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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17)화 (516/1,192)

제517화

막상 아이를 보내고 나니, 황제는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비단 황제뿐만 아니라 승덕전의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였다. 특히 월규가 가장 심했다. 걸핏하면 넋을 놓는 탓에 학평관이 여러 번 일깨워 줘야 했다. 황제도 넋을 놓고 있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혼쭐이 날 뻔했다.

황제는 몇 차례나 태자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이 황궁에서 수원상만큼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없었다. 묵용린이 조금만 입술을 들썩거려도 마음이 녹아내리고 만다. 서 태후는 더 심했다. 묵용린이 그녀의 왼쪽 뺨을 때린다 해도 오른쪽 뺨까지 내밀어 줄 사람이었다.

황제의 측근들은 묵용린이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한 이들이기에 누구보다 묵용린을 아꼈고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후궁에 있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만큼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수원비처럼 대담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큰일이었다. 일이 터진 뒤 구족을 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이에게 사고가 생기면 황제를 이루는 절반도 잃고 마는 것을.

오직 수원상밖에 없었다. 몇 년 전까진 그녀에게서 도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면 지금은 침착하고, 참을성 있고, 대담하고, 강직하고, 관용을 베푸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또한 총명하고 주도면밀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후궁을 맡길 수 있었다.

이따금 그녀의 비범한 인내심에 감탄하기도 했다. 다만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뿐.

사흘 후, 그는 직접 경수궁을 찾았다. 그녀의 말처럼 정말 자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처소에 발을 들였다. 여러 형태의 옥 조각 옆에 앉아 있는 묵용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손에는 옥 조각을 쥐고, 미간을 찌푸린 게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수원상은 작은 나무 걸상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전하,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묵용린은 좌우를 두리번대다 마침내 왼손에 쥔 조각을 바닥의 대나무 틀에 끼워 넣었다.

수원상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했다.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황제가 천천히 묵용린 곁으로 다가와 살폈다. 바닥에는 네모난 대나무 틀이 놓여 있었는데, 얇은 대나무가 가로세로로 배열을 이루고 있어 옥 조각을 끼워 넣게끔 되어 있었다. 옥에는 각기 정교하게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틀에 맞춰 끼워넣으면 동월의 지도를 이루었다.

황제가 적잖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태자에게 이런 걸 가지고 놀게 하는 것이오?”

그제야 황제를 발견한 수원상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전하의 탄일 선물로 준비한 것입니다. 동월국의 지도를 본떠 조각을 맞추는 것이지요. 좀 더 나중에 가지고 놀게 해 드릴 생각이었는데, 전하께서 좋아하셔서 지금 드리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짐의 말은, 어떻게 태자에게 지도 맞추는 놀이를 알려 줄 생각을 했냐는 것이오.”

수원상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전하께서는 훗날 대통을 이으셔야 하니 사직과 관련된 것을 접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신다 해도 눈에 익혀 두면 좋을 테니까요.”

황제는 그녀의 대답이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튼짓이오.”

그러나 황제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수원상은 그가 그저 한마디 던졌을 뿐, 더는 간섭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황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약속한 사흘이 지났으니, 태자의 뜻을 확인하고 싶어 찾아왔소.”

수원상이 몇 발 물러나며 대답했다.

“전하께 물어보시지요, 황상.”

황제는 묵용린을 바닥에서 일으킨 뒤, 곧바로 물었다.

“린아,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겠느냐?”

작고 통통한 손이 곧장 묵용감의 손을 꼬옥 쥐었다. 황제는 어쩐지 의기양양해져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보았소? 짐과 가고 싶다는군.”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 전하는 황상께서 밖으로 데려가 놀아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하겠다고 할 수밖에요. 승덕전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경수궁에 남을지 물어보셔야 합니다.”

황제가 그녀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태자는 아직 말도 못 하는데, 어찌 대답을 하겠소?”

“말씀은 하지 못하셔도 자신의 의견은 표현할 줄 아십니다.”

