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화
황제가 눈감아 주니 아랫사람들이 기회를 노린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태자를 기쁘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주인에게 좋은 하인이 되고 싶은 건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다. 태자에게 잘하면 황제가 그들을 눈여겨 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월규는 시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야에 기세등등하게 걷는 어린 몸집이 담겼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묵용린은 땅에 늘어진 옷자락이 헝클어지면 곧장 발걸음을 멈추고 소태감들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소태감들은 빠르게 달려와 화려한 두봉 끝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태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상보대전에 다다랐다. 아직 조회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전 주변은 경비도 삼엄했고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긴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호위병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도 가까이 올 수 없는 곳이었으나, 태자만큼은 예외였다. 자그마한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자 호위병들의 시선이 전부 태자에게 쏠렸다. 그뿐이었다. 누구도 태자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월규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조용히 묵용린을 불렀다.
“전하, 전하, 이리 오십시오. 이 월규 고고가 다른 재미난 곳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묵용린은 월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호위병들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종종 그들의 무릎 보호대나 옷자락을 잡아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월규는 하는 수 없이 묵용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묵용린이 있는 힘껏 월규의 손을 뿌리치더니 이를 악물며 성을 냈다. 깜짝 놀란 월규가 한 걸음 물러났다. 묵용린과 함께 한 시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의 행동을 잘 이해하는 월규였다.
어린 태자는 대부분 그녀의 말에 잘 따랐지만, 한번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이를 악물며 성을 내는 건 불만의 표현으로, 더 막으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이곳이 어느 곳인데 어찌 감히 소란을 피우게 한단 말인가?
한참을 더 돌아다니던 태자는 마침내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이내 태자의 시선은 웅장한 대전으로 향했다. 하늘처럼 높은 황권이 있는 곳이었다. 높다란 문턱에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짙은 남색 유약이 칠해진 바탕에 적힌 네 글자는 햇살을 받아 빛났다.
묵용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전을 한참 바라보더니 짤따란 다리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양쪽 끝에는 호위병들이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칼과 창을 든 우람한 덩치의 호위병들은 보기만 해도 절로 겁을 먹게 했다. 정작 묵용린은 무섭지도 않은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꿋꿋하게 계단을 올랐다.
월규는 계단 아래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태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뛰어 올라가 아이를 안고 내려오고 싶었지만, 한 발이라도 더 뗐다간 호위병들에게 내쫓길 게 뻔했다. 월규는 그저 대전 문 앞을 지키는 영구가 도와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태자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영구는 그녀의 간절한 눈길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마음이 급했던 월규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니 마침 가동이 보였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덥석 붙잡았다.
“어서 태자 전하 좀 막아 주시어요. 안아서 내려와 주십시오. 저러다 큰일 납니다.”
그도 한참 전부터 보고 있었지만, 그라고 딱히 무슨 수를 낼 수 있을까? 그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은 누구도 대전에 가까이 갈 수 없는데, 나보고 죽으러 가라는 거야?”
태자는 어느새 대전 입구에 다다랐다. 묵용린이 영구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묵용린은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높다란 문턱을 기어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간 묵용린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치켜세운 채 일어났다. 그리고 제 손으로 두봉부터 가지런히 정리한 뒤,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묵용린이 문 앞에 나타나자마자 가장 먼저 황제가 그를 발견했다.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눈 녹듯 온화하게 풀어졌다. 황제의 얼굴을 예의주시하던 신하들은 기묘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곧 그들의 시야에도 자그마한 몸집이 담겼다.
대전 양쪽으로 선 문무백관들 사이에는 진홍색 귀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묵용린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융단 위를 걸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내뿜는 기세만큼은 엄청났다. 단폐 앞까지 걸어간 묵용린은 허리를 굽히고 손발을 써서 단폐를 기어 올라갔다. 작년 남원 여제의 옥좌에 올랐던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힘겹게 단폐에 오르는 태자에게 고정되었다. 황제의 왼쪽에 서 있던 학평관은 심장이 그대로 쪼그라드는 듯했다. 태자가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 봐 붙잡아 주고 싶었지만, 대전의 분위기가 워낙 기이한 탓에 차마 나설 수 없었다. 정작 황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대신들 역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다행히 그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폐가 조금 높긴 했지만, 묵용린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올라서고 있었다. 신하들은 화려한 두봉 끝자락이 계단에 끌리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황제의 다리 밑에 도착한 묵용린은 의자 다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홀린 듯이 지켜보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황제가 아이를 번쩍 안아 다리 위에 앉히더니, 평온한 얼굴로 신하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다.
