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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9)화 (508/1,192)

제509화

가동이 명을 받들고 영구를 찾기 위해 궁을 나섰을 때, 성안 순포 오영관청에 누군가 찾아왔다.

알고 보니 영구에게 외상을 해 준 가게 주인들이 신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황제의 호위 대인은 무슨, 그저 사기꾼이겠지. 다만 그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던 탓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건을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더욱이 전부 값비싼 물건만 골라갔으니 그들은 당연히 관청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임안성의 구문제독은 예전 사장풍의 부장副將 공춘홍이었다. 사장풍이 묵용감을 따라나선 후, 그가 구문제독의 자리에 올랐다. 혼란스러운 일을 겪으며 관원들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는 지금껏 그 자리를 지켰다.

신고를 하러 온 자는 총 네 무리였다. 하나같이 영 대인을 사칭한 강호의 사기꾼을 봤다며 아우성을 쳤다. 각각 술을 파는 사람, 간식을 파는 사람, 옷을 파는 사람, 향촉을 파는 사람이었다.

공춘홍이 그들에게 물었다.

“어찌 그자가 강호의 사기꾼이라고 확신한단 말이오?”

그들이 입을 모았다.

“호위 대인이 땡전 한 푼 없겠습니까?”

“호위 대인이 그리 억지를 쓰시겠습니까?”

“호위 대인이 직접 물건을 사러 오셨겠습니까?”

“호위 대인이 까닭도 없이 이런 물건을 사셨겠습니까?”

“…….”

공춘홍은 적잖은 두통을 느꼈다. 그가 아는 영구는 평소에 그리 많은 은냥을 들고 다니지 않았고, 확신을 가지면 곧바로 일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일도 없으니 물건을 산다면 본인이 직접 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물건을 외상까지 해가며 손에 넣은 이유는… 사실 공춘홍도 조금 전 소식을 접한 터라 짐작은 되었다. 예친왕의 신부를 빼앗아 달아났으니 그런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황실 귀족을 사칭하는 일은 많아도 호위 무사를 사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혼사에 필요한 물건을 훔쳐 가다니,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공춘홍은 사칭이 아니라 영구 본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예친왕이 신고를 하러 오지 않는 이상, 그는 모르는 일로 해 둘 생각이었다. 장담하건대, 그가 있는 순포 오영관청 뿐만 아니라 임안성의 어느 관청도 영 대인의 사건을 담당하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가 상인들에게 물었다.

“만약 그 사람이 정말 호위 대인이라면, 그래도 신고하겠소?”

서로 눈치를 보던 상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정말 호위 대인이시라면 신고라니요, 외상값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대인께 드리는 작은 성의로 삼겠습니다.”

나머지 상인들도 앞다투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영 대인께서는 황상의 최측근이 아닙니까. 저희 가게에 영 대인께서 와 주셨다면 그야말로 영광 중의 영광이지요. 그런 분께 돈을 받다니요.”

“그럼 돌아들 가시오.”

공춘홍이 손을 내저었다.

“본관이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그자는 강호의 사기꾼이 아니라 영 대인이 맞소. 영 대인께서 써 준 차용증을 잘 갖고 있으면 나중에 은자를 갚으러 가실 것이오.”

상인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리 나리의 말이니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로 영 대인이 아니라면 그때 다시 찾아와도 늦지 않으리라.

궁을 나선 가동은 가장 먼저 순포 오영관청을 찾았다. 상인들이 신고를 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한참을 웃더니 부하를 보내 황제에게 소식을 전했다.

황제도 그 소식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토록 과감하고 빠른 걸 보니, 의심의 여지 없이 영구의 짓이었다.

반면 예친왕은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분개하며 말했다.

“황상, 이번만큼은 용서해 주시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가게에서 물건을 약탈하다니, 도적들이 하는 짓과 어디가 다르단 말입니까? 한 집도 아니고 네 집씩이나 말입니다. 동월의 법도대로 붙잡아 참형을 내려야 합니다!”

황제가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차용증을 쓰고 지장도 찍었다는데 약탈이라니.”

“약탈이 아니라면 어찌 상인들이 신고를 하러 오겠습니까? 강제로 앗아간 게 틀림없습니다. 거짓 영수증을 끊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원래 돈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애라네.”

“황상, 어찌 그리 옹호만 하십니까? 제 성은 묵용씨입니다. 우리 묵용씨 가문에 불미스럽고 심각한 사달이 벌어진 겁니다. 저는 낯이 뜨거워 들고 다닐 수가 없는데 황상께서는 어찌 그리 남 일처럼 말씀하십니까.”

“자네의 억울함은 짐도 잘 아니 조급해하지 말게. 가동이 영구를 데려오면 반드시 해결해 주겠네.”

넓은 임안성에서 단시간에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무엇보다 일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의 가 대인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는 공춘홍에게 네 가게의 주소를 물어보았다. 그리곤 그 주위를 탐문하니 영구가 묵은 객잔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객잔에 들어섰을 때, 영구와 기홍은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세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었을까. 가동이 얼굴을 굳힌 채 매섭게 호통쳤다.

