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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5)화 (504/1,192)

제505화

“아이고, 이 할미마저 때리는 것이냐.”

“노불야 뿐만 아니라 저도 맞았습니다. 손이 어찌나 매운지요.”

황제가 몇 마디 나무랐지만, 그의 눈에는 전에 없는 사랑이 넘쳐흘렀다. 어린 아들이 누굴 때리는 일마저 장하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다만 서 태후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어찌합니까? 계속 바닥에 앉아 있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황제가 목청을 높여 월규를 불렀다.

“태자를 침대로 옮기거라.”

다가온 월규가 손을 뻗어 묵용린을 안았다. 서 태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월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친할미와 아비도 싫다하더니, 어찌 다른 이에게는…….”

황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린아는 늘 월규가 돌봐주었으니, 그때의 기분을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서 태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황자 덕에 월규에 대한 인상마저 조금 좋아졌다.

* * *

월규는 곤히 잠든 묵용린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러나니 마침 황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옷자락에 달린 단추를 풀었다. 월규가 서둘러 황제의 환복을 도왔다.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황상, 태자 전하께서 밤에 우시거든 곧장 소인을 부르십시오. 오늘 밤 소인이 당직이니 문 앞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에 누워 있는 자그마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너밖에 기억하지 못하니 당분간은 네가 고생 좀 해야겠구나. 밤에는 당직을 서지 말고 학평관에게 다른 이로 대체해달라 하거라.”

“고생이라니요.”

월규가 황제의 옷을 받아 들며 웃었다.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릅니다. 전하께서 옛일을 기억하시어 소인을 알아봐 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월규는 또다시 솟구치려는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미소를 보였다.

월규가 밖으로 나가자 묵용감은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그가 침대에 누우려고 하는 순간, 묵용린이 눈을 번쩍 뜨더니 흐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뭐랄까… 그를 나무라고 원망하는 듯했다. 백천범과 꼭 닮은 눈빛 앞에서 그의 심장은 온전히 뛸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를 비추던 태자가 천천히 눈을 감고 잠들었다. 그러나 묵용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심장부터 시작해 전신을 힘껏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말았다.

혹시라도 묵용린이 깰까 봐, 그는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소리를 가슴에 가두었다. 그러나 고요한 방 안에서는 숨죽인 오열마저도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밖에 있던 월규는 태자가 우는 듯한 소리에 서둘러 들어섰다.

“황상, 혹 전하께서…….”

월규는 가까이 와서야 황제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눈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민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묵용감은 한참 뒤에야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가 수건으로 눈가를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남원에서 서신이 왔을 때 그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백천범 모자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분명 그를 찾아왔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천범이 어떤 고난이든 이겨내고 끝내 그를 찾아 궁에 올 사람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이만 보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조정 대신들뿐만 아니라 후궁까지 발칵 뒤집혔지만 그는 그저 방관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남원에 성을 넘기더라도 묵용린을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니, 그들을 뜻을 막지 않았다. 남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으니,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 신비롭고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한 작은 국가가 어찌 감히 동월을 건드리려 한단 말인가?

결국 그를 쏙 빼닮은 아이가 보내졌다. 처음 온 아이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본 순간 깨달았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인데, 아이가 정말 그의 피붙이라면 그의 마음이 이리 삭막할 리 없었다. 다만 남원이 그와 닮은 아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리 닮았어도 가짜는 가짜가 아닌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는 그리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저 남원을 쳐서 군사들의 전투 경험을 쌓아주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남원에서 또 다른 아이를 보내왔다. 여전히 남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궁금증만 커져갔다. 한데, 이번에는 진짜였다. 묵용린이 그의 손을 밀치긴 했지만, 그는 묵용린의 머리에 있는 작은 용을 볼 수 있었다.

오직 그만은 그 용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묵용린이었다. 그의 묵용린이 돌아왔다. 린아를 처음 안은 순간, 그는 아이를 떨어뜨릴까 품에 꼭 껴안지 않았던가. 그때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린아를 부르며, 이 세상에 온 그의 아들을 맞이했다…….

그때도 눈물이 벅차올랐지만, 어떻게든 울음을 참은 그였다. 그러나 조금 전 본 아이의 눈빛 앞에서 그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 일 년간 그는 마음속에 철옹성을 쌓고 성문을 걸어잠갔지만, 아이의 눈빛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묵용린의 눈빛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월처럼 내려앉아 그의 성을 잔해로 만들었고, 그 속에 웅크린 유약한 마음을 끄집어내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잊으면 안 된다. 그는 황제였다. 그렇게 되뇌지 않으면, 이 순간부터 모든 걸 다 내던지고 그녀를 찾는 데만 몰두할지도 몰랐다.

