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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8)화 (507/1,192)

제508화

예친왕이 황제에게 갔을 때, 영구는 기홍과 함께 큰길가에 도착했다. 혼례복을 입은 기홍과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사내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기홍이 절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작스레 그의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른 장작에 불씨가 옮겨붙듯 맹렬하게 타오른 불길은 그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다. 그는 단숨에 기홍의 팔을 잡았고, 자신과 함께 갈 것인지 물었다.

귓가에 울리던 말소리가 어찌나 급박한지 꼭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뜻밖에도, 기홍은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몇 년 전 그날 밤처럼 고민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주었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말에 태우고 무작정 앞으로 달리다 이곳에 도착했다.

줄곧 궁 안에서만 지냈던 터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달린다 한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쏟아지는 시선들에 정신을 되찾았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기홍까지 안 좋은 시선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말을 몰고 앞으로 향했다. 이윽고 길가에 있는 한 객잔 앞에 멈춰 서서 기홍을 품에 안고 말에서 내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영구는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는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이 편안함에 물들었다.

두 사람은 방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영구는 기홍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후회합니까?”

기홍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후회할 것도 없었다. 영구가 절을 올리던 그녀를 붙잡고 갑작스레 말을 건 순간, 그녀는 몇 해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까.

그때도 영구는 살짝 붉어진 눈으로 물었다. 그녀가 거절하면 그는 당장 발길을 돌릴 것처럼 보였다. 생사의 이별처럼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어떤 일도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마음에서부터 외치는 소리를 내뱉었다.

영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후회됩니다.”

흠칫 놀란 기홍이 황급히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영구는 더욱더 세게 기홍의 손을 붙잡으며 급히 덧붙였다.

“오늘 일을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진작에 그대와 혼사를 올리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기홍, 미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아프게 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막연히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대 앞에서 전 비겁한 사람입니다.”

늘 과묵하기만 하던 그가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기홍의 눈엔 서서히 눈물이 차올라 아슬아슬하게 맺혔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바닥을 향해 맑은 진심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죠?”

영구가 그녀의 봉관과 예복을 응시하다 말했다.

“이렇게 예쁘게 입었으니 지금 혼사를 올립시다.”

기홍이 놀란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 여기서 혼사를 올리자고요?”

“네. 오늘이 우리의 혼삿날입니다.”

영구가 단호히 말했다.

“전 옷을 갖춰 입지 못했습니다. 너무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홍촉은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기홍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객잔 밖으로 나간 영구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기홍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영구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는 탁자에 물건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바구니 안에는 새 옷도 두 벌 담겨 있었는데, 한 벌은 여자 옷이었다.

“절을 올리고 나면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혼례복은 너무 무거우니까요. 대충 체형을 알려 준 탓에 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영구가 남자 옷을 집어 들었다.

“예복은 팔지 않아 이 옷으로 골랐습니다. 어떻습니까?”

영구가 고른 옷은 정교하게 만든 월백색 장포였다. 얼핏 보기엔 수수해 보였지만, 소맷자락과 옷깃에 정교히 수놓인 붉은 매화가 오늘의 경사를 알리는 듯했다. 영구도 그 느낌 때문에 이 옷을 샀으리라.

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쁩니다. 어서 갈아입으세요.”

영구는 옷을 들고 병풍 뒤로 향했다. 그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기홍은 붉은색 희 자를 벽에 붙여 두고 화촉에 불을 밝히느라 분주했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알록달록한 간식 몇 접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가느다란 옥 술병과 금빛 술잔이 놓여 있었다.

영구가 겸연쩍은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이것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기홍이 머리에 꽂은 비단 꽃 한 송이를 빼내어 영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어요. 이미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초가집에 살아도 궁궐보다 좋은 법이지 않은가.

이윽고 두 사람은 혼례 순서에 따라 첫 번째 절은 천지신명께, 두 번째 절은 창문을 바라보며 각자의 부모님께 올렸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한 채 깊숙이 절을 올렸지만,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먼저 허리를 편 영구는 혹여나 기홍이 어지러울까 봐 서둘러 부축했다.

“기홍, 혼례를 마쳤습니다.”

기홍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깜짝 놀란 영구가 입을 열었다.

“어, 어찌…….”

“기뻐서요.”

