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23)화 (522/1,192)

제523화

세 사람은 둘러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남류청과 남제화의 정무 얘기였다. 백천범은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삶은 소고기를 점박이에게 던져 주기만 했다.

남제화는 그 모습이 우스웠다.

“익힌 고기를 주는 것이냐?”

“사실 더 어릴 땐 채식을 했어요.”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문우가 채식을 하는 표범이 어디 있냐고 그래서요. 계속 채식만 하다 보면 이빨이 퇴화할 거라고 해서 익힌 고기를 주기 시작했죠.”

“좋은 방법이구나.”

남제화도 그녀의 말에 찬성했다.

“야생성을 빼면 성격도 더 온순해질 테고.”

남류청이 남제화의 얼굴을 훑으며 말했다.

“닙닙이는 보살처럼 인자하고 넌 마음이 무르구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너와 할 얘기가 더 남았다.”

백천범이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요. 오라버니도 모처럼 보는 거잖아요.”

“오늘은 어려우니 내일 짐의 처소에서 들자꾸나. 문우도 불러서 함께 청음의 시도 듣고.”

남류청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닙닙이는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 다들 짐의 무양 공주가 남원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며 칭찬이 자자하다.”

백천범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소녀의 눈엔 모황께서 가장 뛰어난 미녀이신걸요.”

남류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황은 늙었으니 순위에도 못 들 테지!”

남제화와 함께 밖으로 나간 그녀는 곧장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를 떠볼 생각 말거라. 거사를 망치면 어찌하려고.”

남제화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닙닙이는 남 장군을 은애하지 않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저 애가 우리를 원수로 여기게 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저 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남류청의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남류청은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애도 점점 문우를 은애하게 될 테지. 대제사가 분명 방법을 찾아내지 않겠느냐.”

* * *

남원의 초여름은 무더웠지만, 꽃들은 열기를 받고 더욱 화려하게 피어났다. 백천범은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옅은 하늘빛이 대지를 뒤덮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햇빛에 비친 대지의 경관이 좋았다.

꽃밭으로 나간 그녀는 기이한 사람을 마주쳤다. 기다란 흰색 장포를 입은 그는 꼭 신선처럼 세상을 초월한 분위기를 풍겼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자색 끈으로 느슨하게 묶었고, 반짝이는 두 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아무리 화려한 꽃들도 그의 앞에서는 시들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단아하고, 속세를 벗어난 분위기인데 치솟은 눈매는 요염하기 짝이 없었고 성별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외모였다.

백천범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홀린 듯이 웅얼거렸다.

“당신을 본 적 있어요.”

그래, 그를 꿈속에서 본 적 있었다. 그는 꽃사슴을 타고 있었고,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의 어깨를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무어라 했던가. 미소 띤 입술이 달싹이며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말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 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잘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꿈에서나마 신선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그와 마주친 것이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가벼운 미소였는데도 교태가 넘쳐흘렀다. 백천범은 심장이 몸 전체를 울리는 기분이었다. 쿵쿵, 쿵쿵…….

“절 기억하고 있었군요.”

백천범은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며 물었다.

“당신은 신선이신가요?”

“아뇨, 전 그저 범인凡人일 뿐입니다.”

“그럼 제가 왜 꿈에서 당신을 만났던 거죠?”

“당신의 마음이 지극히 선하고 순수하기 때문이지요.”

백천범이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마음을 잃지 마세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날 이기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러니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마세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니, 참고 견디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테지요.”

말을 마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걷는 자태마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흰 옷자락은 새벽바람에 살랑이는 물결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그저 눈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말았다. 눈앞에 곧게 뻗어 있는 길이건만,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한참 고민에 빠졌던 백천범은 역시 그가 신선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알쏭달쏭했지만 어쨌든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좋은 사람인데…….

그때 표범이 어슬렁거리며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입에는 대바구니를 물고 있었다. 백천범은 웃으며 바구니를 받아들고는 점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나 방금 신선을 만났어.”

점박이는 그녀에게 몸을 비비더니 꽃밭에 뛰어들려 했다. 백천범이 서둘러 말렸다.

“안 돼. 네가 들어가면 꽃이 다 망가진단 말이야.”

