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화
서 태후로서도 영 언짢은 상황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상, 애가의 말을 들은 겁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원상이 궁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작위가 없습니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내릴 생각이란 말입니까?”
황제가 곧바로 답했다.
“후궁의 일은 노불야께서 처리하시지 않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짐은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서 태후가 슬며시 그를 떠보았다.
“애가는 원상이가 좋습니다. 황상이 잠룡 시절일 때 들인 왕비가 아닙니까? 자격도 충분하고 가문도 나쁘지 않으니 중궁에 머물기에…….”
그러나 황제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황후는 안 됩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서 태후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성품이며 외모며 모두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리 단정하고 우아한 여인이 황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수원상은 차라리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체 그녀의 체면을 얼마나 깎아내려야 만족한단 말인가?
황제가 고개를 들더니 수원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태후께서 그리 단정하고 우아하다고 하시니, 단비端妃에 봉하지요.”
서 태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저 몇 마디 따져 물었다고 어미에게 이리 대놓고 으름장을 놓다니.
단비는 사비에도 들지 못하는 후궁이었다. 관례대로라면 왕이 황위에 오를 때 측왕비는 최소한 사비 중 한자리에 봉하는 법이다. 한데 언쟁이 오갔기로서니 사비도 아닌 단비에 봉하겠다니……. 그녀의 부친인 수 대학사를 생각하면 너무나 격이 떨어지는 자리였다.
수원상 역시 피가 들끓었지만 얼굴엔 고운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신첩, 폐하의 성은에 황공할 따름입니다.”
황제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짐이 단비에 봉해도 원망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오?”
“신첩이 어찌 감히 원망을 하겠습니까.”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입도 벙긋 못 할 자리요. 잘 참고 있으면 천하를 굽어살필 황후가 될 것 같소?”
황제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그녀를 원치 않는 기색이 뚜렷했다.
서 태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좋게 타이르려 애썼다.
“황상, 그렇게는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원상이는 황상과 결발結髮 부부夫婦(남녀가 처음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가…….”
별안간 쾅 소리가 났다. 탁자를 내리친 황제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싸늘하다 못해 아팠다.
“짐에게 결발 부인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었지요.”
말을 마친 그는 결국 자리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서 태후와 단비에 봉해진 수원상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 * *
천천히 눈을 뜬 백천범은 흐릿한 정신을 더듬었다.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분명 꽃밭에서 꽃가지를 자르고 있었건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내리쳤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다시 눈을 뜨니 낯선 이곳이었다.
방 안을 둘러보니 궁을 벗어나지는 않은 듯했다. 무양 공주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그녀는 곧장 남농화를 떠올렸다.
역시나 몸을 일으키자마자 문 앞에 남농화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깼네.”
백천범은 손발을 조금씩 움직여 보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침착하게 물었다.
“이런 방법까지 써서 날 초대한 이유가 뭐야?”
“초대?”
남농화는 그녀의 어휘가 그저 우습기만 했다.
“밖에서 데려온 사생아 주제에. 내가 너한테 뭐 하러 예의를 차려야 하지? 똑바로 대답해. 문우 오라버니한테 혼인하겠다고 했어?”
“그것 때문이었구나.”
백천범의 태도는 침착하기만 했다. 남농화는 치솟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녀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네가 뭔데 혼인을 해, 걘 내 거야!”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남농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노려보던 남농화가 이를 갈았다.
“두고 봐, 네가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네가 뭐라고?”
“내가 그 애와 알고 지낸 시간만 몇 년인데, 우리 사이에 아무런 감정도 없을 것 같아?”
“나랑 걔 사이에는 없을 것 같고?”
“웃기는 소리.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걔가 널 정말로 은애한다고 생각해? 그저 네 신분을 빌려서 남제화랑 황위를 다투려는 거야.”
백천범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 둘이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는데?”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남농화가 웅얼거렸다.
“…어쨌든 우리 둘이 알고 지낸 것보단 짧아.”
* * *
평락궁의 분위기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무양 공주가 사라진 후 발칵 뒤집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궁녀와 내감들 사이로 남 장군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그가 좁은 화단에 들어서니 꽃송이가 후드득 땅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꽃잎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꽃잎이 가득 쌓인 오솔길에 멈춰선 남 장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또다시 도망쳤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솟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가 도망치는 일은 불가능했다. 매일 그녀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에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를 납치했을 가능성이 컸다. 설마 묵용감 쪽에서 침투했단 말인가? 그랬다면 어째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의 인내심은 타들어 가는 향처럼 짧아지기만 했다. 그의 표정은 점차 바위처럼 굳었다. 그때, 제법 커다란 표범이 달려들었다. 그가 미동도 하지 않으니 표범은 불안한 듯 그의 다리에 머리를 문질렀다. 백천범이 보이지 않아 가장 불안해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점박이였다.
