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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5)화 (494/1,192)

제495화

후궁의 일은 황제가 관여하지 않고 서 태후가 처리했다. 서 태후는 몹시 기뻐하며 수원상의 거처를 경수궁으로 정해 주었다.

“지난번에 입궁했을 때 보았지요. 마음에 듭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후궁의 궁전 중에서 직접 골라 보세요. 측왕비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수원상은 서 태후의 총애 앞에서 방자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소첩 때문에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죄스러울 뿐입니다. 노불야의 높은 안목으로 좋은 곳을 골라 주셨겠지요. 소첩도 마음에 듭니다.”

서 태후가 그녀의 손을 잡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착하기도 하지. 애가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했는데, 두 달이나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간 얼마나 속상했습니까.”

수원상이 무릎을 굽히며 공손히 예를 갖췄다.

“노불야, 부디 그런 말씀은 마시어요.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첩은 조금도 속상하지 않았습니다.”

서 태후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예전 일은 그만 잊고 앞날만 생각하세요. 황상이 잠룡 시절 저택에 들인 부인이니, 절대 낮은 지위를 얻진 않을 겁니다. 기다려 보세요. 분명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수원상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소첩은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심으로 황상을 모시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서 태후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황상을 만나지 못했지요.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입궁을 했으니 응당 부군부터 만나러 가야지요.”

그녀가 황유도에게 수원상을 승덕전까지 데려다 주라고 분부했다.

지금쯤 황제는 조회를 마치고 남서방에서 상주서를 읽고 있을 테니, 바쁘지 않다면 잠시 얼굴을 보는 건 문제없으리라.

묵용감을 보러 간다는 사실에, 수원상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조금은 두렵기도, 또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묵용감이 입궁을 허락한 뒤로 어떻게 대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황유도는 가마를 준비한 뒤 그녀 곁을 따랐다. 태후가 그녀를 승덕전으로 보내는 데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황제가 서둘러 그녀의 지위를 정해 주길 바라는 독촉의 의미를 담기도 했다.

입궁을 하고도 봉호를 내리지 않으면 호칭 문제가 너무 민망했다. 지난번엔 어쩔 수 없이 측왕비라 불렀지만 지금은 적절치 않았다.

남서방에 드니 학평관이 복도에 서 있었다. 저 멀리 수원상이 오는 모습에 그가 예를 갖추며 모호한 호칭으로 인사를 올렸다.

“소인, 마마께 경하드립니다!”

수원상이 그를 직접 일으켰다.

“어찌 남처럼 대하십니까? 궁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학평관은 예를 갖춘 그녀의 말에 더욱 정중히 말했다.

“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소인이 난처해집니다. 소인이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지요.”

두 사람이 몇 마디 인사치레를 나누자 황유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총관리인, 황상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노불야께서 마마를 황상께 모셔다드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학평관이 수원상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마. 소인이 고하겠습니다.”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학평관이 안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고하는 동안 수원상은 계단 아래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제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더욱 긴장되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는 그녀의 온몸에 퍼져, 귓가에 쿵쿵 울리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 뒤채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리따운 자태에 옅은 자색 궁포宮袍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입은 궁포는 일반 궁녀들이 입는 궁포보다 아름다웠다. 하얀 바탕 위쪽에 커다란 연꽃을 수놓았는데, 그녀가 걸을 때마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듯 옷자락이 흩날렸다. 참으로 아리따운 자태였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수원상을 바라보았다. 수원상은 곧장 그녀를 알아보았다. 저택의 시녀가 아니던가. 그땐 그저 어린 계집종이라 생각했건만, 어느새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인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월규는 수원상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저 차가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유도가 수원상을 곁눈질했다. 다행히도 수원상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황유도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제 곁을 지키는 궁녀는 아주 많았지만 월규와 기홍은 황제가 가장 아끼는 궁녀였다.

기홍은 온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월규는 달랐다. 한번은 어린 궁녀가 실수를 저질러 월규에게 혼이 났다. 궁녀는 부친과 집안사람들이 조정 관리로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월규에게 되받아쳤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황제가 그 말을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곤장 스무 대를 내리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녀린 아이가 어찌 곤장 스무 대를 견뎌 내겠는가. 궁녀는 곤장 스무 대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고 줄곧 몸져누워 있다가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관五官의 소관에 불과하니,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저 인부에게 돈을 쥐여 주며 시신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뒤, 조용히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서 태후는 황제가 비빈을 들이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면서도 주변의 궁녀들이 총애를 받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 한번은 한바탕 혼을 내줄 생각으로 월규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월규가 그녀의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영구가 곧장 그녀를 데려갔다.