수원상이 웅크려 앉더니 묵용린과 눈을 맞추었다.

“전하, 황상과 승덕전에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리하고 싶으시다면 고개를 끄덕여 이 마마에게 알려 주십시오.”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시도를 지켜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방법은 월규도 시도해 보았지만 여태껏 성공하지 못했다.

수원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전하, 경수궁에서 이 마마와 함께 지내고 싶으십니까?”

잠시 망설이던 묵용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황제의 커다란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묵용린이 승덕전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말에 제대로 반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간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묵용린의 반응은 그에게 기뻐 날아갈 듯한 황홀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 또한 자리에 주저앉아 물었다.

“린아, 다시 한번 묻겠다. 아버지와 승덕전에 돌아가겠느냐?”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고작 사흘 만에 묵용린과 수원상과의 감정이 이렇게나 깊어졌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조차 필요 없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묵용린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키지 않은 마음에 몇 차례나 더 물었다.

“린아, 월규 고고가 보고 싶으냐?”

묵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아비와 함께 가자.”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 지도가 마음에 드는 것이냐?”

묵용린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함께 놀아줄 테니 이것도 가져가자꾸나. 그럼 아버지와 함께 가겠느냐?”

묵용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이내 수원상 곁으로 걸어가더니 황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어째서 배은망덕한 자식을 기른 기분이 든단 말인가?

황제는 조금 울적한 얼굴로 승덕전에 돌아왔다.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월규는 홀로 돌아오는 황제를 보며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흠, 태자는 경수궁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걱정 말거라. 그저 잠시, 흠,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니 며칠 더 지내 보라고 했다. 짐이 앞서 말한 대로 언제든 태자를 보러 가도 좋다.”

월규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황상께서 직접 가셨는데도 오지 않겠다고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조금 시큰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양비가 뭘 그리 좋은 걸 주었는지 친아비조차 필요없다는 구나.”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월규의 마음을 흐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사흘 동안 그녀는 경수궁에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태자가 사흘 뒤면 돌아오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긴 해도 워낙 똑똑하니 자신에게 잘 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녀는 수원상이 자신보다 더 잘해 줄 순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자는 친아버지가 데리러 갔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데리러 간다면… 되었다. 월규는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은 황상이 분부한 대로 따라야 했다.

황제가 방 안의 의자에 앉자마자, 영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건조한 표정이었지만,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황제는 작은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더냐?”

영구가 품에서 작은 족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한번 봐 주십시오.”

황제는 서둘러 족자를 펼쳤다. 족자에 그려진 여인은 백천범과 매우 흡사했다. 아니, 백천범보다 어여뻐 보이기도 했다. 갸름한 얼굴에 크고 반짝이는 두 눈,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을 가진 그 여인은 남원인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한동안 그 초상화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남원의 무양 공주라고 합니다.”

“공주?”

“이 족자를 가져온 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영구가 덧붙였다.

“사장풍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며 남원에 다녀오고 싶다는 청을 올렸습니다. 황상의 답을 기다리겠답니다.”

황제의 손끝이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윽한 눈빛이 한참이나 초상화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아니, 짐이 직접 갈 것이다.”

“황상, 아니 될 일이옵니다. 조정엔 황상이 필요하고, 또 태자께서 돌아오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황제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정의 일은 잠시 중단한다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태자가 마음에 걸렸다. 오늘 태자와 수원상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그리 나쁘지 않긴 해도, 그가 다녀오는 데 몇 개월은 걸릴 터였다.

그렇게 긴 시간이라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지난 변고 이후 그는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혹여 지난번처럼 전부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늘이 그를 가엽게 여기셨는지 아들을 돌려보내 주셨지만,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무너져 버리고 말 터였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백장간을 불러오너라.”

영구는 곧장 명을 받들었다. 족자 속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천범, 당신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닮은 사람이 있겠소? 정녕 그대라면 어째서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오? 나와 린아가 그대를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는데. 천범, 린아만 안전한 곳에 보내고 나면 반드시 그대를 만나러 가겠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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