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화
서 태후는 이번 일로 그녀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수원상은 예전의 춘 황후보다 더 잘 해내고 있었다.
전정엔 황제가, 후궁엔 양비가 자리를 지켰다. 완벽한 한 쌍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일에는 제법 호흡이 잘 맞았다. 예를 들면 수원상은 현비를 잘 보살폈고, 덕분에 황제가 그녀를 부를 때 배탈이 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남원의 황궁에서 도착한 서신은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원 측에서는 자신들이 한 아이를 주웠는데 동월국 폐하의 아들이 확실하니 양국의 우호를 위해 아이를 돌려보낸다고 했다. 다만 보답으로 서남북 지역 경계의 성 다섯 곳을 넘겨주길 바란다는 게 요지였다.
서신의 내용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신하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세우기 급급했다. 어떤 이는 절대 믿을 수 없다며 핏발을 세웠고, 어떤 이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신중함을 기했다. 또 어떤 이들은 배후에 숨은 깊은 뜻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식을 접한 후궁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 태후는 자초지종을 듣지도 않고 곧장 남서방으로 달려가 황제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손자를 찾아와야 한다며 완강하게 나섰다.
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태후의 말에는 동의했다. 성 다섯 개로 아들을 찾을 수 있다면 충분히 수지가 맞는 일이었다. 약소국인 남원이 만약 그를 기만하려는 수를 쓴다면,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결국 관원들이 협의서를 작성하고 양국 대표단이 서명함에 따라 성 다섯 채가 남원에 속하게 되었다. 애당초 남원과의 경계에 있던 지역이라 언어나 풍습이 같았으니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원은 약속한 대로 곧장 아이를 임안성으로 보냈다. 수민과 가동이 직접 어린 황자를 궁으로 데려왔다. 아이와 함께 돌아오던 가동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묵용감과 너무 똑 닮은 아이의 외모 때문이었다. 틀에 박아 찍어냈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궁에 들어온 황자는 곧장 후궁으로 보내졌다. 서 태후는 아이를 보자마자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연신 눈물을 쏟았다. 후비들도 서 태후의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수원상마저 손수건으로 이따금 눈가를 닦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천범과 아이를 그렇게 아끼던 묵용감이, 어째서 얼굴도 보러 오지 않는단 말인가?
아이가 궁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남서방에서 정무를 논의 중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가 일을 다 처리한 뒤 자안궁에 들자, 마침 후비들은 아이를 에워싸고 온갖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은 아이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등장하자 모두 우르르 무릎을 꿇어앉았다. 아이의 등장은 놀라움만큼이나 좋은 일을 안겨다 주는 듯했다.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황제의 얼굴이었건만, 아이 덕분에 보게 된 것이다.
황제는 기분이 좋았는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외친 뒤,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그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피를 떨어뜨려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의 아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자그마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드물게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가 무서웠는지 자꾸만 거리를 두려 했다. 황제의 따스한 손길은 끊임없이 아이의 머리에 닿았고, 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광경에 서 태후는 눈이 다 감길 만큼 활짝 웃으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 얼마나 꿈에 그리던 날이란 말인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손자가 마침내 그녀 곁으로 와 주었다. 이제 황자도 있으니, 그녀의 시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날 밤은 더할 나위 없이 분위기가 좋았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효심이 깊은 아들, 한자리에 모인 부부와 손자까지. 온 가족이 한데 모이니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서 태후는 황자를 자신의 궁에서 데리고 있겠다고 했지만, 황제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자신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서 태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황궁에서 황제만큼 황자를 그리워한 이가 어디 있을까. 그녀는 침소에 들 시간이 되어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를 황제 편에 돌려보냈다.
황제는 아이를 안고 어가에 올라 승덕전으로 돌아왔다. 어가에서 내린 그의 얼굴은 어느새 무미건조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영구에게 아이를 맡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전으로 향했다.
영구가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영구는 문득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이내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이와 함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서 태후는 이른 아침부터 황유도를 보내 아이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하루 보았을 뿐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리운 황자였다. 그러나 황유도는 혼자 돌아왔다. 그가 전하길, 황제는 조회에 참석했고, 다른 이들은 황자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서 태후는 직접 승덕전으로 향했다. 승덕전엔 궁녀와 태감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나 그들에게서도 모른다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다. 서 태후의 마음이 절로 조급해졌다. 어찌 황궁에서 아이를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소태감을 불러 상보대전으로 찾아가라고 분부했다. 황제가 올 수 없다면 학평관이라도 불러오라는 의미였다.
