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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4)화 (523/1,192)

제524화

미칠 듯한 기쁜 마음에 묵용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녀였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역시 그녀가 살아 있었다. 하늘도 그가 가여웠던 것일까? 이렇게 그녀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지난날들이 그저 꿈만 같았다. 온 나라를 다 뒤졌어도 찾지 못한 그녀였다. 그동안 그는 절망의 수렁에서 허우적대야 했고, 서 태후의 병세를 못이겨 후궁까지 들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갑작스레 아들이 돌아왔고, 우여곡절 끝에 부인도 찾아냈다. 그간의 고통은 옅은 흔적이 되었고, 모든 괴로움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 순간이 누군가의 계략이든, 하늘이 내린 은혜이든 상관없었다. 그간 정처 없이 떠돌던 마음이 마침내 돌아왔으니.

사장풍도 백천범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도 못지않게 감격스럽기도, 흥분이 되기도,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늘어트린 옷소매 아래에서도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묵용감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달려들기라도 하면 큰 소란이 일어날 터였다. 그는 가볍게 묵용감의 어깨를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침착하십시오.”

묵용감의 목울대가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또한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가 어찌 사장풍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이곳은 남원이었다.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절대로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었다. 들키는 날에는 일을 그르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옆을 지키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자, 묵용감의 동공이 한순간 수축했다. 이내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비린 미소를 지었다. 팔 년 전에 죽었다던 이가 아닌가.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그리 기이한 일도 아니었다. 묵용연도 모습을 감추고 지냈는데, 저자라고 못할까?

영구도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두 눈에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장풍은 남문우를 알지 못했기에 두 사람이 사내를 빤히 바라보자 조용히 설명했다.

“듣자니 무양 공주가 남 장군인지 뭔지 하는 자에게 시집을 간다더군요. 아무래도 저자 같습니다.”

그의 말에 묵용감은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침울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내막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백천범이 시집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놀라기는커녕 코웃음을 쳤다. 그의 천범이, 그가 거의 다 키우다시피 한 천범이 어찌 다른 사내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의심도 들지 않았다. 그는 오해가 있는 것이라 확신하며 이곳까지 왔다.

그리하여 마주한 두 사람은 어떤가. 이따금 맞은편에서 사람이 올 때면 위지문우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편안히 받아들이며,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누가 보아도 곧 혼사를 치를 남녀의 모습이었다.

묵용감은 차가운 겨울 호수에 빠진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올 때만 해도 그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녀와 재회의 기쁨을 어떻게 누릴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며 얼마나 기쁘게 달려올지 등을 생각했다. 물론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해 보았지만, 이 상황만큼은 그의 예상에 없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와 함께 있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상을 감지한 영구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나리.”

그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간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토록 머릿속에 난투가 벌어지기도 처음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조각배와도 같았다.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자 영구와 사장풍이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따라오지 말거라. 난 괜찮다.”

말과는 달리 그의 기백은 매서웠다. 영구와 사장풍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고 천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두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선 묵용감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문우도 묵용감의 접근을 눈치챘는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던 남문우가 백천범에게 속삭였다.

“먼저 들어가. 옛 친구를 마주쳤거든. 잠시 얘기 좀 하다 들어갈게.”

백천범은 남문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우람한 체격을 가진 한 사내가 담장 앞에 서 있었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은 칼날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메마른 눈망울에 까닭 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남문우에게 말했다.

“네 죽도 주문해 놓을까?”

“응.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인 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묵용감은 소매 아래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단단한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어떤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백천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면사를 썼지만 그녀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알아차렸지만, 기뻐하기는커녕 시선을 피했다. 꼭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그녀는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간 그녀를 잃은 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진짜 재앙이 지금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벼락을 맞아도 이렇게 얼떨떨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지문우의 기세등등한 표정이 짙어지는 걸,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분명 일고여덟 해 만에 만난 사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안색은 어두워졌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손을 팔랑였다.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찾아온 거야? 진작 알았으면 북이라도 치며 반갑게 맞이했을 텐데.”

“죽은 줄 알았다.”

“이런, 실망했겠군. 미안해서 어찌한다.”

“실망할 것도 없지. 너와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그건 그렇지.”

