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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9)화 (498/1,192)

제499화

방 안의 수녀들은 조용히 서서 황제가 오길 기다렸다. 오늘이 그들의 인생에 한 획을 긋는 날이다. 방이 붙기만 기다리는 과거 응시생처럼, 수녀들은 불안함과 벅찬 감동을 느끼며 초조함을 억눌렀다. 모두가 높은 작위를 바랐지만 결과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제가 심히 궁금했다. 그는 초왕 시절부터 못생긴 외모에 흉포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집안 형제들과 아버지는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며 사실은 아주 준수한 외모에 조용한 성격을 지녔다고 일러 주었다.

수녀들은 궁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겁에 질려 있었지만, 서 태후를 만난 뒤에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서 태후에게도 인정을 받은 인재들이지, 어찌 황제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마음속에는 차츰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사실 진작에 황제를 초청했지만 정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과정을 태후에게 맡겼다.

그러나 서 태후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가 모든 일을 맡고 수녀들의 지위와 처소를 정한다면,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색을 갖추긴 했어도 비빈들은 황제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없을 터였다. 아무렴, 황제가 후궁에 발을 들이기나 할까?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들이 총애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엄격하게 고르고 고른 뒤에 또다시 선발해야 그나마 쓰임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일은 다 타협할 수 있다고 해도 이 일만큼은 서 태후도 양보할 수 없었다. 황제가 바쁘다면 기다리면 그만이다. 결국 방에 있는 모두가 황제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수녀들의 인내심과 내공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지친 몇몇 수녀들의 어깨가 무너지고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이들은 황제가 오기 전에 서 태후의 선에서 해결되었다.

* * *

황제는 잠시 낮잠을 잔 뒤, 월규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학평관이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고했다.

“황상, 태후 노불야께서 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황상께서 작위를 내려 주시기만 기다린다고 합니다.”

황제가 흠칫 놀랐다.

“태후께서 낮잠도 주무시지 않았단 말이냐?”

“예, 태후 노불야와 단비께서 수녀들을 모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서 태후는 온갖 방법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니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월규가 매듭을 묶을 수 있도록 두 팔을 벌렸다.

“어가를 준비하거라. 옥부전玉芙殿으로 가겠다.”

학평관은 곧장 밖으로 나가 어가를 준비했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영구가 호송을 위해 어가 옆에 섰다. 어가에 올라탄 황제가 월규를 불렀다.

“월규 넌 짐과 함께 가자꾸나.”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홍도 불러오너라.”

결국 황제는 일행을 거느리고 궁 서쪽으로 향했다. 옥부전은 간택을 위한 전용 궁전으로, 큰 규모만큼 방도 많았다. 수녀들은 나무패에 적힌 번호대로 방을 배정받았다. 세 번의 심사를 거치고 궁에 남은 이들은 대전에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꼿꼿이 서 있던 수녀들은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선 황제의 시야에는 그들의 새카만 머리만 담겼다.

서 태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곤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황상이 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태후께서 낮잠도 주무시지 않고 이리 기다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아들의 잘못입니다.”

사죄를 하는 묵용감의 얼굴은 한없이 담담했다. 물론 서 태후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얼른 웃으며 말을 돌렸다.

수원상도 수녀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묵용감의 눈길이 닿는 일은 없었다. 묵용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모두 일어나시오.”

수녀들은 또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몹시 궁금하긴 해도 고개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락도 없이 황제와 눈을 마주치는 일은 목이 날아갈 정도의 불경죄였다. 무엇보다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상상보다 무서웠던 탓에 수녀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황상, 시작하시지요.”

묵용감의 표정을 살피던 서 태후가 수녀들에게 말했다.

“다들 황상께서 잘 보실 수 있도록 얼굴을 드세요.”

그제야 수녀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모두의 눈꺼풀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차마 황색 빛 그림자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 태후가 명부를 들고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이 여인은 송 태부太傅 집안의 송교련宋巧蓮입니다. 참으로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지요. 직접 쓴 이 시 좀 보세요. 운율도 뛰어난 데다, 이 글씨는 어떻고요. 한눈에 봐도 진중하고 영리한 성격을 알 수 있지요.”

그녀가 얇은 종이를 들어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

황제가 고개를 돌리더니 월규를 바라보았다. 월규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옆에 서 있는 기홍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은요?”

서 태후는 안타까움이 깃든 한숨을 내쉬곤 다른 여인을 소개했다.

“다음은 이 도위都尉(옛 무관 명) 집안의 이몽기李夢琪라는 여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복스러운 얼굴은 타고났지요. 훗날 황상도 좋은 운을 얻게…….”

황제가 시선을 올려 서 태후가 말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경직된 얼굴이었지만 단정하게 서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시선이 한참 동안 그녀에게 머물렀다. 마침내 황제가 한 마디를 토해냈다.

