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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2)화 (501/1,192)

제502화

가동에게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증거 확보는 물론 범인까지 빠르게 알아냈다. 무엇보다 운석궁에서 파두를 발견하고 나니, 가동은 기가 찰 따름이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궁에서 이런 얄팍한 수를 쓰다니. 이곳은 황궁이다. 집에서 하던 소꿉놀이를 너그러이 허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가동은 수원비에게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생겼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수원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파두 몇 알에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해도 며칠 배탈을 앓으면 끝이다. 그녀는 오히려 황제에게 혼이 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처벌을 구실 삼아 황제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막상 황제가 자신을 혼내지 못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가동이 찾아오자, 수원비는 두 손을 너른 소매에 넣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더니 오만하게 눈을 내리떴다.

“내가 그리한 것이니 황상께 찾아가 죄를 고하겠습니다. 가 대인, 가시죠.”

가동은 실소를 흘렸다. 역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언니는 그토록 명민한데, 동생은 이리 어리석단 말인가? 뭐라고 대꾸할 말을 고르기도 힘들었다.

“양비 마마, 그것이… 마마께서 황상을 보고 싶으셔도 신이 먼저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황상께서 마마를 뵙고 싶지 않아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수원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고하러 가는데도 만나 주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궁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다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가동은 파두를 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인내심이 없는 수원비가 어찌 가만히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녀는 수원상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일까, 처소 바깥에 금군들이 서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색 갑옷은 수원비에게 까닭 모를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공기마저 엄숙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제야 수원비는 수원상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태후가 그녀를 아끼니,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줄지도 몰랐다. 어쨌든 사소한 잘못에 불과하지 않던가?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원상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황제의 교지를 품은 학평관이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대전에 서서 황제의 명을 큰소리로 대독했다.

“양비 수 씨는 품성이 단정치 못하고 편협할 뿐만 아니라, 황권을 무시하며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비의 지위를 강등하고 영항永巷(죄 지은 궁녀를 가두던 곳)으로 거취를 옮길 것을 명하노라.”

그 순간, 수원비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리 작은 일로 어찌 폐위까지 한단 말인가? 영항은 또 어디고? 수원비는 문득, 다시는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단번에 눈물을 쏟아낸 수원비가 학평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총관리인, 난 황상을 만나야 하네. 제발, 한 번만 황상의 얼굴을 뵐 수 있게 해 주시게. 난 정말 억울하단 말일세. 흑, 흐윽…….”

학평관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양비 마마, 울지 마십시오. 짐을 챙기신 뒤에 곧바로 떠나셔야 합니다. 황상께서는 마마를 만나 주지 않으실 겁니다.”

“내 잘못을 잘 알고 있네. 언니가 분수를 지키라 하였는데, 내가 어리석었네. 당장 현비 마마께 잘못을 뉘우칠 테니 제발, 나 좀 살려 주시게. 총관리인! 나는 이대로 갈 수 없네, 갈 수 없단 말일세……”

“단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찌 충고를 듣지 않고 화를 자초하셨습니까? 황상께서는 계략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부디 잘못을 뉘우치고 자숙하십시오.”

학평관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슬픈 얼굴로 자리를 떴다. 얌전히 있었다면 조용히 황궁의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건만, 삐뚤어진 심보 탓에 구렁텅이로 들어가길 자초하고 말았다.

사실 황제의 벌이 조금 과하긴 했다. 황궁에서도 파두 몇 알의 장난 정도는 가벼운 처벌로 넘길 수 있었다. 폐위만으로도 도가 지나쳤지만, 영향으로의 이동은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었다.

소식을 접한 서 태후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에 어긋난 처분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대학사 수민의 체면을 생각하면 이럴 순 없었다. 수민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황실에 실망하겠는가? 그녀는 급히 승덕전으로 찾아가 황제를 타일렀다.

황제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은 채 서 태후의 말을 경청했다. 서 태후가 말을 마치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태후께 걱정을 끼쳐 드리다니… 다 이 아들의 잘못입니다. 이런 시시콜콜한 일에는 부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여봐라, 태후를 모셔다 드리거라.”

요즘 들어 두 모자 사이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들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어미였다. 서 태후는 황제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가 말끝마다 그녀를 태후로 부른다면,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고집을 꺾고 돌아갈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서 태후가 다시 한번 그를 타이르려고 할 때, 영구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태후 마마, 신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서 태후는 세상에서 황제가 가장 무서웠고 그다음으로 영구를 두려워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압박하니 그녀도 더는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패잔병의 기분을 느끼며 자안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꺾이지 않았다. 적어도 수민과 수원상의 체면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그때 황유도가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후비들이 황제에게 청을 드리자는 것이었다. 여러 명이 청을 드리면 황제도 마음을 돌릴지 모른다.