그녀의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점박이는 곧장 알아들었다. 점박이는 곧장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백천범이 꽃을 자르는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바구니에 꽃을 가득 채워 평락전으로 돌아오는데, 남문우가 계단 아래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봉안을 닮은 기다란 눈매로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백천범은 늘 그의 미소가 단정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미소는 뭇사람들에게 뜬구름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와 거리를 거닐 때마다 남문우의 미소에 혼이 나간 여인들이 멀리까지 쫓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국 그녀는 남문우에게 남들이 오해할 만한 미소를 짓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작 그는 그녀가 질투한다 여기며 더 우쭐댔다. 앞으로 그녀에게만 웃어 주겠다며 호탕하게 말하기도 했다.

백천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웃는 건 문제없지만 남을 홀리듯 웃지 말라며 몇 번이나 더 설명했다. 남문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끝까지 그녀가 질투하는 거라 여겼다. 그를 보고 있으면 너무 오냐오냐 커서 버릇이 나빠진 아이를 보는 듯했다. 그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도통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녀가 물었다.

남문우는 백천범의 꽃바구니를 넘겨받고는 그녀가 보지 못하는 틈에 표범을 가볍게 발로 차 멀리 쫓았다.

“오늘 같이 나가기로 했잖아.”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오면 어떡해.”

“일찍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면 기뻐해 줄 거야?”

백천범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하여간, 말은 번지르르하다니까.”

남문우는 가슴을 쥐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진심이라고.”

사실 밖에 나가려면 해 질 무렵이 되어야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쯤 나가야 더위도 한풀 꺾였다. 게다가 석양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어두워졌기 때문에 등불도 필요 없었다.

남원 사람들은 야시장을 즐기는 풍습이 있어 낮에는 조용하던 거리가 밤이 되면 소란스러워지는 게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닫았던 가게 문이 열리고, 각종 노점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북적거렸다. 초여름의 남원 거리는 저녁이 되어야 떠들썩해지곤 했다.

백천범은 천천히 거닐며 주변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얼굴에 면사를 썼다. 그러나 얼굴을 가려도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다정한 미소로 여인들을 홀리는 남 장군 때문이었다.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백천범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그에게는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남원은 워낙 개방적인 국가라 매년 배필을 구하는 크고 작은 축제가 잦았다. 덕분에 이곳의 사내들은 여인을 유혹하는 데 능숙했고,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도 유달리 그윽했다. 한 여인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여인을 그윽하게 보기 일쑤였다.

남문우도 그중 한 명일 뿐이었고, 더 말해 봤자 질투를 한다 여길 터였다. 백천범은 남문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큰길가를 지나 골목 안으로 향했다. 그 골목에는 오래된 죽 가게가 있는데 해질 무렵에나 문을 열곤 했다. 죽을 끓이는 양도 그리 많지 않아 늦게 가면 맛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죽을 먹었을 때, 백천범은 향긋하고 차진 죽 맛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도 느껴졌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직접 끓여 준 음식처럼 같았다.

남류청이 직접 죽을 끓여 준 기억은 없지만, 있다면 이런 맛이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청석판이 깔린 골목은 벽 위로 이끼를 키워 내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골목을 따라 적잖은 수의 행인들이 오갔다. 남문우는 이따금 손을 들어 백천범의 맞은편에서 오는 이들을 막아 주었다.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중, 그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이내 그의 눈망울이 번득이는 듯싶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백천범도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또 누굴 홀린 거 아니야? 누가 쫓아오는 기분이 드는데.”

남문우의 눈에 다소 뜻밖이라는 빛이 감돌았다. 그는 무술을 배웠으니 남들보다 더 민감하다 해도, 백천범마저 눈치챘을 줄이야, 정말 신기한 여인이었다.

그가 곧 아무렇지 않게 시시덕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워낙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걸. 너무 멋있어도 참 피곤하단 말이야.”

백천범이 피식 웃고 말았다.

“남원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란 호칭은 사실 남 장군에게 가장 잘 어울리겠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점박이도 데려와서 산책시킨다더니, 점박이는 어디 있어?”

“걘 너만 보면 애교를 부리고 치근덕대잖아. 사람을 시켜서 근처를 둘러보라고 했으니깐 돌아갈 때 만나서 가면 돼.”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문우가 왜 점박이를 데리고 나오자고 했는지 조금 궁금했다. 아무리 그녀에게 순하다고 해도 명색이 표범이니, 점박이를 데리고 나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큰 문제가 생기진 않으리라.

묵용감은 죽 가게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는 갈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면사를 쓰긴 했지만,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