“남기지요.”

드디어 사비 중 한 사람이 결정되었다. 서 태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찜찜함도 남은 터였다. 이몽기라는 여인은 좀처럼 서 태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우둔해 보이는 외모 하며 붙임성도 없어 보이니, 황제의 냉대를 받을 게 뻔했다.

황제는 이 모든 일들이 귀찮고 성가셨다. 결국 월규와 기홍을 부른 그가 대나무 표찰을 나눠 주었다.

“태후 노불야께서 심혈을 기울여 엄선하신 이들이다. 너희는 짐 곁에 오랜 시간 머물렀으니 대신 유심히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이가 있거든 표를 넘기거라.”

황제의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다. 수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만 삼켰다. 오직 서 태후만이 귀를 의심하며 벌떡 일어섰다.

“황상, 대체 이게… 어찌 이런 일을…….”

그녀는 기가 막힌 나머지 할 말조차 잊고 말았다.

단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큰일을 궁녀 두 명에게 맡겨 버리다니. 장난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저들의 아버지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오장육부가 뒤틀릴 일이 아닌가! 다들 황제의 진중함을 높이 샀지만, 가끔 그는 너무나도 황당무계한 일을 저질렀다.

하얗게 질려 버린 서 태후의 안색을 알아차린 기홍이 수습에 나섰다.

“노불야,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황상께서 요즘 밤늦게까지 상주서를 보시느라 눈이 피로하셔서 혹여나 잘 고르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에 그리 분부하신 듯합니다. 소인들이 유심히 본다 해도 마지막엔 황상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서 태후는 어떻게든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이 순간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었다. 계략을 쓴다 해도 들켰다간 또 얼마나 긴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가도 알지. 황상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했으니 자네 안목이라면 애가도 믿고말고.”

서 태후는 평소에도 기홍을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예친왕과 혼사를 올리면 한 식구가 되지 않는가. 항렬을 따지면 황제의 형수가 되는 셈이기도 했다. 형수가 시동생의 부인을 골라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서 태후가 기홍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보게. 애가가 주의할 점을 알려 줄 테니.”

기홍은 서 태후의 말뜻을 깨닫고 곧장 다가갔다. 서 태후는 명부에 있는 이름 몇 개를 가리키며 반드시 골라야 할 여인을 조용히 일러 주었다. 기홍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수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내 기홍의 손에 들린 표찰은 서 태후가 말한 여인들에게 쥐여졌다. 그중에는 수원비도 있었다.

표찰은 받은 수원비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수원상에게 눈을 깜빡였다. 정작 수원상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후궁에서 편히 지낼 수 없을 터였다.

이 모든 장면은 월규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수원비를 모르는 월규는 그저 한 여인이 수원상에게 으스대는 줄만 알았다. 수원상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여인의 눈길을 피했다.

적의 적은 친구나 다름없었다. 월규는 대열 안으로 들어가 표찰을 수원비에게 건넸다. 두 개의 표찰을 얻은 수원비의 눈빛이 더욱더 기세등등해졌다. 이대로라면 사비 자리는 떼 놓은 당상이었다.

월규는 기홍과 달리 마음에 드는 이에게만 표찰을 주었다. 수원비 외에는 기홍이 고른 여인과 전부 다른 여인을 골랐다.

결국 문제는 이몽기와 수원비 외에 몇 명을 더 뽑느냐로 좁혀졌다. 서 태후는 사비에 이어 황후와 귀비까지 최소 여섯 명을 뽑고 싶어 했다. 그러나 묵용감의 태도는 완고했다. 사비만 뽑을 예정이며, 황후도 귀비도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기홍과 월규의 선택으로 범위가 줄어든 후, 묵용감은 두 사람이 고른 여인 중 각각 한 사람씩을 골라 네 명을 채웠다. 그렇게 그의 임무가 끝났다.

서 태후는 어이가 없다 못해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오랜 시간 궁에서 지냈지만 이토록 성의 없는 간택은 처음 보았다. 그래도 후궁에 사람이 채워졌으니 황제가 책임을 다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수가 적은 만큼 두루두루 아껴주면 대를 이을 황자도 생길 터였다.

사비의 봉호는 그 자리에서 내려졌다. 이몽기는 현비, 수원비는 양비, 기홍이 고른 사이란史爾蘭은 숙비, 월규가 고른 오석방吳惜芳은 덕비에 올랐다.

황제의 봉호를 끝으로 간택은 원만히 마무리되었다. 황제가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서 태후가 그를 붙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황상, 아직 더 남았습니다.”

규율에 따르면 첩여婕妤와 소의昭儀, 미인美人 등도 봉해야 했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함께 마조를 둘 인원을 원치 않으셨습니까? 진행을 맡을 사람까지 구했는데 아직도 부족하신 겁니까?”

“…….”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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