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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7)화 (506/1,192)

제507화

예친왕의 저택은 각종 초롱과 장식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많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기에 신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도 쉽지 않았다. 마침내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서 내린 기홍은 곧장 본채로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옮기니 자신의 옷과 발만이 보였다.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귓가에는 웅얼거리며 뭉개지는 잡음만이 들려왔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발걸음을 멈춘 시종이 그녀의 손에 붉은 비단 조각을 쥐여 주며 조용히 당부했다.

“잘 가지고 계세요. 길시가 되면 절을 올릴 겁니다.”

그녀는 비단 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어렵게 되찾은 평정심이건만,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흐트러지려 했다. 그녀는 다시금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절을 올리고 나면 정말 혼인한 몸이었다.

그때, 입구에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황상께서 보내신 예물이 왔습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기홍은 비록 볼 수 없었지만 심장이 빠르게 문 쪽으로 내달리는 듯했다. 그녀의 혼수는 학평관이 과할 정도로 많이 보내주었건만, 또다시 예물이라니. 대체 누구를 보내 예물을 내리셨단 말인가?

그때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영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기홍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멀어져 희미한 웅얼거림이 되었다. 어찌 그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설마 축하주를 먹으려고 이곳까지……? 기홍은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곧게 내쉬려 애썼다. 억눌린 심장이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몸부림을 쳐대고 있었다. 아무리 감정을 추스르려 해도 이 순간만큼은 소용없었다.

황제의 예물을 가져온 영구를 소홀히 대접할 수 없었다. 예친왕이 예를 갖춰 말했다.

“영 대인, 고생 많았소. 황상께서 노파심에 영 대인을 보내셨나 보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영구는 사양하지 않고 예친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부하들에게 예물을 내려놓으라고 분부한 그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관, 황상의 명을 받들어 예친왕께 칠채 관음상을 전해 드립니다. 감축 드립니다.”

예친왕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친왕이 정실을 들일 때도 황제는 기껏해야 하인을 보내 선물을 보내는 게 다였다. 첩을 들이는 일이라면 황제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새 신부 기홍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영구까지 직접 보낸 걸 보면 황제가 기홍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예친왕도 영구가 조금 무서웠다. 평소에도 늘 굳은 얼굴이지만 오늘은 시린 한기를 품은 듯해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그렇다고 내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를 대신해서 온 사람이니 그 지위가 더더욱 존귀했다. 결국 예친왕이 예를 갖춰 자리를 권했다.

“영 대인, 어서 앉으시오. 예식이 끝나면 축하주 좀 드시다 가시오.”

영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자락을 젖히며 의자에 앉았다. 동작이 어찌나 큰지 옷자락 날리는 소리에 옆에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손님들은 대부분 문무백관이었기에 조정에서 영구를 자주 보았다. 황제가 얼굴을 굳히면 그 또한 얼굴을 굳혔다. 그들 눈에는 영구의 표정이 황제보다 더 험상궂었기에 저들끼리 그 주인에 그 노비라며 영구의 흉을 보기도 했다.

길시가 되자 주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일배천지一拜天地!”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던 기홍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결국 시중을 들던 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부님, 절하셔야지요.”

기홍은 그제야 허리를 숙이며 절했다.

“이배고당二拜高堂!”

영구는 천천히 절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처럼 붉은 혼례복이 그의 눈가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처대배夫妻對拜!”

기홍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나와 함께 가겠습니까?”

면사포 너머에서 기홍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확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영구는 곧바로 기홍을 끌고 밖으로 뛰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하객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길만 주고받았다. 특히 예친왕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장난질이란 말인가? 부처대배를 올리고 신방에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도망을 치다니…….

그제야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예친왕이 서비를 들이는데 황상은 영구 편에 예물을 보냈고, 영구는 예물을 전해 주자마자 새신부를 빼앗아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예친왕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기홍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몇 년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묵용감은 좀처럼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초왕의 저택에서 본 그녀를 궁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때의 기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심장이 쉬지 않고 요동을 치는 탓에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끊어진 연이 다시 이어졌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기대에 부푼 예친왕이 은근슬쩍 얘기를 꺼내니 뜻밖에도 황제는 기홍만 동의하면 상관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결국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홍의 승낙을 기다렸다. 하늘이 그의 진심을 가엾게 여긴 탓일까?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낙의 뜻을 전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길일을 정하고 혼례 준비를 했다. 서비를 맞는 일이었지만 적비를 맞이할 때 못지않게 세세히 주의를 기울였다. 후원의 여인들도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물론 속으로는 이를 갈았을 테지만.

