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21)화 (520/1,192)

제521화

사앵앵이 사장풍을 보고 얼른 다가와 물었다.

“왜요, 혼났어요?”

사장풍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갑작스레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꼭 보물을 보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자, 사앵앵은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요, 뭐가 달라 보여요?”

사장풍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부엌에 가서 음식을 더 빨리 내어 오라고 전해 주세요. 황 나리께서 힘든 발걸음을 하셨으니 좀 더 대접해야지요.”

사장풍의 다정한 면모에 사앵앵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곧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네, 네, 알겠어요. 가서 재촉할게요. 좋은 술과 좋은 음식만 내올게요.”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계단을 헐레벌떡 내려갔다.

사장풍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그러다 넘어집니다.”

“안 넘어져요!”

사앵앵이 목청을 높여 답했다. 쩨쩨하던 사람이 웬일로 저에게 마음을 베푼단 말인가. 뜻밖이었지만, 정말 달콤한 기분이었다.

한참 사앵앵을 보던 사장풍이 다시 탁자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자 황제가 물었다.

“둘이 제법 잘 지내느냐.”

사장풍이 모호하게 답했다.

“예, 나쁘지 않습니다.”

황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혼사를 치른 게 언젠데,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사장풍이 영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무슨 소식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황제가 그를 흘겨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이 말이다!”

“아, 그것이.”

사장풍이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젊은데 급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몇 년 뒤에 가져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미룬다고 미뤄지는 일이던가?”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짬이 나거든 의원을 찾아가 보게.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

“어쨌든 아이는 있어야지.”

아버지가 되고 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신경이 쓰이고 걱정하곤 했다. 괜한 걱정이라 해도 그리되는 법이었다.

“…정말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져 주십니다.”

* * *

이천행은 노을이 질 무렵 도착했다. 그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황제를 호위하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이목을 끌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무예가 뛰어난 몇몇 수행원들만 데리고 역참을 찾았다. 아래층에 수행원들을 대기시킨 그가 홀로 위층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의례적인 말은 뒤로한 채, 곧장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친 이천행은 붓으로 선을 그었다.

“오랜 시간 고민해 보았지만, 이 길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곳은 행상대가 자주 오가는 경로인데 검사가 좀 느슨합니다. 믿을 만한 상대를 찾아 함께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황 나리 생각은 어떠신지요?”

“믿을 만한 행상대는 있고?”

“예.”

사장풍이 말을 이었다.

“뒤채에 몽달에서 온 행상대가 있습니다. 동월을 지나 남원으로 갈 예정인데 그곳 인솔자와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자의 무리에 몇 명 넣어 달라고 하는 건 문제없을 것입니다. 통관 문서는 이 장군님이 처리하면 될 듯하고요.”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움직인다더냐?”

“모레 떠날 예정입니다.”

황제가 재촉하듯 탁자를 두드렸다.

“더 일찍 출발하는 자들은 없느냐?”

사장풍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레 이른 아침 떠날 예정이니, 딱 적당합니다.”

이천행도 사장풍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게 가장 좋을 듯합니다. 너무 재촉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영구가 미묘한 시선으로 사장풍을 바라보는데, 문밖에서 사앵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식을 내왔습니다.”

사장풍이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이천행은 탁자에 놓인 지도를 말아서 내려두었고, 사장풍이 쟁반을 넘겨받았다. 그가 조용히 사앵앵을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무거운 걸 들면서 어찌 날 부르지 않았습니까? 허리라도 삐끗하면 어찌하려고…….”

사앵앵은 시시덕거리며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저도 당신이 허리를 삐끗할까 봐 걱정인걸요.”

이천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간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더니, 어찌 갑자기 사랑이 싹텄단 말인가…….

사앵앵이 자리를 떠나자 이천행이 사장풍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관심을 가질 줄도 알고, 대단한걸.”

사장풍이 당당하게 말했다.

“부부지간에는 응당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요.”

사장풍의 말에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밖으로 나온 사앵앵은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녀가 잔뜩 풀이 죽어 계단을 내려오니, 점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 사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사앵앵은 대꾸하는 대신 손을 휘저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장부를 담당하는 관리 선생이 말을 붙여왔다.

“사 주인장, 별실에서 넣은 주문은 어찌 장부에 달지 않은 것입니까? 월말이 되면 계산이 맞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사앵앵이 고개를 저었다.

“계산할 필요 없어요.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장부 관리는 시시덕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인장, 황 나리가 주인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던데, 어찌 그리…….”

