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8화
이날 오후, 학평관은 황제를 만나러 오는 이들을 죄다 막아섰지만 백장간만은 달랐다. 그가 대전 앞에 나타나자 학평관은 멀리서부터 달려나와 맞이했다.
“백 장군님 오셨습니까? 어서 드십시오. 황상께서 한참이나 기다리셨습니다.”
백장간은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도도한 얼굴로 들어섰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여동생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다. 누가 황제가 되느냐는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동생을 잃은 응어리를 풀 방법이 없었기에 묵용감이 황제가 되었어도 그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좀처럼 순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능을 높이 산 황제는 그를 여전히 대장군에 머무르게 했다. 그가 이따금 조회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느슨하게 굴어도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원하는 대로 지내게끔 두었다.
그렇게 지내던 그가 조정에 모습을 드러낸 건 기이한 소문 때문이었다. 태자가 금란전의 옥좌에 앉아 조회를 참석한다는 말을 듣자, 사심이 일었다.
간만에 찾은 조정에서 묵용린을 본 순간,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생김새가 묵용감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묵용린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는 아이의 뾰족한 턱이 백천범과 조금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백천범과 달리 아이의 눈엔 광채가 돌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저미는 듯했다. 도무지 아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묵용린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조정을 찾았다. 멀리서나마 아이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묵용린은 며칠 동안 조회에 나오더니 또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 묵용린의 탄일 연회 때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 마주한 흉포함은 그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늘 도도하고 거만하던 그였지만, 그날만큼은 상처를 입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사죄의 뜻을 표했다. 물론 태자를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대꾸했다.
그도 묵용린을 탓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가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그 또한 이 문제로 황제를 찾아가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황제는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자그마한 족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 무슨 이유로 신을 부르셨습니까? 중요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가 그를 흘겨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만약 천범이 죽지 않았다면, 짐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겠느냐?”
백장간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신은 그런 헛된 가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황제가 족자를 가리켰다.
“한번 펼쳐 보거라.”
백장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족자를 펼쳤다. 묵묵히 그림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마치 먹이를 찾아 숲을 누비는 매처럼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이었다.
“짐에게 솔직히 말해 주게. 천범이 정말 백여름의 딸인가?”
그림 속 여인에게 고정되었던 백장간의 시선이 한순간 흔들렸다. 한참 뒤, 그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쨍그랑!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황제가 찻잔을 내던졌다. 그의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것이냐, 감히 짐을 이리 오랜 시간 속이다니!”
백장간은 조금도 놀라지 않으며 답했다.
“이미 떠났는데 그런 것들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대체 누구입니까? 어찌 이리 천범이와 닮은 것입니까?”
황제가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원의 무양 공주라고 한다.”
“남원의, 공주라고요?”
백장간이 족자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생각에 빠져들었다.
“뭔가를 알아보겠느냐?”
“천범을 닮기보단 그 애의 어머니를 더 닮았습니다.”
“천범의 어머니를 본 적 있단 말이더냐?”
“예. 아주 어릴 때였지만요. 천범의 어머니는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임한 몸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을 정성을 다해 살피셨습니다. 특별히 외지고 조용한 정원을 내어 주시고 아무도 그분을 찾아가 괴롭힐 수 없게 돌봐 주셨습니다. 이 일로 큰어머니와도 많이 다투셨지요. 그래서 저도 몇 차례 본 게 전부입니다.”
“그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범이를 낳고 그대로 사라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산후 질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셨지지만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다투는 걸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지요.”
황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듣자니 남원은 현재 여황제가 다스리고 있다고 하더군. 그 여황제의 딸이어야 공주라는 호칭을 쓸 수 있을 터. 만약 이 그림 속 여인이 천범이 맞다면, 그때 백 장군의 집에서 천범을 낳은 이가 남원의 여제란 말이 되는군.”
백장간이 흠칫 놀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천범이의 어머니는 뛰어난 미인이기도 했지만 고귀한 분위기를 지녔던 것 같습니다.”
황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머니가 누구든 이미 짐에게 시집을 왔으니 짐의 사람이다. 어찌 되었든 짐이 직접 찾아가 진위를 확인하겠다.”
백장간이 서둘러 나섰다.
“황상, 신도 가겠습니다.”
“아니, 넌 남아 있거라. 짐이 이곳을 떠나 있는 동안 호부를 맡기겠다. 무슨 일이 생겼다간 돌아오는 대로 네게 책임을 물을 것이야.”
백장간이 질겁하며 눈을 크게 떴다.
“황상…….”
그를 훑는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넌 짐을 줄곧 원수라 여겼지만, 짐은 널 가족으로 여겼다. 천범이 네 친여동생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천범이 널 큰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았더냐. 그녀가 널 믿으니 짐도 널 믿는다.”
그 순간, 백장간은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진심 앞에서 그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린아도 네게 외숙부라고 불러야 할 테지. 그러니 린아도 잘 부탁한다. 바깥을 떠돌며 온갖 고생을 다 한 아이인 만큼,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돌봐 주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야. 할 수 있겠느냐?”
백장간의 가슴에 커다란 돌이 켜켜이 눌러앉는 듯했다. 그러나 함부로 무너트릴 수 없는 돌이었다. 그는 마침내 입술을 꽉 깨물더니 절을 올리며 정중하게 답했다.
“신, 할 수 있사옵니다.”
* * *
황제는 병권을 백장간에게 넘기고 정권을 수민에게 임시로 위임했다. 후궁은 수원상이 도맡아 관리하니 몇 개월 만에 그의 하늘을 뒤집는 자는 없으리라.
