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화
사흘에 걸친 긴 심사가 허무하리만치, 황제는 반 시진도 쓰지 않고 일을 끝냈다. 이내 일행을 데리고 승덕전으로 향하는 발길이 바람 같았다.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 태후의 기분은 절로 울적해졌다. 마음을 다해 고른 여인들인데 고작 사비만 선발하다니… 남은 이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종친 황족 자제들에게 보내려 해도 수가 너무 많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세 명을 더 골랐다. 차마 황제에게 청할 수 없었으니 직접 봉호를 내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 후궁이 얼추 구색을 갖출 수 있으리라.
서 태후는 황제가 천천히 후궁에 적응하리라 예상하고, 며칠간은 그를 찾아가거나 성가시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밤, 황제는 곧장 이몽기의 패를 뒤집었다. 황제가 비빈의 이름이 적힌 패 중 하나를 뒤집는다는 것은 그날 밤 합방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결정에 온 후궁이 발칵 뒤집혔다. 반응 또한 제각각이었다.
소식을 접했을 때, 수원상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녀는 빗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빗 끝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추문이 그녀를 불렀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수원상은 곧 정신을 차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평생 백천범을 위해 살 줄만 알았는데… 후궁을 채우자마자 곧장 패를 뒤집을 줄이야. 그래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가 있어야 옛사람의 흔적을 덮을 수 있을 테니. 묵용감이 과거에서 빠져나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황가의 사자를 위해 그녀는 마땅히 기뻐해야 했다.
서 태후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그저 이몽기가 앞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골랐을 뿐이었다. 그런 여인이 황제의 마음을 얻다니. 어딘가 흐리멍덩해 보여 푸대접을 받을 줄 알았건만! 예상을 깨고 가장 좋은 출발점에 선 셈이다. 서 태후는 이 일로 이몽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됨됨이가 어떻든 황제의 자손을 잇는 게 시급했으므로.
수원비는 이 일을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녀가 본 이몽기는 얼이 빠진 얼굴에 어딘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말하는 것마저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찌어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발탁이 된 것도 모자라 황제의 눈에 들다니. 보기와는 달리 능력이 꽤 가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만약 황제가 그녀를 제대로 보았다면 이몽기가 아닌 그녀의 패가 뒤집혔으리라.
황제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몰래 황제를 본 터였다. 처음엔 조금 무서웠다. 하얗게 센 그의 귀밑머리를 보았을 땐, 늙은이인 줄 알고 질겁했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볼수록, 그녀의 가슴은 어지럽게 내달렸다. 사슴 한 마리가 그녀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듯했다. 그녀는 더 살피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상상보다도, 황제는 너무나, 너무나도 준수한 사내였다.
예전에 큰언니에게 황제의 생김새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수원상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돌아온 대답도 그저 괜찮다는 투에 그치지 않았던가. 수원상의 눈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대체 어딜 봐서 괜찮은 수준이란 말인가? 황제는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할 만큼 수려했다. 하얗게 센 귀밑머리는 그의 외모를 흐리기는커녕 용맹한 기운을 돋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사비가 된 이상, 꼭 황제에 눈에 들고 말리라 다짐했다.
* * *
이튿날 아침, 이몽기에게 황제의 하사품이 도착했다. 학평관이 정전에 서서 큰소리로 황제의 교지를 읽었다.
“황상께서 현비 이 씨에게 상으로 옥여의 한 쌍, 청옥병 한 쌍, 동주와 남주 각각 열 알, 순금 비녀 두 쌍, 비단 두 필, 면사 두 필, 단자 두 필, 금박 한 봉, 은과 한 봉…….”
이몽기는 무릎을 꿇은 채 얼떨떨하게 듣고 있었다. 황제가 어째서 이리 많은 상을 내리는지 그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이 도위는 종삼품의 무관이었다. 문벌이 그리 높진 않았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파 하는 마음에 그녀를 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와 함께 선발 인원에 포함된 사촌 언니는 안타깝게도 두 번째 심사에서 떨어졌고, 그녀는 얼떨결에 최종 심사까지 통과했다.
그녀는 세 번째 심사에서 탈락할 예정이었지만 태후가 탈락 명단에서 또다시 몇 명을 통과시켰다. 머릿수를 좀 더 채우고자 하는 느낌이 강했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가장 앞줄에 서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황상의 눈에 들었다.
그녀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황제의 눈빛은 안개처럼 탁하여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발탁된 여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똑똑해 보였건만, 어찌 자신을 골랐을까? 다만 그녀가 사비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이 집안에 전해지면, 그녀의 아버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실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 태후도 상을 보냈다. 현비는 사비 중 가장 높은 위치였다. 후궁에서 태후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성의 표시로 상을 주어야 했다.
후궁도 생겼고, 패도 뒤집혔으니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셈이다. 언관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오랜 시간 조정을 시끄럽게 했던 간택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황제는 며칠간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드물게 미간마저 활짝 핀 채로.
