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6화
황제는 처음으로 묵용린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피를 보고 잔뜩 흥분한 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황제의 기분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는 너무 놀랐고,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작디작은 아이가 사람을 해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묵용린의 기행은 줄곧 들어 왔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온 터였다. 다들 별것 아닌 것처럼 언급하는 와중에 월규만이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었으니, 월규의 걱정이 지나치다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목격하고 나니, 황제는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묵용린을 내려놓고 문을 잠갔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 안에서의 일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묵용린은 자신이 잘못한 걸 인지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도 묵용린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가슴이 시큰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이에게 백천범이 있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묵용린을 의자에 앉히고, 황제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말해 둘 생각이었다.
묵용린은 암담한 두 눈망울로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백천범과 꼭 닮아, 가엽기 그지없었다.
황제의 화를 단번에 누그러뜨리는 모양새였다. 황제는 잠시 침묵한 끝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린아, 고개를 들고 이 부황을 보아라.”
묵용린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잠시 기다린 뒤에 더 온화하게 말했다.
“린아, 고개를 들고 이 아버지를 봐 주려무나.”
참 이상했다. 부황이라는 단어를 아버지라고만 바꿨을 뿐인데, 묵용린은 재빨리 고개를 들더니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황제의 마음에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가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이 아버지에게 말해 보거라.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말을 마친 그는 문득 우스워졌다. 묵용린은 아직 말을 할 줄도 모르는데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묻는 방식을 바꿔 보기로 했다.
“린아, 피를 보는 게 좋았더냐?”
묵용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묵용린이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마음에 들면 가만히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을 휘젓는 게 다였다. 묵용린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하늘을 걸어 올라가는 게 더 쉬울 듯했다.
그러나 묵용린이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그는 아버지였다. 부모로서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쳐야 했다.
“린아, 오늘은 네 생일이다. 아주 기쁜 날이지. 하지만 네가 이리하니 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구나. 까닭도 없이 사람을 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네가 밖에서 어렵게 지낸 것, 다 안다. 너와, 네 어머니.”
갑작스레 통증이 느껴진 황제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변한 걸 어머니가 알면 상심이 클 거다…….”
그는 묵용린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내뱉었다. 이 말을 했을 때, 묵용린 역시 괴로운 듯 입술을 움찔댔고 이채 없던 눈망울엔 물기가 차올랐다. 스치듯 짧은 반응이었지만, 황제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다만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땐 묵용린의 표정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만큼 자숙이 필요했다. 그는 묵용린을 다시 연회로 보내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수원상의 말이 옳았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면 부모의 잘못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간 묵용린을 방임한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묵용린을 데리고 사당으로 가, 함께 벽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벽에는 묵용씨 가문의 가훈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손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땐, 작은 잘못은 질책하고 큰 잘못은 매질을 하지만, 절대 욕하진 않는다.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주변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늘 경계심을 가지고 몸을 사려야 한다.
천금 같은 자식들은 처마 밑에 앉히지 않는다.
귀인은 자기방어에 능하고 우둔한 자는 생명을 경시한다.
아이에게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쳐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며, 실체 없는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다.
귀인은 예를 알고 어리석은 자는 무례하다.」
엄청난 분량의 가훈이 반 자 정도 크기의 죽간에 적혀 온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날 밤, 벽복전에서 치러진 연회는 늦게까지 이어졌고 신하들과 궁비들은 떠들썩하게 연회를 즐겼다. 황제와 태자는 사당에서 조상들의 가르침을 바라보며 잘못을 뉘우쳤다. 자시가 되어서야 부자는 승덕전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묵용린이 잠든 뒤, 황제는 옆에 누워 가만히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란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튿날, 조회를 마치고 남서방으로 돌아온 황제는 문밖에 서 있는 수원상을 발견했다. 수원상이 그를 보고 서둘러 예를 갖췄다.
“신첩,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짐을 찾아온 이유라도 있소?”
“예.”
수원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 지난번과 같은 일로 찾아왔습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태자 전하를 경수궁에 데려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천범이의 아이요.”
“신첩도 알고 있습니다.”
수원상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신첩이 저지른 죄로 쉽게 믿지 못하시겠지요. 하지만 신첩은 태자 전하를 잘 가르칠 자신이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황상.”
황제가 불쑥 물었다.
“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난 것이오?”
“황상을 향한 신첩의 충심이옵니다.”
