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9화
녹화와 기홍이 남서방에 들어서니, 월규와 학평관은 황제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였구나. 짐이 너희를 부른 것은 할 얘기가 있어서다.”
그는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짐이 잠시 궁을 비우는 일은 너희도 알고 있겠지. 조정의 일은 잘 처리해 두었는데, 태자만큼은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너희는 짐의 곁을 오랜 시간 지킨 이들이자 린아의 출생을 함께한 이들이다. 린아는…….”
황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들 무릎을 꿇더니 한목소리를 내었다.
“황상, 걱정 마십시오. 소인들이 태자 전하를 잘 지켜 드리겠습니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태자 전하와 함께 황상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겠습니다.”
비로소 황제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것은 사실 품위를 잃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황제라는 지위를 떠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부탁하고 있었다. 부탁해 둔 이가 많을수록 린아의 신변도 안전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들의 충심은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주인을 모실 이들이었지만, 그는 노파심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놓친 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그는 경수궁을 찾았다. 수원상은 총명했기에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 말을 훤히 알고 있었다. 태자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간 그가 수가의 구족을 멸할 걸 알았기에 그녀 역시 죄인을 자처하진 않을 터였다.
그는 묵용린과 오후 내내 바닥에서 지도 그림을 맞췄다. 묵용린은 이미 지도를 익혔는지 옥 조각을 집자마자 곧장 정확한 위치에 내려놓았다. 빠르게 지도를 완성한 묵용린은 자그마한 얼굴을 들고 아주 미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때면 수원상이 묵용린을 칭찬하며 맛있는 간식을 주곤 했다.
묵용린이 탁자에 앉아 간식을 먹는 동안, 황제는 수원상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이리 짧은 시간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어찌 가르친 것이오?”
수원상이 기탄없이 대답했다.
“전하께 음식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니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게 되었지요.”
황제가 벌컥 성을 냈다.
“담도 크지, 어찌 감히…….”
수원상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황상, 아이가 한 끼 굶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황상과 노불야께서는 정에 이끌리시어 차마 그리하지 못하십니다. 월규도 마찬가지지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 일은 오직 신첩만이 할 수 있사옵니다.”
황제가 재차 물었다.
“그럼 어째서 태자는 경수궁에 남겠다고 한 것이오?”
수원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상께서는 이런 일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태자 전하께선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속으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신첩이 태자 전하를 위하고 있음을요. 그리고 신첩의 곁에 있어야 점차 나아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황제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자신은 그녀의 말에 반박할 능력이 없었다.
* * *
사장풍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주전자를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목울대를 꿀렁이던 그가 주전자를 내려놓고 사앵앵을 바라보았다.
“내 앞으로 편지 온 거 없습니까?”
사앵앵이 입을 삐죽였다.
“누가 당신한테 편지를 쓴다고요? 없어요!”
그녀가 위층을 가리켰다.
“대신 이 장군님이 오셨어요. 지금 위층에서 술을 드시고 계세요.”
사장풍은 순간 눈을 반짝이더니, 멀쩡한 계단을 놔두고 몸을 훌쩍 날려 탁자를 밟고는 이층으로 뛰어올랐다. 사앵앵이 눈을 흘겼다.
“정말 별꼴이야, 괜히 뽐내긴. 남제화가 더 멋있게 뛰겠네.”
그녀의 잔소리에도 사장풍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별실로 들어서자 이천행은 소금에 절인 땅콩을 곁들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퍽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사장풍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장군, 제게 알려 주실 소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천행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본 장군이야말로 자네의 소식을 들으러 왔네만.”
사장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방금 천엽성에서 물건을 떼 왔는데, 제게 무슨 소식이 있겠습니까? 아, 혹 지난번에 말씀하신 도춘거陶春居의 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창가 앞으로 다가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장군께서 말씀하신 건 절대 잊지 않지요. 이번에 무려 열 단지나 가져왔으니 실컷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이천행이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 말은 잊지 않았다면, 그자는?”
“누구 말씀이십니까?”
“남제화 말이네. 본 장군에게 살펴봐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해서 내가 당분간 잘 지켜보라고 했고, 지금 그자는 어디 있나?”
“여기 있지요……. 없습니까?”
사장풍이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
“삼아三兒! 삼아!”
한 점원이 후다닥 뛰어와 외쳤다.
“예,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잘 지켜보라고 한 자는?”
“아, 남 공자요? 모르겠네요.”