조금씩 황궁에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유일하게 울적했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월규였다. 자신이 고른 이 중 한 명이 수원상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녀가 기홍을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저게 어딜 봐서 자매란 말입니까? 서로 날을 세우는 사이인 줄만 알았지요. 제 손으로 늑대를 끌어들인 셈이 되었습니다. 아이고, 생각할수록 속이 터집니다. 어찌 원수의 동생을 궁에 불러들였을까…….”
“단비께 원수가 뭐야. 황상께서 들으시면 뼈도 못 추리려고.”
기홍이 눈을 부릅뜨며 월규를 나무랐다.
“이미 지난 일이니 잊어 버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르는 거잖아.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단비께선 홀로 저택을 지키셨어. 그 충의가 놀랍지도 않니? 궁에 들어오신 뒤로는 경수궁에 머무르시면서 한 번도 구설에 오른 적이 없었어. 넓은 마음가짐에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분이니 노불야께서도 그렇게 좋아하시지.”
월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기홍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그러나 잠시 후, 월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언니, 황상께서는 왜 우리한테 선발을 맡기셨을까요? 간택이 소꿉장난도 아니고, 소문이라도 나면 황상의 명예만 실추될 텐데요.”
잠시 고민하던 기홍이 답했다.
“내 생각엔 황상께서 태후와 신하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인 것 같아. 후궁을 들이겠다고 하셨지만, 그 이상의 타협은 없으신 거지. 태후께도 태도를 명확히 하신 거고. 태후께서 이해하셨다면 후궁의 일로 더는 황상을 괴롭히지 않으시겠지.
황상께선 이번 일로 혼인을 통한 인맥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려 하셨을 거야. 비를 들이는 일은 단순한 절차일 뿐, 귀천을 가리거나 복잡하게 셈을 따지지 않으시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럼 황상께선 왜 현비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데요?”
월규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바로 여기였다.
기홍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건 황상께 직접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그리하여, 월규는 황제에게 직접 물어볼 마음을 먹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황제는 서재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월규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월규의 시선을 느낀 황제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더냐?”
“아, 아닙니다.”
월규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불경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눈을 뽑아야 마땅합니다.”
황제가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일어나거라. 눈을 뽑으면 일은 어찌 하려고?”
말투가 가벼운 걸 보니, 기분이 꽤 좋은 듯했다. 월규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황상, 소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사온데… 황상께 여쭤봐도 될는지요.”
“말하거라.”
“그날, 황상께서 무슨 이유로 현비께 패를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서?”
이미 던져진 패였다. 월규는 과감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소인이 보기에 현비께서는 용모든 재능이든 그리 출중하지 않으신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황상께서는 사비 중 으뜸의 자리를 내리셨지요. 현비께서 후궁을 돌보신다면, 다른 마마들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시어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걱정이옵니다……. 황상, 정말 현비 마마가 마음에 드시옵니까?”
황상은 침묵을 지켰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
황제는 담담히 대꾸한 뒤, 화제를 돌렸다.
“기홍이 곧 출가를 할 터인데, 후임은 잘 선별하였느냐?”
“예. 기홍 언니 말로는 춘도春桃라는 아이가 손도 빠르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일을 넘겨받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기홍도 갈 곳이 생겼는데, 너는? 후궁은 싫다고 하니, 다른 이라도 찾아보거라. 궁 안에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말만 하거라. 짐이 바로 혼사를 정해 주마.”
월규가 앓는 소리를 냈다.
“폐하, 이런 일로 소인에게 농을 하지 마시어요. 궁에는 전부 내감 공공뿐인데, 설마 소인과 공공을 맺어 주시려는 것입니까?”
황제가 웃으며 대꾸했다.
“위 태의도 있지 않느냐? 몇 년간 그를 마음에 품은 게 아니고? 짐이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언제든 말만 하거라.”
월규는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예전의 초왕야가 장난을 쳤다면 그녀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린 왕비와 함께 있으면 위풍당당하던 초왕야도 곧잘 무너지곤 했으니까. 그러나 황제가 된 이후, 그는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왜 장난을 친단 말인가? 게다가 위중청을 마음에 품었다는 얘기까지 꺼내다니.
얼굴이 새빨개진 월규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소인, 억울하옵니다, 황상. 소인이 감히 위 태의를 마음에 품다니요. 소인과 위 태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위 태의는 소인과… 소인은 평생 시집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소인은…….”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재빨리 밖으로 도망쳤다.
황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앞에서 저리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월규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월규가 규율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계속 지금처럼 방자하고 자유분방했으면 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떤 흔적들은 결국 세월의 긴 강 아래로 침전하지 않겠는가. 그는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뛰쳐나온 월규는 커다란 나무 주변을 빙빙 돌며 배회하는 영구를 발견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에 월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알겠다는 표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기홍이 곧 시집을 간다니 마음이 조금은 심란하겠지.
월규는 탄식했다. 창칼로 찌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사내일수록, 정에 물들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듯했다. 영구도, 황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