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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1)화 (500/1,192)

제501화

황궁의 사람들이 입을 모으길, 이몽기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얼마 가지 않을 거라 했다. 이몽기의 아둔함이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 되면 후궁들은 다 함께 태후에게 인사를 올리러 갔다. 어느 날, 이몽기는 옥류玉琉라고 불리는 태후의 고양이를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고양이가 꼭 하얀 돼지 새끼를 닮았다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태후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고양이를 돼지에 견주다니… 정녕 칭찬이 맞단 말인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비유였다.

또 어느 날은 태후가 후궁들에게 옷감을 상으로 내렸다. 여인들은 신중하게 제게 잘 어울리는 색깔을 골랐다. 그때, 주단 한 필을 고른 이몽기가 색이 너무 노티 나니 노불야께 제격이라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태후가 가장 웃어른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태후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녀는 아직 쉰도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젊게 입는 걸 선호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다들 그녀의 아둔함을 눈치챘다. 이몽기는 눈치도 없고 말도 잘하지 못했다. 이런 여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수군대는 이들이 늘어 갔다.

한데 정말 귀신이 수를 부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황제는 예니레에 한 번씩 패를 뒤집었는데, 그때마다 현비 이몽기의 패만 고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튿날이 되면 다른 비들의 귀에 현비가 받은 하사품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러워하는 이도, 질투하는 이도, 치를 떨며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현비의 살점을 물어뜯고 싶을 만큼 그녀를 증오했다. 그토록 볼품없는 여인이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다니. 나중에 황자라도 낳으면 그녀가 황후 자리에 오를지도 몰랐다. 그리된다면 그야말로 벼락출세가 따로 없었다.

수원비는 자안궁에선 시종일관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지만, 경수궁으로 돌아오면 포악해지곤 했다. 그녀가 수원상에게 소리쳤다.

“어젯밤에도 현비의 패를 고르시다니… 황상께서 정말 눈이 멀지 않고서야…….”

수원상이 곧바로 그녀의 뺨을 때리며 얼굴을 굳혔다.

“담도 크지, 감히 황상께 불경을 저지르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수원비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따귀를 날리다니! 게다가 그녀는 수원상보다 더 직위가 높은 양비였다. 이는 명백히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이니, 궁녀에게 대신 수원상의 뺨을 치라고 분부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수원비가 고민하는데 수원상의 추상같은 호통이 내려앉았다.

“잘못한 걸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수원비는 반사적으로 파르르 떨며 웅얼거렸다.

“알아요.”

그녀가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도 전에 별안간 수원상이 무릎을 꿇었다.

“양비 마마께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깜짝 놀란 수원비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언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 동생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아 주셨어요.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해선 안 되었는데, 언니 말이 다 옳아요.”

수원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색도 많이 평온해져 있었다. 그녀가 수원비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원비야, 네가 궁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언니는 반대했다. 하지만 네가 고집을 피우니 어쩔 수 없이 네 청을 들어주었지. 명심하거라. 이 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단다. 언니로서 충고하건대, 항상 분수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괜스레 말썽을 피웠다가 일이 커진다면 나도 널 구해 줄 수 없어.”

수원비는 연신 그리하겠다고 답했지만 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수원상의 걱정이 지나치다고 여겼다. 경수궁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처소로 돌아가겠다며 일어섰다.

그녀의 처소는 이몽기의 처소와 가까운 편이었다. 힐끔 내다보니, 마침 학평관이 처소 앞에서 황제가 이몽기에서 하사한 상을 읊고 있었다. 그 목록을 들을수록 수원비는 가슴속의 불덩이가 커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도저히 이대로 지낼 수 없었다. 이러다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처소로 돌아온 수원비는 탁자 앞에 앉아 이몽기를 혼내 줄 방법을 궁리했다. 옆에 서 있던 그녀의 궁녀 은자銀子가 잔꾀를 내놓았다.

“마마, 그저 분풀이를 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주 쉬운 일이지요.”

수원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은자가 그녀 귀에 몇 마디 속삭였다. 수원비는 성에 안 차는 눈치였다.

“고작 그뿐이란 말이냐?”

“이번 일을 시작으로 자주 손을 쓰면 되지요. 두고 보십시오. 분명 타격이 클 것입니다.”

은자가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리 아둔한 여인이라면 매번 걸려들 게 뻔합니다.”

수원비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말대로 해 보마. 감히 폐하를 독차지하려 들다니, 그 정도 했으면 이제 양보를 해야지!”

* * *

한참이나 바라보았는데도 황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학평관은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위중청의 침술로 황제의 두통은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멍하니 넋을 놓는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번 자리에 앉았다 하면 한나절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예사였다.

