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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8)화 (497/1,192)

제498화

하루하루 추워졌지만 동월국의 간택은 날이 갈수록 그 열기를 더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신하들이 딸이 입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눈에 띄지 못하면 딸아이의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간택에 목숨이라도 건 듯 다들 전력을 다했다.

이는 묵용감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묵용한처럼 후비로 신하를 견제할 황제가 아니었고, 가족의 관직도 따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수원상만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미리 입궁하고도 사비 자리에 오르지 못한 탓에 수민 대학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가 물러난다면 자리를 메울 사람은 많았다.

기회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했다. 황제의 눈에 들기만 하면 모든 일이 가능해 보였다. 덕분에 수민은 인기 절정의 인물이 되었다. 다들 그를 찾아가 선발에 들 수 있게 해달라며 통사정을 해 댔다.

사람들에게 한참을 시달린 수민은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나중엔 집안 형제자매들마저 찾아와 사정할 정도였다. 그의 처지는 점점 더 난처해졌다. 간택을 원하는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의 부인마저도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출가 전인 딸아이를 궁에 보내 그 애의 운을 믿어 보자는 것이었다. 큰언니가 가까이에서 돌봐 줄 테니 고생은 적을 테고, 큰언니가 총애를 받지 못했다 해도 작은 애의 운이 좋다면 상황은 달라질 지도 모른다는 게 부인의 기대였다.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수민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다들 딸아이를 입궁시키려 물불 가리지 않는다지만, 후궁이 그리 좋기만 한 곳이던가? 황제는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은 후궁이 텅 비어 있어 고요해 보이지만, 비빈으로 가득 찬 후궁에서 피바람이 불지 않은 역사가 없었다.

여인들이 마음먹고 싸우기 시작하면 참으로 지독했다. 각종 음험한 계략이 난무했고,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조정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른 이들의 어깨를 짓밟고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작은 물고기가 자그마한 새우를 먹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기세를 불린 자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얻고, 그렇지 않은 자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 법칙 앞에서 자신의 딸아이라고 예외가 되겠는가? 수민은 화를 참지 못하고 부인을 한바탕 혼냈다. 그가 노기등등한 채로 서재에 오니 막내딸 수원비修元霏가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막내딸인 수원비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탓에 조금 오만한 성정으로 자라났다. 그녀가 수민의 어깨를 두드리며 애교를 부렸다.

“아버지,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우리 가문은 근간이 아주 탄탄하지 않습니까? 황상께서는 아버지를 의지하시고, 언니는 후궁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가의 영예는 예전 황보 가문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수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심하게 넘어지는 법이다. 황보 가문이 그리되지 않았더냐? 군주를 모시는 일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이 아비도 살얼음 위를 걷듯 늘 전전긍긍하지 않느냐.”

수원비가 어여쁘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께서 너무 신중하신 겁니다. 예전의 백 승상을 보고 좀 배워 보십시오.”

수민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자가 하던 짓을 배우다 귀양이라도 가란 말이더냐?”

수원비는 혀를 빼꼼 내밀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딸의 얼굴을 본 수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비 된 자가 어찌 딸의 속내를 모를까. 수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이 이 아비 비위를 맞출 리는 없고, 분명 청이 있는 것이겠지. 그리 입궁하고 싶은 것이냐?”

수원비가 줄곧 하고 싶던 말이었다. 수원상이 단비가 되었다는 소식이 저택에 전해지자 집안 식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담담했고 어머니는 울상이 되었다. 몇몇 첩들과 서자 서녀들은 탄식을 내뱉었지만, 고소해하는 기색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저택에서는 적비 아래에 있었던 큰언니가 궁에 들어가니 훨씬 급이 낮아졌다. 이건 수가를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던가.

사실 그녀는 수원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원상은 출가 전, 늘 그녀를 혼내고 가르쳤다. 나이도 어리면서 걸핏하면 『여계女誡(여성 교양에 관한 책)』를 들먹였다. 정말 가정 교사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혈육은 혈육인지라 수원상이 그런 꼴이 되니 그녀의 면도 서지 않았다. 수원비는 어떻게 해서든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궁에 들어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수원상보다 예뻤고 붙임성도 좋았다. 수민과의 관계를 보나 그녀의 조건을 보나 황상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입궁만 하면 적어도 사비 안에는 봉해질 테니 땅에 떨어진 수가의 체면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수원비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수가의 체면을 세우려고 애쓰는 거예요.”

수민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다 목숨을 잃으면 어찌하려고?”

“어떻게 목숨을 잃겠어요? 아버지랑 언니가 있는데 감히 누가 손을 대겠어요?”

수원비가 맹랑하게 말했다.

“황상께서 언니를 멀리하셔도, 태후 노불야께서는 좋아해 주시잖아요. 제가 궁에 들면 노불야께서 절 돌봐 주실 거예요. 무얼 그리 겁내세요.”