남문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찾고 싶었던 자는 묵용연이었는데 말이야. 듣자니 나 대신 복수를 해 주었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한 일이었다.”

“원래는 묵용연을 황위에 앉혀 남원의 세력으로 겨뤄 볼 생각이었어. 한데 네가 대신 처리해 주었으니 내 수고를 덜어 준 셈이지. 어렵게 여기까지 왔으니 내 저택에서 며칠 묵으며 축하주라도 들고 가지 그래?”

남문우가 묵용감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방금 봤지? 어때, 정말 예쁘지 않아? 무양 공주라고, 남원에서 제일가는 미녀지.”

묵용감이 건조하게 물었다.

“저 여인은 언제 남원으로 온 것이냐?”

남문우가 피식 웃었다.

“어째 말투가 꼭 내 정혼자와 아는 사이인 것 같네. 오해할 만한 일은 만들지 말라고, 난 속이 좁은 놈이라서. 하찮은 원한도 꼭 갚는 사람이거든.”

그러나 묵용감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물을 뿐이었다.

“남원에는 언제 온 것이냐?”

그제야 남문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게 무슨 태도지? 여긴 내 구역이야. 내 심기를 건드렸다간 동월의 황제가 이곳에 와 있다고 떠들 수도 있다고. 과연 남원의 여제가 예를 갖춰 널 맞이할까? 아니면 궁수를 보내 맞이할까?”

묵용감의 손이 천천히 검집으로 향했다. 그의 분노가 소리 없이 밤공기를 타고 번져 갔다.

남문우는 이쯤에서 멈추려는 듯 태도를 바꾸었다.

“알겠다고, 알겠어. 무양 공주는 남원 여제께서 잃어버리셨던 딸이고 작년쯤 돌아왔어. 공교롭게도 줄곧 동월에 있었다던데,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내 정혼자야. 친구의 여자는 건드려선 안 되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이상한 마음은 갖지 마. 내가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니…….”

말을 하면서도 남문우는 묵용감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예상과는 달리, 묵용감은 화를 내기는커녕 차분한 태도를 되찾고 무표정한 표정을 보였다. 이내 그가 몸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남문우가 소리쳤다.

“이봐, 그냥 간다고? 우리 집에서 좀 더 있다 가라니까!”

* * *

묵용감은 조금 전 자리를 잡아 둔 차관茶館으로 돌아왔다. 사장풍은 곁을 지켰고, 영구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사장풍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힐끔거리다 차를 따라 주었다.

“나리, 차 좀 드십시오.”

방금의 일로 그도 적잖이 놀란 터였다. 과거 백천범을 두고 묵용감과 겁 없이 쟁탈전을 벌인 그였지만, 사실 묵용감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묵용감의 신분을 떠나, 백천범의 마음속엔 오직 묵용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백천범이 묵용감을 보는 순간 기뻐하며 달려와 안기리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부부가 재회한 자리가 아닌가.

그러나 백천범은 보기 좋게 그 기대를 비껴 갔다. 멀찍이서 묵용감을 힐끔 보더니 곧장 가게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던가. 그도 머릿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묵용감과 남 장군이라는 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묵용감과 사장풍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장풍은 이 순간만을 바라며 역참에서의 시간을 버텼는데, 정작 이 순간이 오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묵용감 때문이었다. 그의 침묵은 계속해서 사장풍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가 한참 고민하다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나리, 남 장군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위지문우다.”

사장풍은 묵용감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위지문우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동월에서 그자의 명성은 초왕과 막상막하였다. 다만 만날 기회가 없어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사장풍이 놀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냉랭한 미소를 띠었다.

“저런 놈이 그리 쉽게 죽겠느냐?”

사장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이는 단명하고 화근은 천년을 산다더니.”

“…….”

그때, 영구가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골목 어귀부터 끝까지 병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으니, 뚫고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지문우, 이 오만방자한 놈이 묵용감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예측은 했지만 절로 이가 갈렸다.

사장풍이 얼른 의견을 내놓았다.

“저쪽이 아직 방어진을 치지 않았을 때, 떠나야 합니다. 만약…….”

묵용감은 두 눈을 내리깔았다. 짙은 속눈썹이 매서운 빛을 내뿜는 눈망울을 가렸다. 그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지금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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