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4화
이번에는 자안궁이 아닌 승덕전으로 곧장 아이를 데려갔다. 황제는 여느 때처럼 남서방에서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도착했다는 소태감의 말에 짧게 대답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월규가 먼저 아이를 보러 밖으로 향했다. 지난번엔 곧바로 서 태후에게 보내져 얼굴도 못 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로 황자가 돌아온 것인지,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편전으로 향했다.
넓은 편전에 아이를 모신 궁녀와 태감들이 사방을 지켰다. 높고 커다란 의자에 앉은 아이는 무섭지도 않은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자는 것처럼 보였다.
월규는 방에 들자마자 그 광경을 보고 궁녀들을 혼냈다.
“전하를 어찌 의자에서 주무시게 한단 말이냐, 다들 정신이 나간 것이냐? 어서 침대로 모시거라.”
그 말에 한 궁녀가 아이를 안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용하던 아이가 별안간 그녀의 뺨을 때렸다.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흠칫 놀란 월규가 손을 내저으며 물러나라 분부했다. 그리곤 직접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애가 안는 게 싫으십니까? 그럼 제가 안아드릴까요?”
월규가 팔을 뻗으며 아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이채라곤 전혀 없는 까만 눈은 월규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를 관통해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월규는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일 년 넘게 떨어져 있었으니 아이는 곧 두 살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월규는 묵용린 곁을 가장 오래 지키며 자신의 아이처럼 아꼈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먹먹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 꼭꼭 숨겨 두었던 그녀의 슬픔을 하염없이 쏟아내게 만들었다. 월규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기씨, 절 몰라보시겠습니까?”
그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월규입니다.”
아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지만, 월규는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이를 보기만 해도 슬프고 아팠다. 그녀는 해묵은 상처가 터진 것처럼 괴로워하며 아이를 안고 목 놓아 울었다.
가동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울지 마. 지난번에도 황상과 똑같이 생긴 아이였어. 또 가짜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나 월규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보다못한 가동이 아이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월규가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문 앞에서 낮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것이냐?”
황제의 목소리에 가동은 곧장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월규 또한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내려놓고 모두 나가거라.”
황제의 말에 편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재빨리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많은 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녹하와 기홍, 영구, 학평관은 물론이고 자안궁의 황유도도 와 있었다. 태후는 또다시 충격을 받을까 봐 황유도를 보냈다. 여기에 경수궁의 추문을 비롯한 다른 궁전의 시종들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녹하가 급히 월규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우리 전하가 맞으시대?”
월규는 입을 열려다 말고 가장자리에 서 있는 추문을 발견했다. 월규는 추문을 한번 노려보더니, 서둘러 기홍과 녹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추문은 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영구가 그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멋쩍은 얼굴로 물러났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저택에서든 황궁에서든 저들은 늘 자신들끼리만 똘똘 뭉치고 있었다. 다른 이는 아예 저들 무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됐는데, 어서 말해 봐.”
성질 급한 녹하가 월규를 다그쳤다.
월규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우리 전하인 것 같습니다.”
“나도 지난번에 그렇게 생각했어.”
녹하의 뒤에 있던 가동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니었지. 왜 저 애가 우리 전하일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월규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났으니까요.”
녹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가동도 지난번에 아이를 보자마자 울었어. 근데 결과가 어떻든?”
기홍이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점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라서 딱히 증명할 방법도 없잖아. 황상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겠어.”
월규가 고집스레 말했다.
“저는 우리 아기씨가 맞는 것 같아요. 못 믿겠으면 내기라도 해요.”
그녀의 제안에 가동이 흥미를 보였다.
“좋아, 크게 걸지는 말고 은괴 열 냥 어때?”
월규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은괴 열 냥이 큰 게 아니라니… 제가 가 대인과 어찌 내기를 할까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좋아요. 까짓거 열 냥으로 하죠. 지지 않으면 되잖아요.”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황제가 밖으로 나왔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가와 실룩이는 뺨은 치솟는 무언가를 억지로 눌러 참는 것처럼 보였다. 학평관에게 시선을 던진 황제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명이다. 태자가 돌아왔으니 대사면을 내린다!”
모든 이들이 즉각 무릎을 꿇고 일제히 소리쳤다.