수민은 대꾸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가거라. 이 아비도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수원비는 어두워진 수민의 안색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 * *

간택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국한된 지역에서만 선발했기 때문에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늘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호부 관원들도 이번엔 서둘러 명부를 작성해 수민에게 전해 주었다. 수민이 먼저 심사를 거친 뒤, 서 태후에게 전해 다시 한번 심사를 보았다.

이렇듯 간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열을 올렸지만, 황제는 예외였다. 그로 인해 비롯된 사태건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겼다. 그의 상황을 잘 아는 수민에게는 명부의 무게가 남달랐다. 곧 입궁할 수녀들을 생각하면 그가 다 안타까웠다.

명부를 살펴본 태후가 뜻밖의 질문을 건넸다.

“애가가 알기로는 수 대인에게 출가 전인 딸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 명부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수민은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허리를 굽히며 미소를 지었다.

“신의 집안에는 이미 궁에 든 분이 있으니, 또 이름을 넣었다가 시답잖은 말이 오갈 듯하여…….”

“어찌 그런 걸 따진단 말인가? 원상이는 황제가 잠룡 시절 저택에 들인 부인이고, 이번에는 정식 간택일세. 자네는 일품 대원이 아닌가. 집안에 꽃 같은 딸이 있는데도 쉬쉬하려 하다니, 설마 애가의 곁으로 보내기 싫은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묵직한 뼈가 담겨 있었다. 화들짝 놀란 수민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노불야,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실 선발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아 많은 이들이 사정을 봐달라며 저택을 찾아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가에서 이름을 올렸다간 가문의 명예에 해가 될까 두려웠습니다.”

“애가가 자네의 뒤를 봐주고 있는데 누가 감히 시답잖은 말을 한단 말인가.”

서 태후가 품에 안은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솔직히 털어놓겠네. 며칠 전에 단비의 동생이 궁에 찾아왔네. 얼굴도 아주 예쁘고 붙임성도 좋더군. 원상이와 성격이 다르니 각자 매력이 있지 않은가? 애가는 그 애가 퍽 마음에 드네. 이렇게 어여쁜 여인이라면 황상도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지. 애가의 말뜻을 이해하겠나?”

수원상이 너무 조용한 탓에 황제의 마음을 뺏지 못했지만, 수원비처럼 밝고 쾌활한 성격은 황제의 눈에 들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수민은 속으로 침음했다. 그날 청을 거절하니 이 계집애가 곧장 서 태후에게 청을 드린 게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수민은 딸아이의 운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서 태후와 단비가 뒤를 봐줄 테니 다른 수녀들보다 수원비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서 태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잘 알겠사옵니다.”

* * *

간택의 날이 밝았다. 아침 해가 고개를 다 내밀기도 전부터 서측 궁 문 앞은 유난히 떠들썩했다. 일렬로 늘어선 마차 대열이 질서정연하게 서직문을 통과했다. 마차에 달린 등롱에 각 집안의 성씨가 적혀 있었다. 빽빽한 등롱의 행렬은 꼭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았다.

궁 문 근처에는 요화전瑤華殿이라는 궁전이 있었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똑같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패를 받으러 가게 된다. 이때부터는 성씨와 신분을 떠나, 허리에 달린 나무패가 자신을 대표하는 전부였다.

패를 받은 이들은 취미전翠微殿에서 첫 심사 결과를 기다린 뒤, 다시 한번 심사를 거쳐야 했다. 여기서 패를 받지 못한 이들은 아쉽지만 돌아가야 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여쁜 여인들 앞에서, 서 태후는 누구를 골라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전부 다 마음에 드는 데다, 혹여나 황제와 인연이 있는 여인을 놓칠까 싶어 선택이 쉽지 않았다. 서 태후가 망설일 때마다 단비가 정확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녀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잘 꿰뚫는 덕분에 서 태후의 빠른 결정을 도왔다. 그녀를 향한 서 태후의 신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 심사는 수녀들의 자는 모습을 관찰했다. 코를 골거나 이를 갈진 않는지, 잠꼬대를 하진 않는지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냄새가 나거나 심하게 뒤척이는지도 확인했다. 결국 두 번째 심사에서도 한 무리가 우르르 탈락하고 말았다.

세 번째 심사에선 수녀들의 재능을 평가했다. 시를 포함한 각종 문예, 자수 공예 등을 일일이 확인한 뒤, 또 한 무리를 탈락시켰다. 세 번의 심사를 거치고 나니 남은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부 궁에 들일 수 있을 정도였다.

단비는 무리에 섞인 수원비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거만한 성격의 동생은 자신이 입궁하면 판을 뒤집고 집안의 체면을 세울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수원비가 갖은 방법으로 성가시게 하니 어쩔 수 없이 돕고 있지만, 머지않아 동생이 결정을 후회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그녀는 그저 수원비가 옳은 선택을 했기만을 바랐다. 어린 동생이 가문을 빛낼 수 있다면 그녀는 언니로서 진심으로 기뻐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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