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20)화 (519/1,192)

제520화

이때 이천행이 이야기를 틀어 물었다.

“이보게, 사장풍. 사 주인장은 자네 부인이 맞긴 한가? 사 주인장은 부부라고 하고, 자넨 아니라고 하고, 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인가?”

사장풍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두 사람 문제이니 묻지 말아 주십시오.”

이천행이 일부러 그를 놀렸다.

“자네 부인이 아니라면 본 장군도 손을 얹어 볼까 해.”

“장군께서는 이런 취향이셨습니까?”

“얼마나 좋은가. 호탕하고, 대범하고, 밝고, 귀엽잖나.”

“대체 어딜 봐서 귀엽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귀여운걸. 방금 날 보고 저리 활짝 웃어 줄 때도 말일세. 얼마나 귀여운가?”

사장풍이 그를 흘겨보았다.

“되었습니다. 저택에 이미 세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이 장군이 흐흐 웃었다.

“다다익선이라지 않는가? 경사는 많을수록 좋아.”

사장풍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이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앵앵이가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장군의 세 부인께서 아시는 건 더 좋지 않을 테니까요.”

이천행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장풍은 속으로 슬쩍 웃고 말았다. 참 나, 누가 모를 줄 알고!

사장풍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 역참 문을 활짝 열고 전국 각지의 손님들을 맞았지만, 역관의 모습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짜증이 난 사장풍은 직접 말을 몰고 십 리 밖에 있는 산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북 지역은 광활한 대지에 비해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척박한 땅, 사막, 나무뿐이었다. 그저 움직이는 거라곤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뿐이었다.

말에서 내린 사장풍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광활한 곳에 홀로 있으니 어쩐지 자신이 더 작게 느껴졌다. 동시에 괜스레 호기가 솟구치기도 했다. 그는 풀 한 가닥을 뜯어 밑동 껍질을 벗긴 뒤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옅은 단맛이 입안을 채워 나갔다.

최근의 그는 서북 지역의 사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거친 피부, 이곳의 말씨까지 곧잘 따라 했으니. 바깥에서 빠르게 수원水原을 찾을 수 있었고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 때도 있었다. 종종 흥에 겨울 땐 목청을 높여 이곳의 민요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아직 중원에 있었고, 늘 한 사람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앉아 있으려니 머리 위로 떠오른 해가 뜨거운 햇살을 내리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휘파람을 불었다. 근처에서 여유롭게 노닐던 말은 휘파람 소리에 곧장 달려왔다. 날쌔게 말 위에 올라탄 그는 해를 머리에 이고 역참을 향해 질주했다.

역참으로 돌아오니 사앵앵이 원망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어딜 다녀오는 거예요. 얼마나 바빴는데 혼자 밖에서 여유나 부리고.”

사장풍은 그녀와 떠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뒤뜰로 향해 찬물로 시원하게 얼굴을 씻어 냈다. 고개를 힘껏 털고 있는데 사앵앵이 코앞에 서 있었다. 놀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쫓아옵니까?”

사앵앵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요즘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 초상화 때문이에요? 그 초상화가 백천범인 것 같아서요? 꿈 깨세요. 그 사람은 남원의 무양 공주라고요. 당신이 올려다보지도 못할 만큼 귀한 사람이에요.”

사장풍은 세수한 물을 한쪽에 놓인 커다란 통에 부었다. 저녁때 의자나 탁자를 닦고 옷을 빨기 위해 남겨 놓는 물이었다.

“뭐가 걱정입니까?”

사앵앵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걱정할 게 뭐 있어요. 당신이 멍청한 짓을 할까 봐 그렇죠. 또다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간 큰코다칠 거예요.”

사장풍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다녀올 생각은 아니죠?”

사앵앵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제가 봤을 때 그 초상화 속 여인은 천범이와 조금 달랐어요.”

사장풍이 심상하게 물었다.

“뭐가 달랐는데요?”

“천범이는 그 그림 속 여인만큼 예쁘지 않아요.”

사장풍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째 말에서 질투가 느껴집니다.”

화가 난 사앵앵이 그를 때리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인 줄 알아요? 누가 보면 만인이 흠모하는 사내인 줄 알겠네…….”

갑자기 나타난 점원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들, 장난 그만 치시고 어서 와 보세요. 손님이 오셨어요.”

사앵앵은 사장풍을 잠시 노려본 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사장풍!”

사장풍은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난번에도 사앵앵이 그를 이렇게 부른 적이 있었는데, 도적이 들이닥쳤다. 서북 지역에는 도적들이 많은 편으로, 역참 부근은 그나마 덜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봉변을 당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낮에 쳐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좀도둑 놈들이 간이 점점 커져서는, 대낮에도 감히 들이닥치다니. 이 나리가 너희를 살려 보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리나케 들어선 그는 탁자 앞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한데 그 옆에는 평소 호탕하고 대범하던 사 주인장이 어린 부녀자처럼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장풍도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황제가 이곳에 올 줄이야!