서 태후는 그의 의견을 수렴해 후비들을 소집했다. 후비들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호소문을 쓴 뒤, 낙관을 찍었다. 그러나 호소문을 들고 도착한 비들 사이에 수원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 태후가 사람을 보내니, 병이 났다는 소식이 돌아왔다.

여동생을 위한 일에 언니가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소식을 들은 서 태후는 직접 경수궁을 찾았다.

그러나 수원상의 병세는 몹시 심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전신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악몽을 꾸는 듯 연신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호소문을 쓰긴 어려워 보였다.

서 태후는 결국 며칠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수원상의 병세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그녀가 찾아갈 때마다 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서 태후는 다른 비들의 호소문을 모아 황제에게 전달했다.

황제가 그녀의 계획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는 호소문을 읽지도 않고 마구 구겨 광주리에 던졌다. 그리곤 위중청을 수원상에게 보냈다. 그녀의 병이 낫자 황제는 그녀를 승덕전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틀 후, 경수궁에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수원상을 양비에 봉해 수원비의 빈자리를 메운다는 내용이었다.

영항에 갇힌 수원비는 제 손으로 언니가 출세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영영 모를 터였다.

수민 대학사의 입장에선 두 딸 중 하나는 폐위되고 하나는 사비에 봉해진 셈이다. 그러나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버릴지, 그의 판단은 진즉 내려졌으리라.

수원상이 병이 나 호소문을 쓰지 못했던 것을 서 태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며칠 후 황제의 칙서를 전해 들은 그녀는 그제야 모든 정황을 알아차렸다. 애당초 수원상의 병은 우연이 아니었다.

황실의 어른이 된 후 그녀는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길 바랐다. 다만 후궁에는 후궁의 규율과 도리가 있는 법. 수원비와 같은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서 태후는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지금은 후궁을 잘 꾸려나갈 사람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는 수원상이 제격이었다.

그날 황제와 수원상이 나눈 이야기는 본인들 외에 추문만이 알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온 수원상은 평소와 달리 두 눈에 아른거리는 빛을 띠고 있었다.

수원상은 욕통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이날을 위해 그녀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뎠다. 혈육까지 쳐낸 끝에 조금이나마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녀는 묵용감을 연모했으니,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너무도 늦게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묵용감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는 운명과도 같았다. 그녀는 의기소침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해 슬퍼하고 있기보다는, 그의 존경과 신임이라도 얻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총애를 받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애교도, 교태도 부리지 않았으므로. 다만 그녀는 그녀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묵용감이 후궁을 관리할 권한을 준다면, 그녀는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었다.

궁에 들어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황궁의 각처에 황제의 눈이 닿아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후궁에서 일어나는 일도, 황제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수원비를 훈계했던 일, 호소문을 쓰는 걸 피하기 위해 매일 밤 찬물을 끼얹어 병이 나게 한 일……. 그녀만의 원칙과 황제를 향한 그녀의 충심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랬다. 충심, 황제를 향한 충심이 그녀보다 더 깊은 이가 어디에 있을까. 그 사실은 그녀 자신도,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독대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의도를 묻는 황제의 눈빛은 그녀를 시험하고 있었다. 내려앉은 매서운 눈빛은 그녀의 모든 부분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수원상은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따라갈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으니. 충심 때문에, 황상을 향한 충심 때문에 그리하였다고……. 그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녀의 진심 어린 마음엔 어떤 위장도 필요 없었다. 그가 자신을 시험한다면,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었다.

과거, 묵용감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터였다. 그녀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두 번째 칙서가 내려졌다. 중궁이 비어 있으니 양비 수 씨가 후궁의 모든 공무를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봉인鳳印은 하사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낙관인 안인雁印을 주었다. 수원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안인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감사를 표했다.

후비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지만, 수원상의 속마음을 그들이 어찌 짐작하겠는가. 문득 쓸쓸한 기운이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었다. 황제는 백천범이 가졌던 어떤 것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이제 첫발을 떼었으니 앞으로 나아갈 길은 좀 더 수월할 터였다. 황제가 원하는 황후는 둘 중 하나였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 전자는 영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이니, 그녀는 후자가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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