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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6)화 (495/1,192)

제496화

예친왕은 길일을 받아 시월 열아흐레로 혼삿날을 정했다. 황제는 특별히 기홍의 혼수를 신경쓰라는 분부를 내렸다. 명을 받든 학평관은 후원 곁채에서 기홍의 혼수를 손수 준비했다. 혼례복엔 녹하가 직접 수를 놓았다. 석양에 물드는 구름을 수놓은 자태가 가히 일품이었다.

당직실에 기홍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월규는 어선방으로 향했다. 역시 기홍은 물독 주변에서 소태감과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월규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곧 새 신부가 될 터인데, 조금 쉬지 않고요. 몸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야 시집을 잘 가지 않겠습니까.”

기홍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로 왔어?”

“황상께서 날짜가 정해졌으니 앞으로 어찌할 거냐고 물으십니다.”

기홍이 잠시 고민하다 대꾸했다.

“녹하처럼 궁에서 일하고 싶어. 저택 후원에만 묶여 있으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할 거야.”

“황상께서는 허락하실 겁니다. 워낙 언니의 손맛을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다른 음식을 먹으면 불편해하실 겁니다. 다만 예친왕께서도 언니를 황궁에 보내는 게 쉽진 않으실 겁니다.

예친왕께서 서비 자리를 하나 늘려 달라고 오랜 시간 청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언니를 중시한다는 건데, 왕부의 서비가 궁에서 일을 한다니요.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기홍이 고개를 떨궜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황상의 곁을 지키고 싶은걸. 내가 떠나면 마음 아파하실 거야.”

월규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건 다 옛날이야기예요. 수원상이 입궁해서 경수궁에 머물고 있잖아요. 경수궁은 봉명궁 다음으로 좋은 궁전인데, 거기 있다는 건 태후 노불야께서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

두고 보세요. 머지않아 수원상은 봉명궁으로 가게 될 테니까요. 그땐 황상과 황후가 한 쌍을 이루게 될 텐데, 누가 왕비 마마랑 세자 아기씨를 떠올리겠어요. 아무리 큰 상처라 해도 시간이 약이라는데, 황상도 예외는 아니셨던 거죠.”

그래, 시간이 지나며 변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던가. 기홍은 문득 영구를 떠올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아니래. 그렇게 좋았어도 결국엔… 좋게 생각하자. 황상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시잖아. 왕비 마마만을 그리워하면서 평생 홀로 지낼 순 없어.”

“저도 알아요.”

월규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저 좀 괴로워서 그래요. 수 대인이 벌써 간택 업무를 시작했다나 봐요. 이제 후궁이 시끌벅적해질 텐데 누가 우리 왕비 마마를 기억하겠어요. 오늘 총관리인께서 수원상한테 알랑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어찌나 화가 나는지, 가 대인도 마찬가지예요. 역시 영 대인이 더 낫다니까…….”

월규는 황급히 말을 끊고는 기홍의 안색을 살폈다.

“언니랑 영 대인, 정말… 안 되는 거예요?”

기홍이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옛날 일을 말해서 뭐 해.”

“너무 안타까워서 그렇죠. 월향이는 보전 형부한테 시집가고, 녹하 언니는 가 대인한테, 언니는 영 대인한테 시집을 간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다들 제 짝을 찾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 쌍을 빠뜨렸네.”

기홍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너랑 위 태의도 결국 안 되었잖아.”

“우린 시작도 안 했으니 빼고 말고 할 것도 없죠.”

사실 월규는 지금도 위중청을 떠올리면 그날 일이 엄습하곤 했다. 그날 밤 위중청 때문에 늦게 잠들지만 않았더라도, 그리 쉽게 왕비와 세자가 납치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월규의 머릿속에 끔찍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쯤, 그녀의 시야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담겼다.

“영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분명 언니를 찾아오신 거겠죠.”

기홍이 고개를 돌렸을 때 영구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오늘 황상의 어선 목록입니다. 총 관리인께서 제게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기홍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영 대인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은 소복자에게 시키시면 될 것을… 총관리인께서 어찌 번거롭게 영 대인을 시키셨을까요?”

“쿨럭,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월규가 물었다.

“아직 볼일이 남으신 겁니까?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기홍이 잽싸게 월규를 붙잡았다.

“네가 자리를 뜨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니. 예친왕 전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부녀자의 도리를 어기는 게 된다고.”

방금 내뱉은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얼어붙은 영구의 마음을 단번에 깨트리는 한마디였다. 영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몰라 성의만 표한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

그는 기홍의 손에 물건을 쥐여 준 후,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선물을 받아 든 기홍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월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와, 이런 최상급 옥을 어디에서 구했단 말입니까? 설마 하사품은 아니겠지요?”

그제야 기홍이 선물을 바라보았다. 잉어가 조각된 옥패였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기홍은 손에 쥔 옥의 감촉을 느꼈다. 영롱하고 투명하면서 매끈한 게 최상급 옥이 틀림없었다.