그는 꿈을 꾸는 것처럼 멍한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막 무릎을 꿇으려 하는데, 옆에 서 있던 영구가 눈빛으로 그를 저지했다. 사장풍은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나리.”

“저희 황씨 나리이십니다.”

“황 나리, 안녕하십니까.”

‘황 나리’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지.”

“예, 예.”

마침 점원 한 명이 옆을 지나갔다. 사장풍은 점원의 어깨에 있던 수건을 집어 들고 자신의 팔에 얹었다. 그가 손짓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위층 별실로 모시겠습니다. 무얼 주문하시겠습니까?”

황제는 그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별말 없이 위층으로 향했다.

다들 위층으로 올라간 후, 점원이 잽싸게 사앵앵에게 물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주인어른이 직접 모시는 것입니까? 가게 문을 연 이후로 주인어른이 직접 손님을 접대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인걸요.”

사앵앵은 위층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점원이 다시 물었다.

“별실에 뭘 가져다 드리면 될까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사앵앵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넌 네 할 일이나 해. 내가 갈 테니까.”

그녀는 찬장에서 좋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지금까지 모아온 최고급 물건 중에서 옥 술잔까지 집어 들었다. 이내 부엌에서 가장 값비싼 음식을 내어 쟁반에 담더니 조심스레 위층으로 향했다.

점원들은 함께 모여 조용히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장군님이 오셔도 주인어른이 직접 접대한 적은 없었는데, 대체 누구시길래 저러시는 거지? 이 장군님보다 높은 분인가?”

“사 사장님이 이렇게 통 크게 대접하는 것만 봐도 그래. 저게 얼마나 비싼 옥잔인데.”

“분명 엄청난 분이 오신 거야.”

조금 전 사앵앵과 이야기를 나눴던 점원이 입을 열었다.

“사 사장님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 봐, 장인어른이 오셨는데 긴장 안 할 사위가 어디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서너 개의 손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사 사장님 아버지가 저렇게 젊겠어?”

별실로 향한 사앵앵은 탁자에 술과 음식을 가지런히 차린 뒤, 그제야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민가의 여인이 황상을 뵈옵니다.”

“일어나게. 밖에서는 예를 갖출 것 없네. 앞으로는 황 나리라 부르게.”

사앵앵은 그리하겠다고 답하고는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더 볼일이 남았는가?”

“아닙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황제가 느릿하게 손을 내저었다.

“없네. 그만 나가게.”

사앵앵은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뒤, 얼굴을 힘껏 문질렀다. 황제가 오니 그녀와 사장풍 둘 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앵앵이 밖으로 나가자 황제가 사장풍을 바라보았다. 사장풍은 미묘한 기분에 눈을 굴렸다.

“어째서 그리 보시는 것입니까?”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사앵앵은 민가의 여인이지만, 넌 내 신하다. 어찌 생각하느냐?”

옆에 있던 영구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사장풍은 모른 척하려 했지만 더는 힘들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신, 황상을 뵈옵니다.”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대꾸했다.

“그래, 일어나거라. 짐에게 맞서는 건 이쯤에서 그만하고 승복하거라. 짐은 이제 황제다.”

“신이 어찌 감히 황상께 맞서겠습니까.”

인사를 올렸던 사장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초왕이던 시절, 그는 늘 사장풍에게 성을 냈다. 목숨을 반쯤 잃을 만큼 호되게 얻어맞기도 몇 차례, 그럼에도 사장풍은 초왕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그에게는 까닭 없는 경외심이 이는 천위가 있었다.

“다들 앉거라.”

황제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 짐은 황제였지만, 지금은 황 나리다. 다들 주의하도록. 사람이 많으면 비밀도 금방 누설되는 법이니, 다른 이에게 틈을 보여선 안 될 것이다.”

“예.”

사장풍과 영구가 동시에 대답했다.

사실 황제를 본 순간, 사장풍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이기도 했고, 하얗게 센 양쪽 귀밑머리 때문이기도 했다. 얼굴은 예전과 같았지만, 하얗게 센 머리 때문에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 가슴이 턱 막히며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황제를 향한 수많은 원한 중, 가장 큰 원망은 그가 백천범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묵용감의 마음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났겠는가? 줄곧 그리 원망하며, 자신이 백천범을 더 연모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묵용감을 보는 순간, 사장풍은 자신을 관통하는 한 가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셀 만큼 연인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는 연극에서나 본 일이었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남원에 대한 일로 사장풍은 황제와 논쟁을 벌였다. 황제처럼 존귀한 존재가 국경을 넘어선 안 된다는 게 사장풍의 입장이었다. 역참에서 기다리라고 사정했지만,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훑을 뿐이었다.

“이건 내 가정사다.”

사장풍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영구에게는 언제나 묵용감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기에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나리, 저와 사 주인장이 함께 갈 테니 나리께선 이곳에 계십시오.”

황제가 손을 휘저으며 더는 말하기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더 언쟁할 것 없다. 이미 난 결정을 내렸대도.”

결국 사장풍은 조용히 물러나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