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2화
이튿날 아침, 황제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역참을 세운 후 처음으로 와보았지만, 생각보다 더 훌륭한 곳이었다.
곧게 선 세 채의 건물 사이를 복도로 연결해 놓으니 꼭 기다란 팔 같았다. 복도를 따라 길게 걸린 등불들은 강남에 온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곳은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여린 꽃을 키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복도 아래에는 원추리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떨기마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한쪽 모퉁이에 사람 키만 한 자기 병이 놓여 있었다.
커다랗지만 소박한 병에는 푸른 산과 바다가 새겨져 있었다. 자기 자체는 그리 정교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림만큼은 매우 뛰어난 솜씨였다. 한가할 때마다 감상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세심한 경관까지 신경 쓴 덕에 아름다움은 물론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전부 사앵앵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는 걸, 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루를 운영했던 만큼 어떤 분위기가 손님들을 편안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그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 사앵앵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최초의 여자 홍정상인이 되리라.
때마침 사앵앵이 청옥 찻잔이 담긴 차탁茶托(찻잔을 받치는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황 나리, 차 좀 드시어요.”
그가 찻잔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그래, 이곳 생활은 이제 익숙해졌는가?”
“예,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습니다.”
사앵앵은 황제의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이기에 작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만 햇살이 강하고 모래 폭풍이 심하니, 얼굴이 어찌나 거칠어지는지요. 향을 꼭 써야 합니다. 몽달의 것은 소용이 없고 남원의 것을 써야 하는데 아주 비싸지요.”
황제는 그녀의 말이 우스웠다. 지금 그의 앞에서 궁상을 떠는 것이란 말인가?
“돈을 버는데 향 하나 사기도 힘들단 말인가?”
그녀가 처음 이곳에 올 때 황제는 역참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그녀와 사장풍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식 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이곳에 와서 장사가 잘되는 모습을 보았으니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과 사장풍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사앵앵은 황제에게 너무 좋은 면만 보여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돈을 쉽게 번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살 수는 있지만, 남원은 폐쇄적인 국가라 무역이 쉽지 않습니다. 남원의 물건을 가져오면 가격이 몇 배는 뛰지요. 정말 비싸도 너무 비쌉니다.”
사앵앵이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다.
“황 나리, 제 작은 청이 하나 있는데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말해 보거라.”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남원의 물건은 품질이 좋은 대신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이번에 나리께서 남원에 가신다고 하니, 혹 사장풍을 데려가는 건 어떠신지요? 물건을 사 오라고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황제는 그녀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연지나 향 따위를 사와야 하니 사장풍을 데려가 달라?”
“예.”
황제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천범처럼 너도 참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어느새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감히 군주를 기만하려 드느냐?”
흠칫 놀란 사앵앵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럼 말해 보거라. 왜 사장풍을 보내려는 것이냐?”
사앵앵이 바짝바짝 타는 입술을 핥은 뒤 말했다.
“나리께서 가슴에 가시가 남아 있어 그이를 데려가지 않으시려는 건 잘 압니다. 그 가시를 빼내지 않는 한, 나리께서 그이에게 품은 편견은 사라지지 않겠지요. 하지만 보세요,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 가시를 없앨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어떠신지요?”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이어 보라는 의미였다.
“모든 사람은 전부 변합니다. 한데 나리께서는 어찌 그이가 예전과 똑같다고 단정하십니까? 천범이가 죽었다면 그이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저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해야 근심을 덜고 마음을 놓으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가서 확인만 하면 그이는 안심하고 곧장 돌아올 것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야 전심전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 아닙니까. 어째서 그이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지요? 설마 나리께선 자신이 없으신 것입니까?”
황제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사장풍이 자네에게 이리 말하라고 시키던가?”
“아뇨. 제가 생각하였습니다.”
사앵앵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 그이를 믿으니까요.”
사장풍은 사앵앵이 황제와 함께 걸어오자 급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 나리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 뒤, 사앵앵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부인.”
사앵앵이 담담히 말했다.
“연기 안 해도 돼요. 다 아셨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자리를 떴다.
사장풍은 영문을 모르는 척 멋쩍게 웃었다.
“가끔 저리 삐질 때가 있으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황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옆에 있을 때 아껴 주거라.”
그러다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법이다. 산증인이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사장풍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몇 걸음 걷다 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짐을 챙기거라. 내일 아침 너도 함께 간다.”
“예? 황, 황 나리, 제가 가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
“부인이 널 데려가 달라더구나. 남원의 연지와 향 따위를 사 와야 한다며 말이다.”