영구만큼은 서 태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등장에 그녀는 아무런 제지도 못하고 월규를 곱게 모셔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황제가 하려는 말은 너무나 명확했다. 월규는 그의 사람이니, 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월규에게 대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누군가는 그녀를 주인으로 대하기까지 했다.

한편 월규는 조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수원상이 싫었다. 수원상이 그녀를 때려서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백천범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까 싶었다. 백천범을 대신해 그녀의 속이 다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수원상이 황제에게 고자질하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어쨌든 황제가 아직 지위를 정해 주지 않았으니 그리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인사를 하러 간다 한들 부를 호칭도 없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학평관이 황제에게 고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수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라 전할까요, 폐하?”

말만 들어도 괜스레 화가 나, 월규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황제가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뒷모습을 훑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돌아가라 이르거라.”

학평관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장 명을 받들고 허리를 숙인 채 밖으로 향했다.

복도에 서 있던 월규는 학평관이 송구스럽다는 듯 수원상에게 전하는 말을 들었다.

“황상께서 너무 바쁘셔서 시간을 내기 어려우십니다. 우선 돌아가신 다음에 황상께서 부르실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학평관의 말은 수원상의 기분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듯했다. 그녀는 멍하니 서서 월규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황제가 월규를 꾸짖었다.

“이곳 남서방을 시장판으로 아느냐, 그리 아무렇게나 들락날락하다니?”

월규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걱정스러웠던 나머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소인이 불경을 저질렀나이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

황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어나거라, 태생이 노비 아니랄까 봐 걸핏하면 무릎이나 꿇고.”

일 년간 학평관과 영구를 제외하면 황제와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이 그녀였다. 이제 황제가 그리 무섭지만은 않았기에, 월규는 몸을 일으키며 넉살 좋게 말했다.

“태생이 노비가 아니면 소인이 어찌 노비를 하겠습니까? 저택에서도, 궁에서도 노비로 지내니 노비 팔자인 셈이지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이젠 돌려 말하지도 않는구나. 듣자 하니 노비가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더냐? 그리 원한다면야, 이번 간택 때 짐이 특별히 네 자리 하나쯤은 남겨 놓으마.”

순간 서늘한 손이 목덜미를 콱 잡은 듯해, 월규가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시큰거릴 만큼 아팠지만, 마음보다는 덜했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폐하, 부디 소인에게 그런 농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인은…….”

죽어도 후궁에 들 수는 없었다. 훗날 무슨 낯으로 왕비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평온했다.

“짐은 농이 아니다.”

월규든 기홍이든 후궁에 들고자 한다면 그는 간택할 용의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백천범의 사람이 아닌가. 그녀의 사람들에게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황제 앞에서 백천범을 언급하는 건 금기나 다름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가릴 정신이 아니었다. 월규가 황급히 호소했다.

“소인, 왕비 마마께 송구스러워서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일어나서 말하거라.”

황제의 목소리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네가 후궁에 드는 것도, 짐이 비빈을 들이는 것도 싫은 게 아니더냐?”

자리에서 일어난 월규는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리며 붓을 내려놓았다.

“짐이 널 난처하게 했구나. 아직도 왕비를 그리 생각하다니.”

황제는 더 이상 왕비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월규는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더 무섭게 보였다. 모든 걸 초월한 듯한 표정이, 모든 걸 놓아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노비의 본분을 다하거라. 설령 마음속으로 주인을 비방해도 죄를 짓는 일이지.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황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노비라 한들 넌 그저 짐의 노비일 뿐이다. 이만 가 보거라.”

월규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저 황제의 노비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설마 황제 외에 다른 이들은 그녀를 노비로 여겨선 안 된다는 뜻일까?

월규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황제의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기홍의 혼인 날짜가 정해졌다. 가서 계획이 어찌 되는지 물어보거라. 너희에게만큼은 짐이 사정을 봐주겠다.”

“예, 소인이 바로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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