사앵앵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은 만천하의 아버지예요!”

“…….”

오늘은 사 주인장이 조금 과하게 성질을 부리는 듯했다.

날이 천천히 저물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음식을 먹던 손님들은 하나둘 객실로 돌아갔다. 사앵앵은 기운이 빠진 얼굴로 계산대 위에 엎드렸다. 그러다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장 허리를 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천행이 먼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이 장군님, 조심히 가세요.”

이천행은 계산대 앞으로 걸어오더니 사앵앵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둘이 연극이라도 하는 것인가?”

사앵앵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천행은 떠났지만, 그가 데려온 수행원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사장풍은 황제의 옆방에 그들을 배정했다.

사앵앵은 복도를 오가는 그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분명 여러 명이 오가고 있는데도 사장풍의 발소리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계단 입구로 걸어가 다정한 목소리로 외쳤다.

“장풍, 바쁜 일이 끝나거든 잠시 내려와 보세요. 할 말이 있거든요.”

사장풍은 애교 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오한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감정을 끌어모았다. 곧 그도 다정한 목소리로 응했다.

“알겠습니다, 앵앵.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내려갑니다.”

방에서 그들의 말소리를 듣고 있던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영구에게 물었다.

“사장풍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영구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수작인지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아래층으로 내려온 사장풍은 탁자 옆에 서 있는 사앵앵을 발견하곤 활짝 웃어 보였다.

“할 말이 무엇이길래 그리 애타게 불렀습니까?”

사앵앵은 곧장 그의 팔을 잡아채더니 복도로 향했다. 사장풍이 작게 소리쳤다.

“아이참, 말로 하면 되지 뭣 하러 힘을 씁니까?”

사앵앵이 냉소를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목구멍에 뭐가 걸리기라도 했어요? 평소엔 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더니, 대체 뭐 하는 수작이에요?”

사장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사앵앵의 말을 들었다. 지나가던 점원이 입을 가리고 낄낄댔다.

“사장님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앵앵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가, 저리 가, 어서!”

역시 복도에는 눈과 귀가 많아 성가셨다. 사장풍을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간 사앵앵은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남원에 가고 싶은 거죠?”

사장풍은 더는 꾸며내지 않고 털어놓았다.

“네.”

“그래서 이런 연극을 한 거였군요. 이렇게 하면 황상께서 데려가실 줄 알고?”

사장풍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앵앵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펼쳐 그를 가리켰다.

“똑바로 말해요. 남원에 갔는데 그림 속 여인이 정말 천범이라면, 그 애를 데리고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나요?”

“아뇨.”

사장풍의 대답은 곧바로 흘러나왔다.

“돌아올 겁니다.”

“그 애를 찾았는데 무엇 하러 다시 돌아와요?”

“…이 역참의 절반은 내 소유니까요.”

사앵앵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애도 찾고, 돈까지 벌겠다고요? 사장풍, 당신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지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사장풍은 의자에 앉더니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근심을 덜기 위해 가려는 것뿐입니다.”

“그다음에는요?”

“그 여인이 정말 천범이라면 황상께서 임안성으로 데려가시겠지요. 전 이곳에 돌아와 계속 역참을 관리할 겁니다.”

“그게 다예요?”

“그럼요?”

사앵앵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추궁하듯 바라보았다.

사장풍도 그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까맣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는 떳떳치 못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치기를 한참, 사앵앵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건데요?”

사장풍이 위층을 가리켰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거, 봤습니까? 저한텐 없는 것이죠.”

그를 빤히 바라보던 사앵앵은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바보, 머리가 희끗희끗한 게 뭐가 좋다고?”

사장풍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세상에서 그 애를 가장 은애하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분이었습니다. 한 장군님이 몇 차례 서신을 보내 당시 상황을 알려 주셨는데, 그저 과장된 내용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직접 보니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결국 내가 진 것을.”

사앵앵이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연극을 한다고 황상께서 당신을 데려가실까요?”

사장풍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 사앵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었어요. 어서 자요.”

사장풍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서 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앵앵이 그를 문밖으로 떠밀었다.

“어디가 됐든 알아서 자라고요.”

사장풍은 공교롭게도 조금 전 마주쳤던 점원과 또다시 부딪혔다. 점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사장풍에게 물었다.

“사장님, 아직도 이러고 계신 거예요!”

사장풍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썩 꺼져!”

점원은 재빨리 도망치며 중얼거렸다.

“부부가 어찌 쌍으로 포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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