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5화
“마마, 다녀왔습니다.”
수원상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본궁이 한 번만 말할 것이니 잘 새겨듣거라.”
“예, 마마. 소인, 주의 깊게 듣겠습니다.”
수원상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궁에게는 앞으로도 아이가 없을 것이야…….”
추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마마, 아이가 없을 것이라니요. 황상께서 형식적으로 후궁을 들이신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수원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난 내 분수를 잘 알고 있다. 황상께서는 본궁이 회임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야. 그러니 본궁은 태자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추문은 그제야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황상께 청을 드리셨던 거군요. 태자 전하를 경수궁에서 기르시려고 말입니다.”
“본궁의 사심도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지.”
수원상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본궁은 태자 전하를 정말로 걱정해서 청을 드리는 게다. 어려서부터 밖을 떠돌아 갖은 고생을 겪으셨을 테니, 저리 변하셨겠지. 황상께서도 저리 마음 아파하시는데 본궁의 마음이라고 멀쩡하겠는가? 어쨌든 황상의 단 하나뿐인 사자嗣子가 아니시더냐. 태자께서 궁에 돌아왔으니 앞으로 후궁은 유명무실한 곳이 될 테고, 태자께선 반드시 대통을 이을 것이야.
다만 지금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태자께선 훗날 황상을 골치 아프게 하는 존재로 전락하시겠지. 본궁은 고통스러워하시는 황상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다. 그러니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야. 태자를 위하는 것도 있지만, 황상을 위해서, 더 나아가 동월의 미래를 위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던 추문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마마, 정말 대단하십니다.”
수원상이 손을 내저었다.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 몇 년간 심신을 다스리며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진심을 다해야 해. 본궁이 황상과 태자를 진심으로 대한다면 훗날, 그분들도 본궁을 진심으로 대해 주시지 않겠느냐.”
추문이 두 눈을 내리깔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마, 소인 이제야 마마의 뜻을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소인도 진심을 다해 태자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수원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궁이 말했던 것은 준비되었느냐? 태자의 탄일이 다가오니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
추문이 말했다.
“예, 이미 부탁해 두었습니다. 소인도 도와드릴 테니 태자 전하의 탄일 전에는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
한바탕 성을 낸 황제는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화를 식혔다. 그가 영구를 불러들였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냐?”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없습니다. 소식이 있었다면 곧장 전했을 것입니다.”
영구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황상, 신이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황제가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왕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남원, 몽달, 아님 북제?”
영구가 담담히 말했다.
“신이 모든 곳을 다니며 찾아보겠습니다. 남원에 안 계시면 몽달로, 몽달에 안 계시면 북제로 가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찾겠느냐? 짐은 더 기다릴 수 없다. 태자의 생일이 지나면 짐이 직접 남원에 다녀오겠다.”
영구가 고집스레 아뢰었다.
“군주는 단 하루도 황궁을 비워선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이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이 가야 한다. 짐이 직접 가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니.”
* * *
태자의 두 돌이 다가오자 온 궁이 떠들썩했다. 태자가 궁에 돌아온 뒤 맞이하는 첫 생일인 만큼, 성대한 연회를 열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다.
다들 어떻게 해야 황제가 만족할 연회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에 잠겼다. 월규와 기홍은 때아닌 아첨꾼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다들 두 사람을 찾아와 태자가 좋아하는 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묵용린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태자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겠는가. 화려한 두봉, 얇은 자기 병, 최근에는 옥좌도 추가되었다.
내무부는 요즘 황제보다 태자를 더 극진히 살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태자에게 새로운 놀잇감을 만들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 병을 좋아하는 태자를 위해 내무부는 병을 굽는 가마를 설치했다. 처음애는 백색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에서 시작해 나중엔 청색 안료를 바른 청화, 삼색 안료를 쓴 삼채, 다채까지 굽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형태도 다양해져 평범한 병에서 목이 긴 미인병,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자기, 매병 다양해지고 있었다. 어떤 자기든 하나같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내무부에서 자기를 보내올 때면 월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묵용린에게 한두 개만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기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곤 했다. 묵용린은 누군가의 머리를 향해 내던지는 것 외에도 단순히 그 순간의 소리를 즐기기도 했다.
상의감도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태자의 두봉에 변화를 주었다. 우선 여의관如意館의 화공에게 받은 도안대로 견본을 만들어 태자에게 보여 준 뒤, 태자가 원하는 모양을 고를 수 있게 했다. 이는 황제가 받는 것과 같은 대우였다.
이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태자의 두 돌이다. 문무백관들은 큰 경사를 위해 분주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귀한 보물들을 찾으러 다니는 이도 있었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는 이도 있었다. 물론 대나무 장난감이나 진흙을 구워 만든 장난감 호각, 호랑이 인형 같은 것들은 묵용린의 환심을 살 수 없었다. 더욱더 진귀한 것, 특출난 것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보잘것없는 선물에도 성의가 담겨 있다는 말은 신하들 사이에서 통하지 않았다. 진귀한 선물일수록 큰 성의를 의미했다. 문무백관들은 노력하는 만큼 황제가 그들을 눈여겨보리라 믿었다.