말을 꺼내기는커녕 물 한 모금도 들이켜지 않는 모습은 성장을 멈추고 죽어 가는 식물을 보는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학평관의 속만 타들어 갔다.

결국 학평관이 몇 번 기침 소리를 냈다.

그제야 고개를 든 황제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내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상주서로 시선을 옮긴 황제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현비를 들라 하라.”

학평관은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현비가 오면 황제는 평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현비를 모셔올 사람을 보냈다.

잠시 뒤, 현비가 찾아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두 눈을 내리깔고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신첩, 황상을 뵈옵니다.”

황제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가시오.”

현비는 곧장 남쪽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수틀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수틀을 집어 들고 바늘을 머리에 가볍게 긁더니 열심히 수를 놓기 시작했다.

황제의 시선이 그녀의 옆모습에 잠시 머물렀다. 여전히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조금 전보다 긴장이 풀린 듯했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상주서를 읽기 시작했다.

두 사람간의 대화는 없었다. 벽에 걸린 서양 시계만이 끊임없이 소리를 낼 뿐, 방 안은 고요했다.

한참 뒤, 황제가 별안간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틀렸소.”

학평관은 그제야 현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지 꼿꼿했던 자세는 구부정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그녀는 곧장 허리를 펴고 본래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다시 허리를 굽혔고, 이번엔 어깨마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황제가 붓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신첩, 배, 배가 아픕니다.”

현비는 대답하기도 벅찼다.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결국 그녀가 배를 움켜쥔 채 뛰어나갔다.

학평관과 황제가 쏜살같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더냐?”

잠시 고민하던 학평관이 아뢰었다.

“아무래도 마마께서 배탈이 나신 듯합니다.”

잠시 후, 현비가 돌아왔다.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죄를 고했다.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황제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뛰쳐나갔다.

“…배탈이 아주 심하게 나신 듯합니다.”

황제는 난데 없는 사달에 진절머리가 난 표정이었다.

“다시 올 필요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 이르거라.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럽구나.”

오늘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아 마음을 안정시키려 불렀건만, 이런 일이 생기다니.

현비가 소화궁昭華宮으로 돌아왔단 소식은 다른 후궁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평소 현비가 불려가면 최소한 한 시진 뒤에나 돌아왔는데, 오늘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표정도 어두운 걸 보니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일찍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질투하던 비들은 이 소식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들 머지않아 자신의 차례가 오리라 믿는 눈치였다.

그중에서도 수원비가 가장 기뻐했다. 그녀가 머무는 운석궁雲夕宮은 소화궁과 가장 가까웠고, 서열을 따져도 현비 다음으로 높은 비였다. 자연히 다음은 그녀의 차례가 올 게 분명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황제는 잠시 산책을 하며 소화를 시켰다. 뒤따르던 학평관이 왠지 모르게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황제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거든 해 보거라.”

“예.”

학평관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시들어가는 국화처럼 얼굴 가득 주름이 져 있었다.

“소인이 위 태의를 현비 마마께 보냈는데, 마마께서는 배탈이 나신 게 맞았습니다.”

황제는 묵묵히 듣기만 할 따름이라, 학평관이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위 태의의 말로는 약을 세 첩 정도 먹으면 문제없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마마께서 기력이 쇠하셨으니 며칠간 황상을 보필하긴 어려울 거라며…….”

흘겨보는 시선이 닿자, 학평관은 몸을 움츠렸다.

“위 태의가 보기엔 누군가 마마께 파두巴豆(독이 있는 열매)를 드린 것 같다고 합니다. 해서 증상이 그리 심했던 것이지요.”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황제가 심상하게 물었다.

“누구의 짓이더냐?”

학평관은 저도 모르게 입이 바짝 말랐다. 그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조심스레 고했다.

“소화궁의 궁녀가 증언하길, 현비 마마께서 아침부터 약한 배탈 증상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전에 드신 거라곤 운석궁에서 보내온 떡이 전부라고 하옵니다.”

황제가 물음이 이어졌다.

“운석궁은 누가 머무는 곳이더냐?”

“양비 마마께서 묵으시는 곳입니다.”

양비? 황제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학평관이 얼른 고했다.

“양비 마마께서는 수 대인의 따님이자 단비 마마의 친여동생이십니다.”

황제는 그제야 어렴풋하게나마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원상에 비하면 여동생은 영 성미가 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현비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다 여기고 수를 쓴 듯했다.

후궁에 사람이 들어오니 강호가 따로 없었다. 궁에서 자라난 그는 암암리에 쓰이는 계책과 소리 없는 다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입꼬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궁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소란을 피우다니. 이번 일을 본보기로 삼아 엄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면, 그의 후궁은 영원히 조용할 날이 없으리라.

“가동에게 상세히 조사하라 이르거라. 진상을 밝혀낸 뒤에는 엄벌에 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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