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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11)화 (510/1,192)

제511화

며칠간 묵용린을 유심히 관찰하던 황제는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이가 곧 두 살이 되는데도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사실 두 살배기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묵용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묵용린은 말은커녕 누군가를 부르거나 감정을 표현하려 들지도 않았다. 평소엔 한없이 조용하다 이따금 성질을 부릴 때만 칭얼거리곤 했다.

점점 걱정이 커진 황제는 위중청을 불러 묵용린을 살펴보게 했다.

잠시 묵용린을 살핀 위중청이 그를 안심시켰다.

“황상, 말문이 늦게 트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세 살이나 네 살이 되어야 말을 하는 아이들도 있지요. 신이 보기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황제가 그를 흘겨보았다.

“저 애가 평범한 아이로 보이느냐? 태생적으로 총명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말문이 늦게 트일 리 없다. 오늘부터 휴가를 마치고 궁에 머물면서 태자를 지켜보거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간… 의원직도 거기서 끝일 테니.”

위중청은 그만 울고 싶었다. 자신은 신선이 아니라 한 명의 의원에 불과했다. 아이의 말문을 어떻게 트이게 한단 말인가? 차라리 의원을 그만두는 게 이로울지도 몰랐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위중청의 시선은 묵용린에게 향했다. 그가 사맥으로 맥을 짚어 발견했고,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의 진맥을 거친 아이였다. 자연히 묵용린을 향한 마음은 그도 가동 무리에 뒤지지 않았다.

사실 묵용린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그도 예의주시하던 일이었다. 특히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신경이 쓰였다.

뛰어난 의술을 익힌 만큼 그는 지식의 폭도 넓었다. 그가 진단한 바로는 묵용린의 몸 상태는 지극히 건강했다. 이 문제는 분명 심리적인 부분이리라.

마음의 병은 약으로 치료하기 힘드니 천천히 유도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월규를 찾아가 묵용린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함께 묵용린이 말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월규는 위중청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묵용린을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묵용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녀였으니.

월규는 묵용린의 취향을 몇 가지 말해 주었다. 묵용린은 황궁 곳곳을 돌아다니기를 즐겼고, 두봉을 입는 것과 각종 맛있는 음식들을 좋아했다. 반면 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걸 싫어했고, 장합전에 가는 것을 꺼렸다.

위중청은 음식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기홍에게 음식이 든 접시를 받아 묵묵히 가지고 있었다. 묵용린이 주라는 말을 할 때까지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묵용린은 음식을 보자 조급해진 나머지 까치발을 들며 손을 뻗었다.

위중청은 진지하게 묵용린을 내려다보며 가르쳤다.

“전하, ‘줘’라고 해 보십시오. 그럼 바로 드리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신의 입 모양을 잘 보십시오. 줘…….”

손을 뻗어도 주지 않자 묵용린은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위중청이 허리를 숙였고, 묵용린이 재빨리 팔을 휘저었다. 이윽고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위 의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월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위 의원이 허리를 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한 번으로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조바심이 난 묵용린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꼭 화가 난 어린 맹수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월규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되었습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천천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위 의원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묵용린이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보였다. 위중청의 손을 붙잡더니 있는 힘껏 깨무는 게 아닌가. 자그마한 이였지만 다 자라난 탓에 제법 단단해, 위중청은 작은 못이 손등에 박힌 줄만 알았다.

깜짝 놀란 월규가 달려왔다.

“태자 전하, 이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면 안 됩니다. 어서 놓으시어요. 착하지요. 어서요, 전하. 놓으십…….”

그때, 묵용린의 조그만 입가에 붉은 피가 선명한 색으로 도드라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월규는 고개를 들어 위중청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피 맛이 나자 묵용린도 입을 벌렸다. 이내 위중청의 손등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태자는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소태감들이 광대나 원숭이 분장을 하고 난리를 쳐도 묵용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쁨도, 슬픔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보이던 태자였다. 그런데 조금 기괴한 상황이긴 해도, 드디어 웃음을 보이지 않았는가. 다른 아이들은 피를 보면 놀라 울기 바쁜데, 웃음을 터뜨리다니…….

위 의원이 큰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어쨌든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손 한 번 깨물린 대가로 천금 같은 값어치를 얻었으니 위중청도 그리 개의치 않았다. 탁자 위에 가득 쌓인 하사품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다만 태자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일은 차도가 없었다. 조만간 하사품을 반납해야 할듯싶었다.

결국 위중청은 또 다른 문제에 접근하기로 했다. 묵용린은 왜 장합전을 그토록 싫어할까? 그는 어떻게든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 싶었다.