기홍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입가에 잠시 머물러 반짝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영구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한참 뒤, 그가 코를 훌쩍거리더니 그녀를 놓아주었다. 영구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검은 두 눈망울은 전에 없이 젖어들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합환주를 마셔 볼까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기홍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두 팔을 교차한 채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영구는 술이 아니라 행복 그 자체를 마시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든 기홍은 어두운 밤 오랜 시간 서성인 끝에 드디어 빛을 만난 듯했다. 이 자리에 있으니 알 수 없는 귀속감과 안온함이 밀려왔다. 새삼 자신과 영구의 용기가 감격스러웠다.

술을 모두 들이켠 두 사람은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했다. 기홍이 자그마한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입술을 살짝 벌렸다. 자세히 보니, 도금이 아니라 순금처럼 보였다.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침묵을 깼다.

“혹시 금이에요?”

“예, 순금입니다.”

기홍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순금을 살 수 있어요. 얼마나 비싼데!”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겁니다.”

물건을 놓을 때만 해도 얼떨떨했던 터라 깨닫지 못했는데, 다시 탁자를 살펴보니 전부 고급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간식은 임안성에서 가장 비싸고 유명한 곳에서 사 온 것이었고, 술병은 한눈에 봐도 궁의 물건과 비슷할 만큼 값비싸 보였다. 게다가 금이 뿌려진 화촉은 평범한 초가 아니었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영구의 옷 또한 꽤나 값이 나갈 듯했다.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이 난 건가요?”

문득 영구가 얼굴을 붉히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금은 돈이 없어 외상을 졌습니다.”

“외상이요?”

기홍이 목청을 높였다. 정말 놀란 탓이었다.

“그들이 뭘 믿고 외상을 줬단 말이에요? 설마…….”

강탈한 건 아니겠지…….

“차용증을 쓰고 지장을 찍었습니다.”

그가 붉게 물든 엄지를 보여 주었다.

기홍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로 말을 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외상을 줬단 말이에요?”

“제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더니 그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황제의 대도호위가 외상을 하겠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기홍은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분명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으리라. 그가 검을 뽑으면 맞설 이가 얼마나 있을까!

늘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그녀는 지금껏 격식에 따라 행동해왔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그가 보이는 막무가내의 행동들이 그녀의 가슴에 따뜻한 불씨를 전해 주었다.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가슴속이 간지럽고, 또 간지러웠다.

결국 그 기분이 터져나온 순간, 그녀는 그를 살짝 밀쳐내며 웃고 말았다.

“정말…….”

영구가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이내 고개를 숙인 그가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기홍은 부끄러웠지만 고개를 들고 호응했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 그녀의 숨결은 익숙한 향으로 가득 찼다.

영구는 입맞춤 한 번에 곧장 가슴이 뛰는 기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멀어진 적 없었다. 그저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 있었을 뿐. 그 마음을 깨우니, 모든 게 다시 돌아왔다.

한참 서로를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이 겨우 떨어졌다. 기홍은 조금 거친 숨을 몰아냈다. 영구의 얼굴은 기홍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조금 웅얼거리며 기홍을 불렀다.

“기홍.”

“네.”

그녀가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몸이, 조금, 불편합니다…….”

기홍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요, 어디가 불편한데요?”

영구가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몰려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쥐더니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여기.”

기홍은 조금 전보다 더 놀랐지만 영구는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침대로 돌진했다. 기홍의 당황한 목소리가 부질없이 울렸다.

“안 돼요. 지금은 대낮이라고요.”

“대낮이라도 혼례 절차는 마쳐야지요.”

* * *

그렇게 영구가 신방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예친왕은 황제에게 시시콜콜 일러바치고 있었다.

황제는 제법 인내심을 가지고 예친왕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말도 안 되는군. 신부를 약탈하다니, 이제껏 뭐 하고.”

“…….”

저리 대수롭지 않아 하는 말투라니. 같은 묵용씨를 쓰는 가족의 일인데, 화를 내야 정상이 아닌가!

황제가 학평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가동을 들라 하라.”

가동이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소식을 들은 터라, 그는 예친왕을 힐끔 바라본 뒤에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예친왕은 가동의 시선이 의아하기만 했다. 꼭 그가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질책하는 듯했다.

“영구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황상께 아룁니다. 신은 모르옵니다.”

“평소 그 애와 친분이 있으니 네가 가서 찾아보거라. 어쨌든 예친왕에게 잘못을 뉘우쳐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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