“계속 이어서 하게.”
신하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회를 진행했다. 결국 동월국 수백 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금란전의 옥좌에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조회를 주재했다.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학평관의 눈에는 가슴이 시큰거리는 장면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황제와 태자라는 지고한 신분을 떠나, 부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황제도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어린 묵용린이 지루함을 참지 못해 소란을 피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묵용린은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커다란 눈으로 신하들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황제는 조회를 하는 내내 묵용린의 옆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전히 침울한 눈망울이었지만, 그 안에 표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묵용린은 새로운 놀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퍽 즐거워했다. 그렇게 묵용린은 조회 때마다 대전을 찾아와 옥좌에 앉았다. 나이를 초월한 오만한 얼굴로 신하들의 절을 받는 건 예삿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다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태자가 조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비난하지 못했다. 황제가 태자를 저리 끔찍이 아끼는데, 누가 감히 그에 맞서려 하겠는가. 언관들조차 사석에서만 몇 마디 비판을 던지는 데 그칠 뿐이었다.
* * *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원상은 또다시 민감한 문제와 마주했다. 승덕전에 찾아간 그녀는 황제에게 다시금 태자를 기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고했다.
“황상, 신첩의 충언이 듣기 싫으시겠지만, 이대로라면 태자 전하를 더욱 망칠 것입니다. 아무리 황태자라 할지라도 금란전의 옥좌엔 지금껏 두 사람이 앉았던 적은 없습니다. 이는 천위를 경멸하는 행위이자 황권으로 장난을 치시는 것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리시니 그저 재미있다고 여기실 수도 있지만 황상께서는 내버려두시면 안 될 일…….”
그녀의 잔소리가 성가셨던 황제는 낮게 말했다.
“그 애는 태자요. 장차 옥좌를 넘겨받을 아이란 말이오. 미리 앉아 보는 게 왜 안 된다는 것이오? 짐도 개의치 않는 일이거늘 어째서 양비가 더 성화인지, 원.”
“황상, 태자 전하께서 점점 더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옥좌에 앉았지만 내일은 옥새를 들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잘못입니다…….”
“무엄하다!”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자 옆에 서 있던 학평관이 흠칫 놀랐다. 황제를 말리고 싶었지만 어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실 황제가 태자를 지나치게 아낀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분명 문제가 있었다. 월규 역시 늘 이 문제를 걱정했지만, 황제가 묵인하니 노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황제의 호통에도 수원상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우둔한 군주가 아니니 이 일로 그녀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짐의 눈에 띄지 말고 그만 물러나시오. 또 이 일로 짐을 찾아왔다간 영항에서 여동생과 함께 머물게 할 것이오.”
수원상은 더 몰아붙이는 건 모두에게 손해라는 걸 잘 알았기에 묵묵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막 입구에 다다랐을 때, 방 안에서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분노가 담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짐을 가르치려 든단 말이냐!”
학평관이 가까스로 그를 달래는 소리가 이어졌다.
“황상, 양비 마마께서는 좋은 마음에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전하를 잘 돌보지 못하실까 봐…….”
수원상은 더 엿듣지 않고 쓴웃음을 삼키며 계단을 내려왔다. 밑에서 기다리던 추문은 그녀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수원상을 부축해 가마에 탈 수 있게 도왔다.
추문은 경수궁에 돌아와 주변을 물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마마, 더는 이 일로 마음 쓰지 마시어요. 소인도 황상께서 물건을 집어 던지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인은 심장이 다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마마께서 어떻게 얻은 지위입니까? 자칫했다간 넷째 아가씨처럼 한순간에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다고 해도 마마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사옵니다. 부디 마음 쓰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가 작게 투덜거렸다.
“소인은 태자 전하께서 차라리 폐인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수원상은 곧장 몸을 틀어 추문의 뺨을 날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추문은 몸을 비틀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뉘우치는 게 우선이었기에 오열하며 황급히 말했다.
“마마,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죽어 마땅합니다. 소인이 대역죄를 저질렀습니다…….”
수원상이 몸을 파르르 떨며 낮게 호통쳤다.
“네가 내뱉은 말로 집안 전체가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알고도 그런 말을 한 것이냐?”
추문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흑… 소인은 속이 상해서 그런 것입니다. 훗날 마마께서 아기씨를 낳으시면 태자 전하의 밑에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흑흑… 소인은 마마께서 잘되시길 바라는 마음에…….”
그녀는 한쪽 뺨이 부어오른 채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덜덜 떨었다. 수원상이 차디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어나거라. 우선은 얼굴부터 씻고 오너라.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