사장풍은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니 사앵앵이 커다란 산수화병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사장풍이 멋쩍은 얼굴로 다가갔다.
“흠흠, 저기, 고맙습니다. 내가…….”
사앵앵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니까요.”
“네?”
화병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사장풍에게 향했다. 어딘가 모르게 굳건한 눈빛이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거든, 돌아오지 말아요. 그럼 저도 정말 단념할 테니까요. 각자 살길을 찾자고요.”
사장풍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역참을 혼자 독차지하려고요?”
“…….”
“걱정 말아요.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요.”
사장풍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이 각박하니 여인 혼자 이렇게 큰 역참을 관리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흠흠, 마음대로 하시든가.”
고개를 돌린 사앵앵은 눈꼬리가 접힐 만큼 활짝 웃었다. 어딜, 돌아오지 않았다간 이 몸이 땅끝까지 쫓아갈 테다.
* * *
밖이 유독 시끌시끌했다. 백천범은 천천히 눈을 뜨며 목소리를 내었다.
“누가 왔어?”
여주가 장막을 걷더니 웃어 보였다.
“대황자께서 오셨습니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셨다고?”
백천범은 곧장 침대에서 뛰어내려 한달음에 밖으로 향했다. 제법 덩치가 커진 표범 점박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오라버니!”
백천범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방금 도착했다. 네가 쉬고 있다길래 방해하지 않으려 했지.”
남제화가 웃으며 답하더니 그녀를 살펴보았다.
“더 예뻐졌구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도 좀 더 큰 듯하고…….”
그 순간,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남제화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점박아, 가만히 있어!”
백천범이 표범을 제지하더니 미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놀랐죠? 제가 기르는 아이인데 오라버니를 처음 보는지라…….”
그녀의 호통에 얌전히 앉긴 했지만, 억울한 모양인지 표범의 까만 눈동자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맹수답지 않은 얌전한 모습에 남제화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듬직하구나. 널 아주 잘 지켜주고.”
“그럼요. 제가 기르는 아이인걸요.”
백천범이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또 금방 떠나셔야 해요? 차라리 도성으로 전임하시는 건 어때요? 집에서도 가깝잖아요.”
남제화가 눈을 빛내더니 그녀를 떠보듯 물었다.
“도성에 전임 와서 내가 무얼 하겠느냐?”
백천범은 잠시 놀란 듯하다 곧 웃음을 터트렸다.
“제 정신 좀 봐요. 오라버니는 황자인데 전임이라니.”
남제화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간 잘 지냈느냐? 아픈 데는 없고?”
“잘 지냈습니다.”
“모황께서 네가 남 장군과 곧 혼사를 올릴 거라고 하시던데.”
“네, 안 그래도 준비 중이에요.”
백천범이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문우가 제게 성대한 혼례를 치러주겠대요.”
“그 애가 좋은 것이냐?”
“네, 좋아하죠. 좋은 사람이니까요.”
잠시 침묵하던 남제화가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그자를 좋아하는 것이냐? 아님 연모하는 것이냐?”
백천범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좋아하는 것과 연모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데요?”
남제화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호감을 품지만, 연모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법이다.”
백천범이 표범의 등을 쓸어내리더니 한참 고민에 잠겼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점박이를 포기하고 문우에게 시집을 가라고 한다면, 전 못 가요.”
남제화는 웃음을 참기 위해 퍽 애써야 했다. 그리 잘난 척하는 남문우가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무슨 기분일까?
그가 옆에 있던 보자기를 풀어 보였다.
“오라비가 주는 혼수다.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거라.”
백천범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다만 남원의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이 가는 대로 기다란 머리 장식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옅은 구름무늬가 새겨진 장식의 머리 부분에서 푸른 옥이 빛나고 있었다. 주변을 정교하게 장식한 금은 조각이 멋스러웠다. 꽂는 부분의 끝은 얇고 뾰족해, 제법 제법 날카로웠다.
그녀는 그 머리 장식을 유심히 살폈다. 낯선 형태였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장신구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그동안 남제화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작은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닙닙이를 보러 왔구나.”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모황을 뵈옵니다.”
“식구끼리 어찌 그리 예를 차리느냐.”
남류청이 머리 장신구를 훑더니 남제화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이윽고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상냥하게 말했다.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로구나. 혼사 땐 사용할 수 없으니 우선 넣어 두거라.”
백천범은 알겠다고 대꾸하곤 여주를 시켜 장신구를 넣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