소태감은 재빨리 상보대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데려온 사람은 학평관이 아니라 영구였다.
서 태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황상이 애가의 귀한 손자를 어디에 숨겼단 말인가?”
영구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태후 노불야, 어젯밤 궁에 들어온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서 태후는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어젯밤 궁에 들어온 아이’라니! 황자 또한 그의 주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이의 행방을 확인하는 게 급했기에 서 태후는 얼른 대답했다.
“그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나?”
“죽었습니다.”
그 말이 불러온 파장으로 인해 서 태후는 몸을 휘청거렸고, 영 마마가 겨우 그녀를 붙잡았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서 태후가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주, 죽다니? 어찌 죽었단 말인가…….”
“신이 죽였습니다.”
서 태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제를 향한 충심이 가장 큰 호위무사가 어린 황자를 죽이다니? 게다가 황자를 죽이고서도 저리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때, 가동이 급히 달려와 영구를 쏘아보았다. 이자는 남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노불야, 진정하십시오. 그 아이는 가짜였습니다.”
가동의 말까지 더해지니, 서 태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꼬여갔다.
“가, 가짜라니? 어딜 봐서 가짜란 말인가? 황상과 그리 똑같이 생겼거늘…….”
“신도 처음엔 깜빡 속았습니다. 하지만 황상께서 가짜라고 하셨으니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황제가 이유 없이 친아들을 죽이진 않았을 터……. 가동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 하필 그가 당직을 서지 않는 날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황제에게 필요 없는 아이라면 그에게 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아이가 절실했는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이 황제와 똑같이 생겼다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는가…….
서 태후는 갑작스레 일어난 변고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영 마마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위로했다.
“노불야, 부디 좋게 생각하십시오. 우리 전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황가의 혈통을 망치려 한 게지요. 황상께서 혜안으로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 태후는 멍하니 금빛 바닥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 닮았단 말이다. 정말 닮았어…….”
* * *
남원에서 보낸 아이가 가짜로 밝혀지자, 신하들은 분을 참지 못했다. 특히 무관들은 군대를 보내 성을 탈환하겠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문관들은 남원이 신용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열하고 파렴치한 국가라고 질책했다. 조정은 한순간에 고성과 욕설이 오가며 시장을 방불케 했다.
높은 옥좌에 앉은 황제는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 한 무관이 앞으로 나와 남원을 칠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 청했다. 황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인 황제가 아니던가? 어찌 저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대열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수민은 신하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황제의 안색을 관찰했다.
국경에는 늘 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곧장 서신을 전달할 병사를 보냈다. 각 구역의 통솔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쟁은 금방이라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나기 전, 남원에서 또다시 아이를 보내왔다. 지난번엔 실수였을 뿐, 이번에 보낸 아이는 진짜라는 주장과 함께.
어찌 이런 일에 실수가 있을까? 황제는 냉랭한 태도였지만 또다시 아이를 맞이할 이들을 보냈다. 아이의 진위도 진위였지만, 남원의 수작을 파악해야 했다.
이번에도 수민과 가동이 아이를 데려왔다. 역시나 묵용감을 빼닮은 아이였다. 다만 지난번에 보낸 아이보다 몸집이 조금 더 크고 조용했다. 눈도 좀 더 컸지만 어쩐지 눈빛이 다소 어두웠다.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은 게 불편한 건지 자꾸만 옷을 벗으려고 했다. 가동은 지난번 가짜에 깜빡 속아 눈물을 보인 게 부끄러워, 차가운 미소로 일관했다.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어야 할 텐데요.”
수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리 연달아 동월을 자극하면 남원도 무사하지 못함을 잘 알 걸세.”
그제야 가동이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수 대인 말씀은… 이번엔 진짜 전하라는 것입니까?”
수민이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진짜여야지. 황상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일세. 이기든 지든 전쟁이 좋은 일은 아니잖나.”
“…….”
역시 대학사였다. 그가 하는 말은 좀처럼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가짜란 말인가? 진짜란 말인가! 아니, 되었다. 아이 아버지가 아닌 그가 어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가동은 마음 속에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지난번의 아이는 여느 모로 봐도 황제와 판박이였다. 한데 어찌 가짜라는 사실을 그리도 금방 알아차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