“여봐라, 범인을 당장 포박하거라!”

그가 데려온 이들은 궁의 호위병이라 다들 영구를 알고 있었다. 호위병들은 약속이나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동이 언짢은 얼굴로 호위병들을 흘겨보았다.

“본 대인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냐? 이 정도도 못 맞춰 주고?”

호위병들이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구마저도 미소를 지었다.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가동은 계속 얼굴을 굳히며 연기를 이어 갔다.

“황상의 명을 받들어 널 잡으러 왔다.”

영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황상께서도 아셨습니까?”

“예친왕께서 황상을 찾아와 전부 다 털어놓으셨다. 범인, 순순히 따라오거라.”

가동이 슬쩍 갑옷을 털어 보였다.

은색 갑옷이 쓸리는 소리에 객잔 주인장과 점원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쩌다 저런 범인을 받아서는……. 이러다 그들까지 연루되면 어찌한단 말인가! 정작 범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지만. 보아하니 관리 나리보다 더 포악한 사람인 듯했다.

영구는 기홍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한 호위병에게 분부를 내렸다.

“내 말을 가져오너라.”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마차도 하나 준비하거라.”

호위병은 깍듯하게 대답한 후 밖으로 향했다.

“아니, 범인 주제에 어찌 거드름을 피운단 말이냐? 거기 서거라. 본 대인과 얘기 좀 하자…….”

가동이 포악한 목소리로 떠들며 영구를 뒤쫓았다.

주인장과 점원은 서로 얼떨떨한 눈빛만 주고받았다. 저리 허세를 부리는 범인이 어디 있을까? 대체 저자가 어딜 봐서 범인이란 말인가.

영구는 입구에 나와서야 가동을 돌아보았다.

“돈 좀 있으십니까? 객잔에 값을 치러 주십시오.”

가동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묵은 건 넌데, 왜 나더러 돈을 내라는 거야?”

“돈을 안 가져와서 그렇습니다. 아, 다른 가게에도 외상을 했으니 한 번에 내주십시오.”

“네가 진 빚은 내 알 바 아니지. 차용증도 써 줬다며. 몰랐지? 다들 관청에 널 고발했어.”

“그자들이 차용증은 안 보여 줬습니까? 형님 이름을 적어 놨는데.”

“…….”

주변에 있던 호위병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 * *

예친왕은 오늘 하루가 꼭 일 년처럼 느껴졌다. 한나절을 황제와 앉아 있으면서 차를 네 잔이나 마셨고, 어선도 함께 먹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두어 번 내비쳤지만, 그때마다 황제는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로 그를 붙들었다.

예친왕은 조급했던 게 아니라 소변이 너무 급했다. 처음엔 격분한 마음에 궁을 찾아왔지만,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문무백관은 말할 것도 없고, 묵용씨 친왕들 중에서도 이번 황제와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서 소변이 마렵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묵용감이 초왕이던 시절에도 다들 그를 무서워했다. 그땐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고 가슴을 걷어찼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 지금, 전과 같이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황제는 반 시진 가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덕분에 예친왕도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귀마저도 억눌러야 했다. 혹여나 참지 못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 날엔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렀다는 죄명으로 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는 이따금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동이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었다.

예친왕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태감이 문 앞에 다가와 고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가 대인이 영 대인과 기홍 고고를 데려왔습니다.”

그의 말에 예친왕은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이 정말 영구와 기홍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예친왕은 매서운 눈으로 영구를 노려보고는 다시 온화한 얼굴로 기홍을 바라보았다. 오늘 그의 새신부가 몹시 놀랐을 테니, 잘 달래 줄 생각이었다. 사실 예친왕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영구가 신부를 데려갈 때까지 어찌 지켜만 보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곧장 영구의 앞길을 막아서야 했다. 저택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영구 하나 못 막았을까?

기홍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예친왕은 자꾸만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구에게 한나절이나 납치를 당했었으니 어쨌든 그녀의 명성에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었다. 그의 뒤에는 황제가 있지 않은가. 황제가 잘 해결해 주면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게 귀한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 주면 천천히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터였다.

“영구야.”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친왕의 신부를 네가 빼앗아 갔다던데, 사실이더냐?”

영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의젓한 태도였다.

“신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친왕은 당장이라도 영구를 흠씬 두드려 패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 앞에서 방만하게 굴 수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영구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황상, 저것 좀 보십시오. 이리 명확한 사실을 인정도 하지 않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기다리라는 뜻을 전했다. 그가 기홍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홍아, 네가 말해 보거라. 누구를 따르고 싶더냐? 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려 주겠다.”

예친왕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를 따르겠다고 할 터. 왕비가 될 수도 있는데 무엇 하러 일개 호위무사에게 시집을 간단 말인가?

고개를 숙인 기홍에게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상께 아룁니다. 소인은 영 대인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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