묵용린이 살아있다면, 그의 천범은 어디 있단 말인가. 혹 그녀도 남원에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낯선 나라를 떠돌고 있을까? 그래서였다. 아무리 찾아도 소식이 없더라니, 두 모자는 동월이 아닌 타국에 있던 것이었다.

백천범이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묵용린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에겐 큰 희망이었다.

밤새도록 그는 잠을 설쳤다. 이따금 화들짝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이불을 걷어찼을까 봐, 혹여나 낯선 곳에서 편히 자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묵용린은 백천범의 적응력을 물려받았는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몇 차례 몸을 뒤척이며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자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였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그 모습 앞에서, 묵용감은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어미가 없는 아이인 게 가장 불쌍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있었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묵용감은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제 목숨보다 귀한 아이가 돌아오다니,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소중한 부인도 돌아올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부처가 세 식구를 다시 만나게 해 준다면, 그는 기꺼이 절에 찾아가 황금 부처상을 바칠 수 있었다.

백천범이 살아 있다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묵용린과 백천범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을까? 그는 총기가 가득했던 묵용린의 눈을 떠올렸다. 그간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 눈에 어두운 그늘이 끼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적의가 담긴 눈빛까지…….

이튿날, 황제는 평소와 달리 조금 늦게 잠에서 깨었다. 늘 근면 성실한 그였지만, 밤새 잠을 설친 탓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묵용린은 반짝이는 침까지 흘리며 푹 잠들어 있었다.

멍하니 아이를 지켜보던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어제는 묵용린을 안고 싶어도 도통 허락하지 않은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아이는 짧은 팔을 마구 휘둘렀다. 그랬던 아이가, 아침이 되니 그의 팔 안쪽에 꼭 붙어 있었다.

마침 학평관이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와 장막을 걷었다. 장막 너머의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 학평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따스한 장면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무얼 해야 하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황제가 웃는 얼굴을 보인 게 얼마 만일까. 백천범이 떠난 뒤, 황제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뚜렷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지키는 신처럼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전하가 돌아오자마자 그는 다시 속세에 내려온 듯, 아이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황제와 학평관의 시선은 자그마한 아이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아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기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기색에 황제는 반사적으로 긴장하고 말았다. 저절로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묵용린은 잠에서 깨어날 때 백천범이 아닌 그를 보게 되면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 소리에 백천범이 헐레벌떡 달려와 달래 주곤 했으니, 지금도 울음을 터트릴지 모르는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퍽 우스운 일이었다. 천하에 두려운 게 없는 황제가, 고작 아이가 울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눈을 뜬 묵용린과 묵용감의 시선이 마주쳤다. 따스한 빛과 멍한 빛이 잠시 얽혀 들더니, 아이가 등을 보였다.

황제가 입을 열려는데 묵용린이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이내 벽 끝까지 기어간 묵용린이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린아, 아버지다. 이 아비에게 와 보거라.”

황제도 자리에 앉아 묵용린에게 손을 뻗었다.

묵용린은 눈빛을 흩뜨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백천범이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이었다. 그녀는 긴장이 될 때마다 손가락을 만지곤 했다. 황제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아이를 지켜보았다. 이런 것도 유전이란 말인가?

그가 학평관에게 물었다.

“몇 시진이나 되었는가?”

“황상께 아룁니다. 진시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오늘은 조회를 하지 않겠다고 전하거라.”

학평관은 알겠다고 대꾸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황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유모는 구했느냐?”

“…그것이… 황상, 태자 전하께서는 곧 두 돌이십니다. 젖은 이제 드시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황제가 이마를 문지르며 웃었다. 이렇게 자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 하다니. 그는 아직도 묵용린을 갓난아이로 여기고 있었다.

그때, 안으로 들어온 월규가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곤 활짝 웃는 얼굴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어린 태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황제를 지나친 묵용린은 월규를 보고 짧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향해 팔을 뻗어오는 아이를 본 순간, 월규의 마음은 햇살이 닿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녀가 묵용린을 안아들며 나지막이 얼러 주었다.

“아기씨, 일어나셨습니까? 기홍 고고가 아기씨께서 드실 맛있는 아침을 만들었답니다. 얼마나 맛이 좋은지 모릅니다. 녹하 고고는 어떻고요. 전하 아기씨께 드릴 예쁜 옷을 만들었지요. 그럼 어서 아침을 먹으러 가 볼까요?”

월규는 예전의 호칭을 사용했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묵인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하면 묵용린이 더 빨리 황궁 생활에 익숙해질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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