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남문우는 그저 인사를 올린 뒤 발걸음을 돌렸다. 남류청이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도 백천범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어쨌든 그녀의 혈육이었다. 백천범만큼은 그녀처럼 살지 않기를 원했다.
그녀의 걸음이 천천히 침전에 닿았다. 백청음이 창가에 서 있었다. 늘씬한 체격의 그는 긴 머리카락을 은색의 끈으로 헐겁게 묶어 늘어트렸는데, 속세를 등진 것처럼 고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기척을 느낀 백청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창밖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남류청은 그에게 다가가 등에 가볍게 기대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경직된 느낌이 전해졌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벌려 그의 허리를 감쌌다.
“아직도 짐을 책망하는 것이지요?”
“제가 어찌 감히.”
백청음의 목소리는 담담할 뿐이었다.
“농화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청음.”
그의 등에 더욱 바짝 붙은 남류청이 느릿하게 말했다.
“짐도 농화를 친딸처럼 여겼어요. 그 애가 이렇게 되어 짐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짐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토록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는데, 다 된 일을 그르칠 순 없으니까요. 짐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전 일개 서생이니 정치는 모릅니다. 다만 욕망의 골짜기를 메우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다른 이의 것을 좇던 농화도 가르침을 받았을 테지요. 그리고 당신은…….”
백청음에게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잘 처신하세요.”
그가 그녀의 손을 풀더니 측문을 통해 밖으로 향했다.
남류청은 눈을 내리깐 채 한숨을 토해 냈다. 다들 그녀를 책망할 줄만 알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줄 몰랐다.
* * *
봄이 되었지만 서북의 추위는 가실 줄을 몰랐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면 얼얼할 정도였다. 역참으로 쏟아져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은 따스한 공기를 느끼고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무리의 인솔자는 긴 구레나룻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목청을 높였다.
“사 주인장, 좋은 물건을 가져왔네!”
위층에 있던 사앵앵이 두 눈을 반짝이며 봄 제비가 날아오듯 달려왔다.
“아이고, 호鬍 사장님 오셨습니까? 어서 앉으세요, 어서요. 물부터 좀 드셔요.”
호 사장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멀리에서 왔는데, 물을 마시러 왔겠나? 여기서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서 잔뜩 벼르고 왔지!”
사앵앵이 호탕하게 웃었다.
“술이 어디 그리 쉽게 마실 수 있는 것이던가요. 은자가 있어야지요!”
호 사장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양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꺼냈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탁자 위에 쏟아졌다.
“이 정도 물건이라면 사 주인장이 맛있는 술을 내어 줘야지!”
사앵앵은 화려한 색감의 화령 옷감과 수가 놓인 담요, 향기를 내뿜는 병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귀에 걸었다.
“그럼요, 그럼요. 호 사장님이 절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데 어찌 술을 안 내어 드릴까요.”
그녀가 서둘러 가까이에 있는 점원을 붙잡았다.
“땅광에서 좋은 술 한 병 가져다 드리거라!”
“그럼, 그 정도는 돼야지.”
호 사장이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이더니 탁자 앞에 앉았다.
“사 주인장, 이것 좀 보게. 전부 최상품이라네. 이것들을 구하느라 얼마나 사정을 하고 대접을 해야 했는데. 그래도 사 주인장의 술이라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지!”
사앵앵은 물건을 하나하나 집어 확인했다. 사내의 말처럼 전부 최상품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여우처럼 웃었지만, 겉으로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괜찮네요. 지난번 것들과 비슷하군요.”
“전혀 다르지.”
호 사장이 두꺼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번에 가져온 것들은 그것보다 더 최상…….”
“이게 뭐예요?”
사앵앵이 그의 말을 끊고 작은 족자를 들어 펼쳤다.
호 사장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그건 주인장한테 주려는 게 아니라 내 거라네. 남원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초상화를 바라보던 사앵앵의 안색이 확 달라지더니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녀의 날카로운 표정에 깜짝 놀란 호 사장이 말을 더듬었다.
“나, 남원에서 제일가는 미녀래도.”
계산대에 서 있던 사장풍이 주판을 놓던 손을 멈췄다. 일찍부터 사앵앵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그녀의 표정이 변한 걸 알아차린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뭔데 그리 소란스럽게…….”
초상화를 바라본 사장풍은 순간 말문을 잃고 말았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남제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 *
태자 묵용린은 여전히 말문이 트이지 않았지만, 이제 웃을 줄 알았다. 물론 묵용린이 깔깔 웃을 땐 누군가 고통스러워야만 했다. 붉은 피를 봐야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적잖이 심란해진 월규는 책임을 위중청에게 떠넘겼다. 그녀가 식식거리며 그를 원망했다.