볕 좋은 어느 날, 그는 월규와 묵용린을 데리고 장합전으로 향했다. 태자는 가마에 타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장합전까지는 모두 걸어야 했다. 태자는 여느 때처럼 두봉을 걸치고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월규의 옆에서 당당한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오른 뒤, 월규가 묵용린을 들어 올려 문턱을 넘었다.

땅에 발이 닿은 순간, 묵용린은 장합전에서 나가려고 했다. 위중청이 월규를 바라보았다. 월규는 두 손을 펼치더니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합전에 올 때마다 이런 식이었다. 도착하기만 하면 묵용린은 곧바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위중청이 급히 묵용린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리곤 작은 몸집을 돌려세운 뒤 앞으로 밀었다. 물론 묵용린은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었다.

위중청이 다시 한번 그를 가르쳤다.

“‘아니’라고 해 보십시오. ‘아니’라는 말만 하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전하. 신처럼 말씀해 보십시오. 아니…….”

위중청은 비교적 쉬운 발음인지라 태자가 곧장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태자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두를 뿐이었다. 한 번 당했던 만큼 그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손이 빗나가자 묵용린이 고개를 들었다. 위중청은 묵용린과 칠 척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태자의 눈에 담긴 괴팍한 기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고작 두살배기가, 이 상황에 엄청난 분노와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별안간 심장이 쿵쿵 뛴 위중청은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서 태후가 궁녀와 태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서 태후는 묵용린을 발견하곤 곧바로 우리 아가가 왔냐며 목청을 높였다.

그 다정한 외침을 듣자마자, 묵용린은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위중청에게 힘껏 내던졌다. 위중청은 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피하고 말았다. 자기 찻잔은 결국 위중청을 지나 서 태후의 머리에 명중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찻잔은 산산조각이 났고, 붉은 가닥이 천천히 서 태후의 눈썹을 따라 흘러내렸다.

서 태후의 부상에 극도로 긴장한 이들이 서둘러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위중청과 월규만이 태자 묵용린에게 시선을 두었다. 묵용린의 작은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남원 황궁에는 남문우와 여제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폐하, 신의 질문에 답변하기 어려우십니까?”

남문우의 예리한 눈빛이 남류청을 향했다.

“어째서 계획대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남류청의 고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짐에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인가?”

“부디 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동월 황실의 혈통을 뒤흔들면 안 된단 말이더냐?”

남류청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묵용감이 곧장 알아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폐하, 저쪽에서 의심이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그런 방법을 쓰셨습니까?”

“천하에 닮은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의심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남류청이 추궁하는 듯한 눈빛으로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진짜 묵용린을 보냈지 않았는가. 남 장군은 어째서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지? 설마,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건 아니겠지?”

“신은 그저 인간이라면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남문우는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묵용린은 폐하의 외손자입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그 애에게 손을 쓰려 하신 것입니까?”

“…….”

그녀는 정말 묵용린을 죽일 계획이었다. 외손자면 또 어떠한가. 친딸마저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을. 게다가 성도 다른 손자였다.

처음엔 그녀도 아이를 동월국에 보낼 생각이었다. 어쨌든 어린아이니 큰 위협이 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잡이 이후,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 어린 게 벌써 옥좌에 오르려 하다니, 장차 엄청난 인물이 되어 그녀의 천하를 빼앗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가짜 묵용린을 보낸 터였다. 묵용감이 알아차리는 바람에 진짜 묵용린을 보내야 했지만. 지금은 묵용감의 판세가 우위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길 바랄 수밖에.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모든 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 이제는 물러날 수도,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하늘의 뜻보다 자신을 믿었다.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모두 극복했고, 결국 동월을 거쳐 남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지금, 딱 한 가지가 부족했다. 어쨌든 미끼를 던져 두었으니 묵용감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리 만무했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동월의 황제가 그물에 걸릴 그 날만을.

“천범이는 요즘 어떤가?”

남류청이 화제를 돌렸다.

“잘 지냅니다.”

남문우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농화가 소란을 피운 뒤로 조금 의심을 하고는 있지만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꼭 자신의 모성애를 표범에게 쏟는 것 같습니다. 그때 대제사가 제안한 게 옳았습니다. 의지할 대상이 생기면 금방 편안해질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류청이 창가 앞으로 걸어갔다. 달콤한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봄은 무언가를 실행하기에 정말 좋은 계절이었다. 생기가 넘치는 모습에 절로 희망이 생겼다.

“때가 되었구나.”

그녀가 몸을 돌려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전하에게 소식을 전하게. 이쪽에서도 서두르고.”

남문우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전 그 애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장군이 그 애 곁에 있지 않은가.”

남류청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짐은 그 애가 행복할 거라고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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