삼아라는 점원이 목청을 높여 답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일을 게을리하진 않았거든요. 물독을 채우고 장작을 패는 것까지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사장풍이 고함을 쳤다.
“내가 그런 것들이나 지켜보라고 했느냐?”
삼아가 조금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십니까?”
이천행이 그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되었어. 뭘 그리 호통을 치나? 물독도 채우고 장작도 다 팼는데 무얼 더 볼 수 있었겠나!”
사장풍은 울적한 얼굴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제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점원을 탓할 수는 없지요. 아, 잠시만요. 제가 다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사앵앵에게 물었다.
“남제화는 어디 있습니까?”
“떠났어요.”
“떠나다니?”
사장풍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로요? 다시 돌아온답니까?”
“그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제 사람도 아닌데. 그자는 강호를 떠도는 검객이라고요. 온 세상을 집이라 여기는 사람이니 여기저기 떠도는…….”
사장풍이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말도 안 하고 떠났단 말입니까?”
“했어요.”
사앵앵이 손가락을 펼치더니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빚진 게 남았는데 훌쩍 가면 제가 멀쩡히 보냈겠어요? 떠나기 전에 내 손금을 봐줬는데, 복이 많은 손이라면서 나중에 엄청난 복을…….”
사장풍은 성가시다는 듯 다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온답니까?”
“그건 말 안 했어요. 어쨌든 일을 마치면 돌아온대요. 그때 제게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댔어요.”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어찌 알겠어요.”
사앵앵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
“아마 좋은 물건들이겠지요!”
사장풍이 성을 내며 한마디 던졌다.
“돈벌레.”
사장풍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이천행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대어를 놓친 듯하네.”
사장풍이 자리에 앉더니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대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들어온 소식이네. 남원의 대황자 이름이 남제화라더군. 게다가 남원을 떠난 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하네.”
“예?”
사장풍의 손이 흠칫 떨렸다.
“남제화가 남원의 대황자라고요?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대황자가 여기에 숨어 살다니요.”
“아마.”
이천행이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
별안간 사앵앵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자, 사장풍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왜?”
이천행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여자 때문에요!”
“…….”
사장풍이 혼자 중얼거렸다.
“남제화가 남원의 대황자고, 그림 속 무양 공주가 초왕비라면… 그자가 천범의 오라버니?”
추측 끝에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천행이 그를 흘겨 보았다.
“초왕비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황후 마마시다. 황후 마마의 존함을 감히 입에 올린단 말이냐?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사장풍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황상께선 후궁을 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천범이는 첩을 들이는 사내에게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냉랭하게 말했지만, 그의 마음은 조급한 터였다.
“황상 쪽에서는 왜 아직도 소식이 없단 말입니까? 우선 제가 먼저 처리한 뒤에 보고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천행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국가 간의 일은 신중하게 도모해야 하는 법이지. 경거망동할 수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어찌 기다립니까? 호 사장이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무양 공주가 곧 남원의 망할 장군과 혼사를 치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 늦었다간 일이 커질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하, 황상은 또 얼마나 후회하시려고.”
“이렇게 조급해하는 게 황상을 위한 것인가? 자네를 위한 것인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진실만을 위한 것이지요.”
이천행이 그의 등을 느릿느릿 토닥였다.
“되었네. 초조해하지 말게. 임안성에서 곧 소식이 올 테니 며칠간 잘 지켜보게. 난 그럼 이만 가겠네.”
사장풍은 아래층까지 그를 데려다주었다. 사앵앵은 계산대 앞에 서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이 장군님, 또 오세요!”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던 이천행은 갑작스레 사장풍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남제화가 여자 때문에 이곳에 있었다더니, 설마 사 주인장을 두고 한 말인가?”
그러나 사장풍은 언짢음을 감추지 못하며 사앵앵을 보고 있었다.
“저 모습 좀 보십시오. 누가 역참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여기겠습니까? 사람들을 볼 때마다 꼭 저리 환히 웃어 줘야 합니까?”
이천행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사하는 사람이 웃지 않으면 누가 찾아오겠나? 자네처럼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역참은 진작 망했을 걸세.”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황상께서 잘되면 저희 것이고 손해를 보면 황상 거라고 하셨거든요.”
이천행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황상의 일에 밑지는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사장풍 자네가 유일할 걸세.”
사장풍은 대꾸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전부 돈으로 따질 수 있을까? 그는 그래도 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