“참 잘하셨습니다. 멀쩡한 아이를 그 모양으로 만들다니요.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어떤 성격이셨는데요?”
위중청이 냉랭한 눈빛을 보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이 괴상한 버릇은 언젠가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뒤늦게 아는 것보단 일찍 알아차린 게 다행이라고요. 아직은 어리니 분명 무슨 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월규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수로요? 입도 떼려 하지 않으시고 함께 무얼 하려고 하지도 않으시는데도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무슨 충격을 받으신 게…….”
“아무래도가 아니라 확실합니다.”
위중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홀로 밖을 떠돌았으니,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겠습니다.”
월규의 눈시울이 단번에 붉어지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예전에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특히 까만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을 때면 가슴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눈망울은 먹구름이 낀 듯 암담하고, 이전의 맑은 광채는 씻겨 나가 버린 듯했다. 종종 보이는 웃음은 누군가의 피를 봐야만 나오는 섬뜩한 웃음에 지나지 않았다.
월규의 눈물을 본 위중청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나쁜 시기는 지나갔으니 전하께서도 점점 좋아지실 겁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던 월규는 어깨를 토닥이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누가 저한테 손대라고 했어요?”
위중청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귀까지 빨개졌다. 그가 멋쩍게 말했다.
“그저 위로를 해 주려 했던 것뿐입니다. 설마 제가 나쁜 마음으로 그랬겠습니까? 함께한 정이 몇 년인데요.”
“함께한 정이라뇨, 저는 왜 모르는 일일까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월규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가동이 묵용린을 돌봐 주겠다며 나섰지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가 봐야 했다.
승덕전 밖에 다다랐을 때, 깔깔거리는 묵용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해맑은 소리였다. 그러나 월규는 등을 타고 엄습하는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묵용린의 웃음은 누군가 다쳤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니 안에는 소태감 몇 명이 일렬로 서 있었다. 다들 손에 작은 자기 병을 하나씩 쥐고 자신의 이마에 내리찍고 있었다. 얇은 자기 조각이라 깊게 베이지 않았지만, 소태감들은 그걸로 제 이마를 긁어 일부러 피가 나게 했다. 피는 적게 나도 이마에 불그죽죽한 상처가 나니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묵용린은 소태감들의 모습에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가동이 손을 허리에 얹은 채 함께 웃고 있었다. 월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곧장 소리를 질렀다.
“대체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소태감들은 평소에도 그녀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곧바로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월규가 날카롭게 물었다.
“누가 시킨 짓인가? 가 대인이십니까?”
가동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 애들이 자발적으로 한 거지. 괜찮은데, 왜. 전하께서도 저리 기뻐하시…….”
“정말 미치셨습니까!”
월규는 직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태자 전하께선 뭘 모르신다고 해도, 가 대인은 안 되지요.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가동이 눈을 부릅떴다. 감히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태자의 보모라고 해서 본인이 대단한 신분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가동이 곧장 맞받아쳤다.
“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 황상께서 태자 전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게다가 억지로 시킨 일도 아니고 저들이 나서서 한 일이거든. 피 조금 나는 게 뭐 어때서, 약 한 사발 먹고 기운 차리면 그만인데.”
“그럼 가 대인은 왜 하지 않으신 건데요?”
“나는…….”
가동이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은 뒤가 켕겼지만 그래도 지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뭐 피를 안 흘려본 사람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생긴 상처가 뱃가죽에 한가득이라고. 이 정도 피 가지고 참나…….”
반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월규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 보니, 어느새 묵용린이 다가와 있었다.
웃음기를 거둔 그의 얼굴은 황제와 꼭 닮아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린 왕비의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눈망울이 자신을 향하자 월규의 마음이 다시금 녹아내렸다. 월규는 말을 삼키고 곧장 태자와 함께 가동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가동은 월규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듯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소태감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약들 발라, 이게 뭐 그리 보기 좋은 일이라고!”
사실 월규도 가동의 마음을 이해할 순 있었다. 모두가 묵용린을 이렇게나 아끼는 건 태자라는 신분을 떠나 어머니 없이 자라는 묵용린이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용린이 원하는 것이라면 조건을 가리지 않고 다 해 주려고 했다.
다만 이대로라면 멀쩡한 아이도 삐뚤어질 게 뻔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어떻게든 고쳐 놔야 했다. 월규는 백천범 같은 어머니를 둔 이상, 묵용린은 절대 나쁜 사람이 될 리 없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