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10)화 (509/1,192)

제510화

예친왕은 천길 낭떠러지에 선 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허겁지겁 기홍에게 달려 왔지만 가동이 앞을 가로막았다.

“앉으십시오. 황상께서 계시잖습니까.”

담담한 말투였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감히 황제 앞에서 오만하게 굴지 말라는 경고였다.

예친왕은 씨근거리며 기홍에게 물었다.

“영구를 따르겠다니, 한나절 만에 홀딱 반하기라도 한 것이오? 내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소. 얼굴도 저자보단 못하지. 그러나 그만큼 그대를 아껴 줄 자신이 있소. 얼굴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저택에 오면 왕비가 되는 것이오.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람을 거느리며 살 수 있을 텐데……”

그때, 가동이 그의 말을 끊었다.

“예친왕, 예친왕께서는 친왕이시니 영구가 부족해 보이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영구도 2품 고관입니다. 영구에게 시집을 가면 기홍은 자연스레 안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왕부로 들어가면 서비의 신분이니, 윗사람들의 압박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무릇 여인이라면 누구든 영구를 고르겠지요. 예친왕께서도 저들을 인정해 주십시오. 한눈에 봐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까? 평소 예친왕께서는 스스로를 군자라 칭하지 않으셨습니까. 군자에게는 다른 이를 도와 뜻을 이뤄 주는 미덕이 있는 법이지요.”

예친왕은 가동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가동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기홍이 영구에게 시집을 가면 집안의 안주인이 되지만 그에게 오면 첩에 불과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불리한데, 나이며 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영구도 2품 관원인 데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니 녹봉도 적지 않았고, 황제가 자주 상을 내리는 만큼 부귀영화도 남부럽지 않게 누릴 수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니 정말 그에게 시집을 오는 게 더 손해였다.

황제는 편안한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건 그의 책임도 있었다. 그때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도 영구와 기홍은 진작에 혼사를 치렀을 사이였다. 이토록 먼 길을 돌고 돌았지만, 마침내 결실을 맺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황제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황제는 많은 이들 중에서 오직 기홍의 뜻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예친왕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 혼수를 해 주었듯 영구에게 시집을 가겠다면 그 뜻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기홍과 녹하, 월규는 모두 그녀의 사람이었기에 한 명 한 명에게 정착할 곳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가 영구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영구처럼 심지가 굳건한 이는 몰아세우지 않으면 변할 줄 몰랐다. 그 때문에 황제는 일부러 영구에게 예물을 가져다주라는 명을 내렸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와 혼사를 올리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다면, 절대 보고만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였다.

황제가 상황을 정리하듯 목청을 가다듬었다.

“예친왕, 가동의 말이 옳네. 군자에게는 남을 돕는 미덕이 있는 법이니, 넘어가 주시게. 훗날 저 둘이 자네의 미담을 전할 걸세.”

“아니 되옵니다, 황상.”

예친왕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항변했다.

“신은 기홍을 팔인교에 태워 저택까지 데려왔습니다. 한데 다른 이에게 신부를 넘기라니요? 게다가 신은 기홍과 절까지 올렸습니다. 저택에 있던 모든 이들이 증인입니다…….”

영구가 질세라 입을 열었다.

“황상, 신도 기홍과 혼사를 올렸습니다.”

“내가 먼저 기홍과 혼사를 올렸대도. 사람이 전후를 따져야지…….”

“황상, 신과 기홍은 합방도 하였습니다.”

“아니…….”

그 말이 예친왕의 머리를 내리치기라도 한 듯, 그가 휘청거리지 않으려 애썼다. 예친왕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배, 백주 대, 대낮에 하, 합, 합방을…….”

황제가 슬쩍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예친왕도 젊은 시절을 겪었잖소. 마땅히 이해해 주어야지.”

“…….”

이해는 개뿔!

기홍은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있었다. 조금 흐트러진 귀밑머리가 붉어진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예친왕은 기홍을 보면 볼수록 큰 손해를 입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참한 여인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한편 가동은 터져 나오는 웃음에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역시 우리 영구가 일을 참 잘한다니까. 속전속결이야. 그래, 내가 대신 돈을 갚아 줬으니 이자는 됐고 원금만 갚아.”

영구가 그를 흘겨보았다.

“혼사를 올렸으니 축의금 대신 받은 걸로 하지요.”

“…….”

축의금은 축의금이지. 술, 옷 간식, 화촉을 왜 내가 사야 하는데? 내가 네 아버지도 아니고……. 기가 차면서도 어쩐지 가동은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 * *

황제는 해를 넘기기 전에 묵용린을 정식으로 태자로 세우길 원했다. 결국 황제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태묘太廟에서 묵용린의 태자 책봉식이 치러졌다.

후궁의 비들과 황실 종친, 문무백관, 궁 안의 호위병과 태감, 궁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파가 한자리에 모이니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태자를 보며 행복해했고, 황제 또한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태자가 조금만 움직여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묵용린은 금빛의 반짝이는 두봉을 입고 있었다. 경사를 맞이하는 만큼 녹하가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만든 옷이었다. 두꺼운 솜옷을 입으려 하지 않는 통에 옷감에 일일이 얇은 솜을 덧대고 내의마저 두 겹으로 만든 노고가 숨어 있었다.

덕분에 얇게 보여도 아주 따뜻한 데다, 묵용린의 마음에도 쏙 든 듯 끊임없이 옷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웃음은 없어도,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길시가 되자, 월규는 묵용린에게 황제 앞으로 걸어가 봉작을 받으라고 알려 주었다. 묵용린은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더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내 옷자락이 길게 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묵용린이 그 자리에 서서 버티기 시작했다.