이번에는 대사면을 실시하진 않았지만, 태자의 탄일 사흘 전 성문 앞에서 부드러운 찐빵과 향긋한 죽을 나누어 주었다. 성안의 거지와 타향에서 피난 온 이들,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 등이 다들 한 끼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태자의 탄일이 밝자 묵용린은 작은 금룡이 수놓인 예복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두봉을 걸쳤다. 머리는 단정히 묶고 청옥색의 작은 관을 썼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에 묵묵한 모습이 더해지니 위풍당당하고 늠름한 기운이 풍겼다. 미간에 찍은 붉은 점만이 그가 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경사를 맞아 황제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묵용린을 바라보는 눈빛은 자애롭고 따스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후비들의 마음은 복잡할 따름이었다. 황제가 이토록 태자를 아끼는 것은 태자의 어머니가 백천범이기 때문이리라. 황제의 싸늘한 얼굴에 익숙해져 있던 후비들은 지금의 상황이 조금 낯설 지경이었다.
다만 모처럼 황제와 함께하는 자리이니 아름다움을 겨룰 기회였다. 운이 좋으면 황제의 눈에 들지도 모르기에 다들 표정을 가다듬었다.
서 태후도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빛냈다. 짙은 자색의 옷감 위로 금색 봉황이 반짝였고, 모란이 수놓인 봉포를 둘렀다. 그녀는 특별히 상의감에 부탁해 태자의 취향대로 옷자락을 길게 만들었다.
황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담청색 비단 장포 위에 권운 문양이 새겨진 새 용포를 입은 채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옅은 미소까지 띤 황제가 멋을 내니 평소와는 다른 온화한 멋이 흘렀다. 후비들은 하나같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작 황제의 시선은 묵용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지만.
궁에 돌아왔을 무렵 극도의 경계심을 표출하던 묵용린은 제법 달라져 있었다. 익숙한 이들은 꽤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지 미소를 띠는 날도 많아졌고, 암울하기만 하던 눈동자도 조금씩 빛을 되찾았다.
황제는 그런 변화들을 소중히 여겼다. 머지않아 묵용린이 다른 아이들처럼 밝고 쾌활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다리를 껴안고 자신을 부황이라 부르게 되리라 믿었다.
모든 이들의 축하 선물 중에서도 황제의 선물이 눈에 띄었다. 그는 특별히 작은 옥좌를 만들 것을 분부했다. 묵용린이 문무백관들의 축하 선물을 받을 때 앉을 옥좌였다.
묵용린은 크게 기뻐했고 얌전히 자신의 옥좌에 앉아 진지한 모습으로 신하들의 선물을 받았다.
월규는 황제의 선물이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에 조용히 기홍에게 물었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축하 절을 올리라고 분부하다니, 괜찮은 것입니까?”
월규의 말을 들은 녹하가 웃으며 대신 말했다.
“뭐 어때, 우리 전하께서 그만큼 복이 많으신 거지. 괜찮아.”
신하들은 길게 줄을 서서 한 명씩 태자에게 절을 올리곤 상서로운 말을 늘어놓으며 선물을 바쳤다. 덕분에 장내는 금세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니 묵용린의 인내심은 빠르게 바닥이 났다. 어느새 태자는 소매에서 작은 병을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신하들은 태자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떻게든 자신의 순번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별안간 묵용린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신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내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넋을 놓더니 신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 신하는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감히 거역할 수 없었기에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태자는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 서너 명의 신하를 더 불러 모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태자에게 집중되었다.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황제도 미소를 머금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오직 월규의 안색만이 어두워졌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묵용린은 옥좌에서 내려오더니 첫 번째 신하 앞에 섰다. 그 신하는 꽃이 핀 듯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손을 들어 올린 태자가 힘껏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자기 병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묵용린은 반쯤 남은 병으로 재빨리 두 번째 신하의 이마에 상처를 냈다. 날카로운 파편이 순식간에 살갗을 베었다. 미간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린아!”
황제가 큰소리로 호통쳤지만, 묵용린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묵용린은 세 번째 신하의 이마에 상처를 냈다.
아이가 한 짓이긴 해도 날카로운 조각이 살을 베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하들은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조용히 태자가 내리는 상을 받을 뿐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태자 전하의 탄일이니 무엇을 하시든 태자 전하께서 기쁘시면 그만이지. 이까짓 상처가 뭐 대수라고.’
그때, 황제가 성큼성큼 다가와 묵용린을 안아 들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운 그의 안색에 주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모두의 멍한 시선이 황제에게 꽂혔다.
일단 묵용린을 저지하긴 했으나, 황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묵용린을 안은 채, 빠르게 뒷전으로 향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 태후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황상, 태자를 때리면 안 됩니다. 아이잖습니까.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영 마마가 서 태후를 끌어당기며 조용히 타일렀다.
“노불야, 지금은 내버려 두시어요. 황상께서도 다 아실 겁니다.”
걸음을 멈춘 서 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여운 아이. 어찌 이렇게 되었을꼬.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을 당했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