백가와 수가는 각각 병권과 조정의 기강을 손에 쥐었으니 엇비슷한 힘으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다. 후궁엔 수원상이 있으니 누구도 풍랑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경수궁과 자안궁은 가까우니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원상이 서 태후를 잘 돌봐 줄 터였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건 그의 린아였다. 다시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자는 또다시 헤어져야 했다. 묵용린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그는 진심으로 아쉽고 서운했다.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첫째는 아내, 둘째는 아들이었다. 묵용린이 돌아온 후, 그는 더욱더 지독하게 백천범을 그리워했다. 초상화까지 본 지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원에 가야만 했다.
물론 신하들의 거센 반대가 빗발쳤다. 천금 같은 존재인 황제가 출궁하다니,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몇몇 언관들은 후궁을 들이라고 청했던 때처럼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말리기까지 했다. 꼭 그가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떠난다 여기는 것 같았다.
황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에게 태형을 내렸다. 엄벌에 처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더는 잡음이 들리지 않을 터였다.
남서방으로 돌아오니 가동이 따라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상, 너무 먼 여정입니다. 신도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넌 금군을 통솔하고 있지 않느냐. 짐은 궁의 안전을 네게 맡길 것이다. 짐 대신 이 황궁을 잘 보살펴 다오.”
“영구가 금군의 정총령입니다. 신은 그저 부장일 뿐입니다. 영구를 남기시고 신이 황상을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영구는 성미가 너무 곧아. 너처럼 둥글지 못하니 그 애를 궁에 남기는 것은 옳지 않다.”
“…….”
성미가 둥글다니,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문득 황제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동아, 짐은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짐이 다시 한번 네게 태자를 맡길 테니, 잘 지켜줄 수 있겠느냐?”
흠칫 놀랐던 가동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굳센 각오로 붉어져 있었다.
“황상, 마음 놓으십시오. 신, 이번만큼은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어도 태자 전하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만약…….”
황제의 안색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만약이란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예.”
가동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따위의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태자 전하를 제 심장이라 여기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잘 모시겠습니다.”
“빈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리할 수 있다면 짐에게 직접 보여 주거라.”
“예, 명 받잡겠습니다.”
가동은 절을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나무 아래에 서 있던 영구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가동이 꾸물대며 영구에게 다가갔다.
“왜?”
“저와 이야기하는 게 그리 싫으십니까? 태도 한번 참.”
“그럼 어떤 태도를 원하는데?”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황상께서 널 데려가신다고 우쭐하나 본데, 사실은 내게 더 막중한 임무를 맡기시느라 날 궁에 두고 가시는 거야.”
“저도 압니다.”
영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제가 형님을 부른 이유이기도 하지요. 황상께서 앞으로 형님을 어떻게 보실지는 이번 일에 달려 있습니다.”
가동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형님, 진지한 얘기입니다.”
영구가 팔뚝으로 그를 한 번 치며 말했다.
“황상께서 부재하실 때, 수가와 백가가 서로 암투를 벌인다면 형님은 누구 편에 서실 겁니까?”
가동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에이, 그럴 리가. 수 대인은 충신이잖아. 백 장군은… 황상과 늘 맞서긴 하지만… 그런데 황상께서는 왜 호부를 백 장군한테 넘기신 거야? 만에 하나라도… 어쨌든 두 사람이 서로 겨루면 난 태자 전하가 계신 편에 설 거야.”
영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수 대인은 이전 황조 때의 대학사입니다. 충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세를 파악하는 데 뛰어난 분이시지요. 한번 이해관계가 얽히면 쉽게 따지기 어려운 법입니다. 게다가 양비께서 궁에 계시지 않습니까. 조정과 후궁 안팎에서 서로를 돕는 건 과거에도 자주 있던 일입니다. 그러나 백장간은 다릅니다. 수작을 부리는 경우도 없고 한 번 확신한 일엔 쉽게 마음을 바꾸지도 않지요.”
가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
그 말에 영구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저 헛소리를 한 것뿐인데도 믿으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다른 이들이 어찌하든, 형님의 임무는 태자 전하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셨다간.”
그가 별안간 매섭게 얼굴을 굳혔다.
“황상께서 형님의 목을 베지 않으신다 해도 제가 벨 것입니다.”
가동이 당차게 말했다.
“내가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황상께서 벌하셔야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영구가 경멸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형님은 제 부장이 아닙니까. 어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까?”
가동이 울컥 화를 내었다.
“그래, 너랑 엄청나게 상관있는 일이다. 솔직히 나도 별로 안 가고 싶거든? 그리 먼 길을 떠나는데 집처럼 편하기야 하겠냐. 난 매일 우리 색시를 껴안고 편히 잠들 거야. 넌 네 검이나 껴안고 자라!”
“매일같이 붙어 있으면 서로 미워하는 법이지요. 저랑 기홍은 다릅니다. 잠시 떨어져 지내면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형님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못 느껴 보셨지요?”
영구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어차피 말로는 영구를 당해 낼 수 없는 가동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설전을 벌이는데, 문득 각자의 부인이 대전 입구 근처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걸음을 옮기지도 않고,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듯했다.
녹하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가동은 서둘러 해명을 하려 했지만, 녹하는 기홍을 끌고 남서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동이 울상을 지었다.
“화난 얼굴 좀 봐. 황상께 날 고자질하는 건 아니겠지?”
영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는 바보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