“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황제는 우렁찬 함성을 뒤로하고 묵용린을 안은 채 침전으로 향했다. 황제가 들어간 후, 각 궁전에서 온 하인들은 쏜살같이 자리를 벗어났다. 모두 자신의 주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갔으리라. 황제의 입에서 태자라는 말이 나왔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이었다.
다만 월규를 포함한 몇몇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눈물만 쏟고 있었다. 정말 전하였다니!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린아가 돌아왔다. 이토록 어린아이가 밖을 떠돌았을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영구와 가동도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사람은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한참 뒤, 영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홍을 부축해 일으켰다. 기홍 역시 월규를 부축했다. 가동은 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다른 쪽 손으로 녹하의 팔을 잡았다. 순간 가동의 머릿속에 겸연쩍은 생각이 스쳤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월규가 손을 뻗었다.
“어서 열 냥 주십시오.”
가동이 시원시원하게 은괴를 꺼냈다.
“진짜 우리 전하라면 열 냥이 대수겠어, 천 냥도 줄 수 있지.”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기홍이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우리 태자 전하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부처님.”
옆에 있던 월규가 몇 마디 거들었다.
“부처님이 우리 마마님까지 보내 주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월규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녹하가 말했다.
“그럴 거야. 태자 전하께서도 돌아오셨는데 우리 왕비, 아니, 우리 마마님도 돌아오실 수 있어.”
* * *
황유도가 전한 소식은 서 태후의 눈물을 자아냈다. 그녀는 서둘러 승덕전으로 갈 채비를 하라고 분부했다. 이번엔 황제가 인정했으니, 드디어 마음 놓고 손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서 태후가 승덕전에 도착하자 학평관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그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불야, 감축 드립니다.”
“나도 축하하네. 하늘이 도운 일이야!”
가마에서 내린 서 태후는 학평관의 팔을 붙잡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애가의 손자는 어디 있는가? 어서 애가를 데려가게.”
“황상께서 놀아 주고 계십니다.”
서 태후는 순간 멍해졌다. 아이와 함께 노는 황제의 모습이라니,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늘상 냉랭하던 아들이 아이에겐 따스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혹, 무정한 아버지라고 한들 그녀가 손주를 아껴주면 되었다. 황제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 주지 못했으니 그 빚을 손자에게나마 갚고 싶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와 어린 태자는 홑옷만 걸친 채 땅바닥에 앉아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 태후는 묵용린을 유심히 살폈다. 묵용감을 빼닮은 얼굴에 몸집도 컸지만, 검은 두 눈동자는 흐릿하기만 했다. 꼭 눈동자 안에 얇은 가죽을 덧댄 것 같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서 태후가 물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닥에 앉아 홑옷만 입고 있다니.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
“불을 놓아 따뜻하니 괜찮습니다. 태자는 어릴 때부터 두껍게 껴입는 걸 싫어했습니다.”
묵용감이 태연히 설명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싫어했지요. 늘 이렇게 바닥에 앉았습니다.”
서 태후의 의문은 끝나지 않았다.
“하면 황상은 어찌 그리 얇게 입은 것입니까?”
“아이와 함께하고 싶어서요.”
코끝이 찡해진 서 태후는 이번에야말로 손자를 찾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이는 곧장 그녀의 손을 밀쳤다. 놀란 서 태후가 웃으 지었다.
“아이고, 성질 한번 고약하구나. 이 할미가 머리를 만지는 게 싫은 것이냐?”
묵용린의 멍한 눈빛이 서 태후를 향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니 서 태후는 자연히 걱정이 샘솟았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위 태의에게 진맥을 맡기는 게 어떨까요.”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며칠은 두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 왔으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서 태후는 태자를 유심히 살폈다. 다부지고 튼튼한 골격에 귀여운 외모를 지녔다. 조금만 더 표정이 다양하고 눈빛에 생기가 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서 태후의 눈에는 지금의 묵용린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어쨌든 손자인 이상, 어떤 모습이라도 좋을 따름이었다.
방을 오가던 궁녀와 태감들은 세 사람의 모습에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삼대가 한데 모여서 두 사람은 바닥에, 한 사람은 쪼그려 앉아 있다. 꼭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았다.
서 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황상은 정무로 바쁘니 태자를 돌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린아는 제 궁에서 키우겠습니다.”
황제가 웃음을 보였다.
“아이를 안고 갈 수 있으시다면 그리하십시오.”
서 태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안지 못한단 것입니까?”
그녀가 묵용린을 안으려고 하니, 아이는 팔을 마구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