묵용린은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꽁무니처럼 길게 끌리는 걸 좋아했다. 옷자락이 바닥을 쓸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누구보다 위풍당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입은 두봉은 바닥에 끌리지 않았다. 행여 옷자락을 밟고 넘어질까 봐 발목에 맞춰 재단한 배려가, 묵용린의 심사를 망쳐 놓았다.

누구도 이런 일에 묵용린이 성질을 부릴 줄은 몰랐기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묵용린은 허리를 굽힌 채 옷자락을 힘껏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러 댔다.

서둘러 태자에게 달려간 월규가 달래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월규에게 물었다.

“태자가 어찌 이러느냐?”

월규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옷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아 이러시는 것입니다.”

“…….”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황제는 곧장 녹하를 불렀다.

“방법을 궁리해서 태자에게 긴 옷자락을 만들어 주거라.”

결국 녹하는 궁녀 두 명과 함께 즉석에서 태자의 옷자락을 길게 만들어 주었다. 책봉식에 온 손님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건국 이래, 그 어떤 의식에서도 볼 수 없던 상황에 다들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린 묵용린의 고집은 이해가 됐지만, 황제가 묵묵히 들어주는 모습은 뜻밖이었던 터였다. 이로써 황제가 묵용린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다들 깨닫는 순간이었다.

군중 속에 서 있던 수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비들과 함께 있던 수원상도 눈을 빛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긴 꽁무니가 생기니 태자의 고집도 가라앉았다. 묵용린이 짤따란 팔로 두봉 끝을 힘껏 휘날리자 꼭 작은 천하를 군림하는 어린 군주처럼 보였다. 다들 그 모습에 실소를 머금었다. 묵용린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주변을 슬쩍 훑더니 이내 묵용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작은 아이는 굳센 걸음을 당차게 내딛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작은 몸집에 고정되었다. 금빛 찬란한 두봉을 걸친 묵용린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당당히 나아갔다. 제법 제왕의 풍모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맞은편에서 아들을 바라보는 묵용감은 만감이 교차했다. 묵용린은 그의 목숨과 맞닿은 존재이자 동월국의 희망이었다. 아이가 진짜 아들임을 확인한 뒤에도 그를 곧장 태자로 세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이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 작은 아이가 다가오는 이 순간, 황제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아들이 더 있다 해도 황태자에 가장 걸맞은 아이는 묵용린이다. 진지하고 굳건한 걸음걸이는 자신이 유일한 적임자임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 * *

태자로 책봉된 묵용린은 하룻밤 사이에 더 커 버린 것처럼 혼자 힘으로 걸으려고 애썼다. 밖에 나갈 땐 늘 위풍당당해 보이는 두봉을 걸쳤고, 기다란 꽁무니를 늘어뜨리는 건 필수였다.

덕분에 궁녀와 태감들은 황궁을 누비는 자그마한 몸집과 기다란 꽁무니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곁에는 월규와 기홍, 가동과 몇몇 호위병도 빠지지 않았다.

녹하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녀도 온종일 태자와 황궁 곳곳을 거닐고 싶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묵용린이 며칠 간격으로 두봉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옷감을 골라 옷을 만들어 주었지만, 모래나 풀잎, 거친 돌부리에 쓸리면 예쁜 꽁무니는 쉽게 헤지고 말았다. 상의감은 별도의 인원을 선발하여 태자의 옷을 짓는 부서를 만들었고, 이곳의 모든 일은 녹하가 주관했다.

황궁에 웃음소리가 넘쳐 나는 가운데, 음력 새해가 성큼 다가왔다. 처량하고 스산했던 작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연휴를 맞이하여 황궁도 즐겁고 한가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황제는 매일을 묵용린과 함께했다. 묵용린이 어디를 가든 따라갔고 무얼 하고 놀든 옆을 지켰다. 두 사람은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밖을 거닐었다. 황제는 걸을 때면 뒷짐을 졌는데, 묵용린은 어느샌가 그 모습을 따라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뒤따르던 월규와 기홍은 생김새부터 기품, 분위기까지 똑 닮은 부자는 세상에 저 둘이 유일하리라 생각했다.

처음엔 선명한 거리감을 느끼던 두 사람은, 어느새 누구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묵용린을 힐끔 곁눈질하던 묵용감은 늘어뜨린 손을 조심스레 아이의 팔에 가져갔다. 묵용린이 손을 때릴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묵용린은 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해야 했다. 특히 후궁의 비빈들이 그랬다. 묵용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만지다 보면 늘 사달이 났다. 묵용린이 힘껏 팔을 휘둘렀기 때문인데, 손이나 팔을 맞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따금 퍽 소리가 날 만큼 얼굴을 맞을 때의 기분이란, 직접 맞지 않은 이상 절대 모르리라.

그러니 묵용감이 다소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심스레 내뻗은 손이 닿아도 묵용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아이의 손을 감싸 쥐는 데 성공하자 황제의 입가에 곧장 환한 미소가 번졌다.

묵용린의 손은 조그맣고 통통한 데다 부드러웠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다 보면 황제는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꼭 아이의 손이 아니라 백천범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한 착각에. 그는 다시 온전해진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근본적인 슬픔을 해결할 수 없었던 그였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따스함이 차올랐다. 적막했던 그의 공간에 작은 새가 날아든 듯한 기쁨이 찾아오니, 부자간의 감정도 빠르게 깊어져 갔다.

침소에 들 때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먼저 잠든 묵용린 옆에 묵용감이 누우면 아이는 곧장 눈을 뜨곤 했다. 조금 흐린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알 수 없는 질책이 담겨 있어 묵용감에게 묘한 거리감을 두곤 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가 침대에 누우면 묵용린은 곧장 그의 품으로 굴러와 잠들었다. 그때마다 강인했던 황제의 마음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