그에게도 속내가 훤히 보였지만, 어찌하겠는가? 이 집안의 가장은 그인 것을.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인을 위해 성대한 혼사를 치를 권리가 있었다. 만약 황제가 기홍을 중시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기홍을 위해 기꺼이 준비했을 터였다.

이날을 기다리며 그는 며칠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세상사 겪을 만큼 겪어본 친왕이 어찌 된 일인지 어린애처럼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또다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애가 닳고 기다리던 신부를 빼앗기다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는 붉은 예복을 입은 그대로 시퍼런 얼굴을 한 채 궁으로 향했다. 이 일은 황제에게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학평관은 딱히 할 일이 없어 복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때마침 예복을 입은 예친왕이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흠칫 놀란 학평관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경하 드립니다. 오늘은 예친왕께 경사가 있는 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예친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경사는 망할. 영구는 돌아왔는가?”

학평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았습니다. 영구는 황상을 대신해 예물을 드리러 가지 않았습니까? 축하주도 마시지 않고 벌써 떠난 것인지요?”

예친왕이 이를 꽉 깨물며 대꾸했다.

“본왕의 신부를 그자가 빼앗아 갔네!”

깜짝 놀란 학평관이 뒷걸음쳤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구가 기홍을 빼앗아 갔다니요?”

“총관리인한테 말할 것이 못 되네.”

예친왕이 학평관을 옆으로 밀쳤다.

“황상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내 황상께 시비를 가려 달라고 할 것이네!”

그는 씨근거리는 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학평관이 서둘러 그의 앞길을 막았다. 지금은 태자가 안에 있었다. 만약 놀라서 울음이라도 터트린다면 예친왕은 물론이거니와 그도 혼쭐이 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잔뜩 성이 난 사람이 가릴 것이 어디 있을까. 예친왕은 있는 힘껏 학평관을 밀쳤다. 다만 학평관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예친왕의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

“예친왕, 노여움을 푸십시오. 억울한 일은 황상께서 해결해 주실 겁니다. 지금은 태자 전하께서 안에 계시니 소인이 먼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만에 하나 태자 전하께서 놀라시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예친왕은 이성을 조금 되찾았다. 궁에 돌아온 태자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그도 익히 들었다. 태자가 있다는데 쳐들어가는 건 그에게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마침내 그가 걸음을 멈추자 학평관이 곧장 황제에게 고했다.

“황상, 예친왕께서 오셨습니다.”

황제는 태자와 함께 바닥에 깔린 융단에 앉아 있었다. 예친왕이 왔다는 말에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늘이 혼삿날이 아니더냐. 어찌 궁에 왔단 말이냐?”

학평관이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그, 그것이, 예친왕께서, 영구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서 말하거라.”

학평관은 대답을 올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수를 놓은 두꺼운 융단 위에는 유리구슬이 어지럽게 흩뜨려져 있었다. 태자가 구슬을 던지며 노느라 한창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황제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태자의 옆을 지켰다. 손에는 유리구슬을 한 주먹 쥐고 있었는데, 이따금 태자가 그 손을 찰싹 때리곤 했다. 자신의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학평관이 허리를 숙인 채 고했다.

“황상, 예친왕 말로는 영구가 기홍을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황상께 시비를 가려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잠시 얼이 빠진 듯했다. 그러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영구가 기홍을 빼앗아 갔다?”

“예, 분명 그리 말했사옵니다.”

황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예친왕을 들라 하라.”

학평관은 서둘러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다 그만 발밑에 있던 유리구슬을 밟아 미끄러지고 말았다. 태자는 곧장 그를 힘껏 밀쳐 내곤 구슬을 주워 들었다. 태자는 이내 구슬을 몸에 슥슥 닦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갔다.

학평관은 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 황상이 책망하지 않은 덕에 그는 서둘러 예친왕에게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탓에 그가 조금 더듬거렸다.

“예친왕, 화, 황상께서 안, 안으로 드시랍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예친왕은 학평관의 안색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곧장 안으로 향한 그는 황제와 태자가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사실 그도 소문만 자자하던 태자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아이는 혼자 신나게 놀뿐, 황제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황제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활짝 웃으며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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