그제야 남문우가 몸을 숙여 점박이의 머리를 문질렀다.
“걱정하지 말고 꼼꼼히 맡아 봐. 어디로 간 것 같아?”
그의 말을 알아들은 점박이가 잽싸게 꽃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지에서 떨어진 꽃잎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점박이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이쪽에서 저쪽까지, 저쪽에서 또 이쪽으로 빠르게 배회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거나 뛰어오르기도 했다. 어느 수간, 점박이가 높게 뛰어오르더니 왼쪽으로 달려갔다. 남문우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소식을 듣고 평락궁으로 오던 남류청이 그들과 마주쳤다.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찾은 것인가?”
남문우는 앞서 달리는 표범을 가리켰다.
“이 애가 알고 있습니다.”
남류청은 가마를 든 내감들을 시켜 남문우를 뒤쫓게 했다. 한참 뒤, 남문우와 남류청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백천범이 어디에 있는지,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 * *
작은 칼을 쥔 남농화가 작은 칼을 든 채 음험하게 웃어 보였다.
“걘 네 등장이 신선했을 뿐이야. 그저 네 얼굴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라고. 만약 이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면, 그래도 널 봐 줄까?”
백천범이 옅은 미소를 짓더니 허리춤에서 남문우가 주었던 비수를 꺼냈다.
“누가 누구를 망가뜨리는지 단언할 수 없지.”
그녀의 비수를 알아본 남농화가 소리쳤다.
“그 호신도가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보면 몰라? 그 애가 줬어.”
남농화가 노발대발하며 호위병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칼을 뺏어 오지 않고!”
남농화의 호위병들 중 두 사람이 백천범에게 다가왔다. 백천범은 침착하게 몸을 낮추고 비수를 휘두르면서 반대편 손으로 왼쪽에 있던 호위병을 때렸다.
두 호위병은 무양 공주가 무예를 익혔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이윽고 비수가 번쩍이는 빛을 내뿜자 그들은 급히 몸을 틀어 피했다. 그때 백천범이 손을 높게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맞아라!”
두 호위병은 비수가 날아오리라 생각하고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비수에 맞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비수는 던져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치지 않았지만,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다른 호위병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본 듯 한쪽에 서서 키득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농화가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쓸모없는 것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한 무리의 사내들이 여인 한 명을 때리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게다가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무양 공주가 아닌가. 호위병들이 주춤거리는데 문에 육중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다들 깜짝 놀라는 사이 검은 그림자가 그들을 덮치더니 맹수의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백천범을 발견한 점박이가 한달음에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구리 방울처럼 커다란 두 눈으로 남농화를 노려본 점박이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백천범이 점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황궁에서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작고 온순한 동물을 길렀다. 점박이와 같은 표범은 드물었기에, 남농화는 바들바들 떠느라 칼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별안간 점박이가 남농화에게 다가가며 큰소리로 포효했다. 흠칫 놀란 남농화가 칼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대로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옆에 있던 호위병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적잖이 놀랐는지, 남농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백천범은 점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무랐다.
“다음부턴 이렇게 놀라게 하면 안 돼. 그만 돌아가자. 어서.”
점박이는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녀 곁을 천천히 따랐다.
파들파들 떨던 남농화가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것.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네 아, 아…….”
백천범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남농화가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진득한 선홍빛 피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다시 고개를 돌리니 문밖에 서 있는 남문우가 보였다. 늘 밝던 그의 얼굴은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처럼 보였다. 백천범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뭔가를 깨닫고 입술을 달달 떨었다. 그가 남농화의 가슴에 칼을 던졌다!
“너… 남농화를 죽인 거야?”
“저 정도로 죽진 않아.”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남문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자.”
남문우의 손에 이끌려 나온 백천범은 화려한 자태로 서 있는 남류청과 마주했다.
“모황.”
백천범이 손을 모으며 예를 갖췄다.
남류청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놀랐지. 전부 모황의 잘못이다. 농화를 너무 내버려 두었더니 이리 사고를 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