그러나 골목 어귀는 환한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며, 군침 도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은 야시장이 가장 떠들썩한 때였다.

세 사람은 차관의 창가 자리에 앉아 짙어지는 하늘색만 차분히 지켜보았다. 하늘이 검은빛으로 완전히 물들자 묵용감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영구와 사장풍이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한 사람은 골목 어귀로, 다른 한 사람은 골목 끝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가볍게 털어 넣은 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내 찻값을 탁자에 둔 그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천범이 들어간 죽 가게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게였으니 조급히 걸을 필요는 없었다. 언뜻 보기엔 여유롭게 거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오감을 발휘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어둠 속에서 묵용감이 움직였다. 그가 위지문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오만한 위지문우는 백천범으로 그를 끌어들여 한바탕 싸우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릴 때처럼 공평하게 겨루길 원하고 있을 테지. 위지문우는 싸움에서 이긴 후 상대를 짓밟는 통쾌함을 즐겼다. 특히 그와의 싸움일수록 정도를 더했다.

* * *

한편, 죽 가게 안에 있던 백천범은 죽 한 그릇을 전부 비운 뒤, 이곳의 유명한 먹거리 중 하나인 금귀조金鬼爪를 먹고 있었다. 금귀조는 닭발 요리로, 꽃밥에 담가 삶아 내어 노란빛을 띠었다. 살이 쫄깃해 식감이 좋았고 맛도 훌륭했다. 백천범은 이런 음식을 좋아했지만, 궁에서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남문우는 수시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남문우는 죽을 먹다 말고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맛깔나게 닭발을 뜯고 있었다. 그가 빙긋 웃어 보였다.

“왜 안 물어봐?”

백천범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뭘?”

“방금 그 사람, 누군지 안 물어봐?”

“옛 친구라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궁금해야 하는데?”

남문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표정에 마음을 놓았다. 그는 곧장 눈썹을 치켜세우며 단정치 못한 미소를 지었다.

“나만큼 외모가 반반한 사람이라서, 마음에 들어 할까 봐 걱정했거든.”

백천범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너랑 달라.”

남문우가 그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내가 여인만 보면 딴마음을 먹는다는 거지?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내 마음속엔 너밖에 없어. 그렇게 말하면 정말 억울하다고.”

그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억울한 마음을 표출했다.

백천범은 그의 열정적인 연극에 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웃을 때면, 두 눈은 밤하늘의 별을 박아넣은 듯 반짝였다. 입가에 옅은 국물을 묻히긴 했지만, 입술은 꼭 붉게 피어난 꽃잎 같았다. 남문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입가를 닦아 주었다.

* * *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묵용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가게 내부에서 두 사람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백천범에게 손을 뻗은 남문우를 본 순간, 그의 손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움직였다. 곧장 뽑아 든 장검에서 은빛이 넘실거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살기에, 손님들은 하나둘 줄행랑을 쳤다.

남문우는 등에 눈이라도 달린 듯 잽싸게 튀어 오르더니 공중에서 몸을 돌렸다. 그가 묵용감을 보더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난폭하긴. 나아진 게 전혀 없구나.”

묵용감은 침착한 남문우의 모습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몇 년 못 본 사이에 내공이 꽤 많이 는 것 같았다. 수하들도 배치하지 않은 걸 보니, 그와의 싸움에 승산이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는 그 틈에 백천범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은 듯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치는 대신, 탁자 뒤에 몸을 숨기고 크고 까만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묵용감은 좀처럼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아름다움은 실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사장풍은 그가 실망할까 봐 초상화 속 여인이 백천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었다. 초상화 속 여인이 백천범보다 좀 더 아름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상화 속 여인이 더 아름다운 게 아니라, 백천범이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스륵 소리와 함께 짙은 남색 빛이 번쩍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물러났지만 때는 늦은 뒤였다. 팔뚝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새 남문우의 검이 그의 소매를 베고 옅은 핏자국을 퍼트리고 있었다.

기선제압에 성공한 남문우는 손목을 휘감으며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 순간, 백천범의 외침이 들려왔다.

“싸우지 마!”

남문우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가 먼저 시작한 일이야.”

“옛 친구잖아. 왜 만나자마자 싸우는 건데?”

그 한마디에 묵용감은 숨이 턱 막혀왔다. 남문우와 그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니. 알고 있으면서도 시집을 가려 한단 말인가? 그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대체 그녀에게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그녀의 눈망울에 깃든 걱정 어린 관심에,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희망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그의 가슴 안에서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그를 아직 걱정하고 있었기에, 그가 다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이다.

그럼에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서 남문우와 혼인을 치르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물을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의 입으로 진실을 들어야만, 이 괴로움이 가실 것만 같았다.

그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우르르 검을 꺼내든 탓에 사방이 번쩍였고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남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치려 했다. 잘 싸우고 있는데 무엇 하러 일을 키운단 말인가?

다음 순간, 지붕에 구멍이 뚫리더니 누군가 뛰어내렸다. 탁자 위로 떨어진 그는 남문우도 알고 있는 묵용감의 호위무사였다.

그는 순식간에 백천범을 안아 들더니 묵용감에게 넘겨주었다.

“나리, 받으십시오!”

묵용감은 영구의 말뜻을 곧장 알아들었다. 지금은 길게 말을 주고받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하나 손으로 그녀를 안은 묵용감은 곧장 몸을 돌렸다. 남은 한 손은 검을 휘두르며, 피로 얼룩진 길을 만들어 냈다.

영구는 병사들과 맞서면서도 남문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문우는 일련의 상황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네 충심도 참 대단하구나. 안타깝게도 네 나리는 널 버리고 갔지만. 그런 사람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겠느냐?”

영구는 날아드는 칼날을 향해 힘껏 검을 휘두른 뒤, 병사를 벽으로 차 버렸다. 그가 팔 할의 무공을 쓴 탓에 벽에 부딪힌 병사는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언뜻 봐도 숨이 끊어진 모양새였다. 그의 난폭한 대처에 병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영구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남문우에게 손짓했다.

“장군과 오래전부터 겨뤄 보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군요. 덤비십시오, 장군!”

남문우는 매력적인 봉안을 가늘게 뜨더니 코웃음을 쳤다.

“네 나리도 본 장군과 싸울 능력이 안 되는데, 네까짓 게? 하, 내가 늙으면 또 모를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 끌 생각하지 말거라. 네 나리가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내 사람을 데려갔으니 이 성을 빠져나갈 순 없다.”

영구가 검을 가슴 앞에 들어 올렸다. 이내 발끝을 세운 순간, 영구는 날듯이 탁자를 밟고 남문우에게 달려들었다. 남문우가 잽싸게 명령을 내렸다.

“진을 치고 저자를 포위하라!”

아무리 영구가 두려워도 장군의 명 앞에서 우물쭈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사들은 서둘러 영구를 포위했다.

영구는 묵용감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지만 이런 기이한 진은 처음이었다. 병사들이 그를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없었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요동쳤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그를 포위했다. 영구의 마음이 아무리 조급해도, 일렁이는 병사들의 그림자를 돋저히 뚫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 눈 뜬 채로 남문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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