기홍은 옥패를 힘껏 쥐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 *

수원상이 황제에게 퇴짜를 맞았다는 소식에 서 태후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요즘 황상이 바쁘긴 합니다. 애가에게도 며칠 동안 인사 한번 오지 못했으니까요. 부디 황상을 책망하지 마세요.”

수원상이 단아한 웃음을 보였다.

“노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상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다망하신 것을요. 소첩은 그저 황상을 존경할 뿐입니다.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며칠 푹 쉬는 게 좋겠어요. 이제 곧 바빠질 테니까요.”

서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간택이 시작되었습니다. 선발 인원이 궁에 들어오면 우리도 바빠질 겁니다. 그 후엔 황상이 모두에게 지위를 정해 줄 것입니다.”

수원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아리따운 목선이 드러났다. 그녀가 온순하게 말했다.

“노불야, 소첩이 궁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봉호를 받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명분도 없이 간택에 나섰다가…….”

“조급해하지 마세요. 황제도 다 생각해 둔 게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서 태후도 초조하긴 매한가지였다. 묵용감과 만나게 해 주려고 승덕전으로 보냈건만, 수원상은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이리된 이상, 후비들이 지위를 받기 전에 수를 써야 한다. 지위도 없이 경수궁에 머물렀다간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이고, 수 대학사의 체면도 곤두박질치는 일이었다.

두고 볼 수만은 없던 서 태후는 황제를 더 압박하기로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황유도를 불렀다.

“승덕전에 가서 애가가 어선을 들자 청했다고 전하거라.”

황유도는 곧장 태후의 말을 전하러 승덕전으로 향했다. 수원상은 다시 조마조마해졌다. 묵용감과 가까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중추 연회 때의 일은 그녀의 가슴에 어두운 흔적을 남겼고, 그때의 문전박대를 떠올릴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는 듯했다. 시간이 상처를 아물게 한다지만,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덧나기 마련이다. 다시 만난 묵용감은 여전히 그녀에게 상처만을 주는 사람이었다.

태후의 청을 들은 황제는 며칠간 자신이 소홀했음을 깨달았다. 마침 식사 시간이 된 만큼 황제는 태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학평관은 어선방에 소식을 알린 뒤, 황제가 탈 어가를 준비했다. 자안궁에 도착한 황제는 문턱을 넘고 나서야 수원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안으로 들어가 평소처럼 태후에게 예를 갖췄다.

“소자, 노불야를 뵈옵니다. 쾌차하셨다는 소식에 이 아들도 참으로 기쁩니다. 다만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많이 걱정하셨지요.”

황제의 얼굴을 본 서 태후는 활짝 웃으며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황상이 바쁜 건 애가도 압니다. 그저 황제의 옥체가 걱정될 뿐이지요. 끼니는 제때 챙기고 있습니까?”

“태후 노불야께 아룁니다.”

옆에 있던 학평관이 서둘러 대꾸했다.

“조반, 중반, 석반 모두 제때 드십니다.”

“그래, 맛있게 드시는가?”

“황상의 어선은 기홍이라는 손맛 좋은 요리사가 만듭니다. 황상께서도 입맛에 맞으시어 아주 맛있게 드시지요.”

서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밤에는 잘 주무시는가?”

학평관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깊이 잠드시진 못하고 몇 차례 뒤척이십니다. 기침은 이른 묘시에 하십니다.”

서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조치를 해야겠구나.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은 피우지 않는가?”

“줄곧 용연향龍延香을 피웠습니다.”

용연향은 황제만 쓸 수 있는 최고급품이었다. 기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제격인 용연향을 쓰는데도 깊이 잠들지 못한다니, 서 태후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들어온 이후로 수원상은 쭉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줄곧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던 수원상은 서 태후의 시선에 곧장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신첩, 황상을 뵈옵니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옷자락을 걷으며 의자에 앉았다. 궁녀가 내어온 차를 받아든 뒤에야 그가 담담히 말했다.

“그리 예를 갖출 것 없소.”

그녀는 그제야 발끝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녀의 동작은 물이 흐르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서 태후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했다.

수원상은 허리를 편 뒤에도 차마 의자에 앉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는 그녀에게 서 태후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한집안 식구끼리 어찌 예에 얽매입니까? 어서 앉으세요.”

황제는 서 태후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무서웠던 수원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데면데면한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사이에 있던 서 태후만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때마침 영 마마가 어선이 다 준비되었으니 편청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전했다.

식사 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할 줄 몰랐다. 그래도 함께 먹고 마시며 가까워질 줄 알았건만……. 서 태후는 하는 수 없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택에 있을 때 무얼 좋아했습니까? 애가가 다음에 그 음식을 내어오라 하지요.”

수원상이 공손히 말했다.

“신경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신첩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습니다.”

“편식을 하지 않아야 건강에 좋지요. 태어날 아이도 튼튼할 테고 말입니다.”

갑작스레 나온 아기 이야기에 수원상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한편으로는 묵용감의 안색을 슬쩍 살폈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음식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서 태후와 수원상은 그와 다른 공간에서 이야기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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