수원상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한번 시험해 본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한 달 내에 차도가 없다면 태자 전하를 돌려보내고 이 일은 절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선 돌아가시오. 짐도 생각해 보겠소.”
수원상이 몸을 살짝 굽히며 답했다.
“예. 신첩,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황제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수원상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추문이 그녀를 부축하며 조용히 말했다.
“마마, 돌아가시지요. 황상의 모습을 보아하니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니, 본궁이 보기에 이번엔 성사된 듯싶구나.”
추문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였다.
“마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인이 보기엔 황상께서 성을 내시는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수원상이 옅게 웃음 지었다.
“마음으로는 본궁에게 태자를 보내고 싶지 않으신데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보내야 한다고 여기시는 것이지. 해서 화가 나신 것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소태감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수원상에게 고했다.
“마마, 월규 고고가 태자 전하를 모셔 왔습니다.”
추문이 흠칫 놀라며 기쁨과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정작 수원상은 담담한 얼굴로 제비집을 먹으며 분부했다.
“가서 한 그릇 더 담아 오너라. 조금 식혀서 태자께 드릴 것이다.”
분부를 마치자마자 월규가 묵용린을 데리고 들어왔다. 인사를 올린 월규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오만한 표정을 지우진 못했다.
“소인, 황상의 명을 받아 태자 전하를 데려왔습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길, 태자 전하를 경수궁에 사흘간 보내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사흘 뒤, 태자 전하께서 남길 원하시면 그렇게 할 것이고 원치 않으시면 소인이 다시 모셔가겠습니다.”
수원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사흘 동안 무얼 보여 줄 수 있겠는가? 황상은 여전히 태자를 넘기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월규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번거롭겠지만 본궁 대신 황상께 몇 마디 전해 주게. 황상께 감사드린다고, 황상의 말씀대로 사흘 후 태자께서 직접 결정을 할 수 있게 할 거라고 말일세. 또한 경수궁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돌볼 테니, 부디 마음 놓으시라고 전해 주시게.”
월규의 태도는 담담했지만, 얼핏 냉랭함이 엿보였다.
“그럼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황상께서 소인더러 언제든 이곳을 찾아와 확인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도리에 어긋난 일을 발견하거든 곧장 데려오라고도 하셨지요.”
“물론 그리해야지.”
수원상은 여전히 예를 갖췄다.
“전하를 그리 오랜 시간 돌봐 주었으니 분명 서운할 테지. 언제든 환영이니 경수궁에 자주 놀러 오게.”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준비해 왔지만 막상 수원상의 태도가 호의적이니 월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월규는 쪼그려 앉아 묵용린을 품에 안았다. 아이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한참을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던 그녀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훌쩍이던 월규는 뒤늦게 자신이 과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걸음만 걸으면 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면 그만이었다. 어찌 생사의 이별처럼 애달프게 여긴단 말인가.
소매로 눈물을 훔친 월규가 아이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이내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태자를 경수궁으로 보내 달라고 청했지만, 수원상도 그리 자신만만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도 아이를 길러 본 적 없는 몸이 아닌가?
월규가 떠나면 묵용린이 와락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이따금 두봉 끝자락을 펄럭거리다 곧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표정은 없어도,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에 수원상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수원상이 쪼그려 앉아 묵용린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리 오세요. 날 마마라 불러도 좋고, 양비라 불러도 좋습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묵용린은 갑작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머리 꽂이를 하나 빼냈다. 몇몇 궁녀들이 깜짝 놀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수원상이 그들을 제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전하, 머리 장신구가 마음에 드십니까? 전하께 선물로 드리지요.”
묵용린이 머리 꽂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입술을 옴짝댔다. 어쩐지 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뒤, 묵용린은 손을 들어 머리 꽂이를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수원상은 묵용린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그마한 옥관 옆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푸른 옥관 옆에 더해진 붉은색 머리 꽂이가 묵용린의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수원상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와, 우리 전하 정말 멋지십니다.”
묵용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사발을 바라보았다. 수원상이 가져오라 분부했던 제비집이었다.
수원상은 서둘러 그릇을 집어 들고 묵용린에게 떠먹여 주었다. 그러나 묵용린은 직접 수저를 잡았다. 한 입 한 입 입에 넣는가 싶더니 금세 그릇이 바닥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원상은 순간 백천범을 떠올렸다. 역시 친모자 사이는 다른 법인가. 먹는 모습까지 이리 똑같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