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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4)화 (493/1,192)

제494화

황제의 말은 궁전의 모든 이를 기쁘게 했다. 그중에서도 서 태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는지 황유도에게 거듭 되물었다.

“정말이더냐? 황제가, 정, 정말로 간택을 하겠다 했느냐?”

“아이고, 태후 노불야.”

황유도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인의 목숨이 몇 개나 된다고, 감히 노불야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콜록콜록…….”

서 태후는 감격스러웠던 나머지 기침이 나왔다.

“드디어 생각이 트인 게로구나. 이 애가도, 언젠가 황제가 깨달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어찌 후대를 잇지 않을 수 있을까? 콜록콜록, 황태자가 없으면 누구에게 강산을 이어 주겠는가…….”

영 마마嬷嬷가 옆에서 그녀를 타일렀다.

“노불야, 말씀은 그만 하시고, 한숨 주무십시오. 아직 푹 쉬셔야 합니다.”

그러나 서 태후는 이 감격을 다스릴 길이 없어 끊임없이 물었다.

“이번 간택은 누가 도맡게 되었느냐? 애가가 황상을 만나 봐야겠으니 우선 황상을 불러 다오. 콜록콜록, 진왕도 불러오고. 그, 그 일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네. 콜록콜록, 둘 다 서두르게.”

영 마마가 간곡히 말했다.

“노불야.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회복이 우선입니다. 황상께서 어찌 그리 말씀하셨겠습니까? 다 노불야를 위해서입니다. 노불야가 보중하시지 못하면 황상께서도 간택을 미루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서 태후가 눈을 감고 숨을 돌렸다. 두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불야, 어찌 또 우십니까?”

영 마마가 서둘러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애가가 너무 기뻐서 그렇다네.”

서 태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말대로 하겠네. 몸이 낫는 게 우선이지.”

* * *

남서방으로 돌아온 황제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수민과 마주쳤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민이 예를 갖췄다.

“신,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게.”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 대인이 짐을 어쩐 일로 찾아왔는가? 들어오게.”

수민은 공손히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황제가 의자에 앉자 그가 허리를 굽히며 고했다.

“황상, 이번 간택의 감독은 노신이 책임지고 싶습니다.”

황제는 기홍이 내어온 차를 휘저으며 선뜻 답했다.

“그리 큰일도 아닌 것을, 그리하게.”

수민이 잠시 머뭇거렸다. 황제가 이리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기에, 그를 설득할 말을 잔뜩 준비해 온 터였다. 막상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하고 허락을 받으니 다소 당황스러웠다. 황제가 그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다른 볼일이 남은 것인가?”

수민이 별안간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 여식을 위해 노신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 대인에게 맡겼으니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면 거리낄 것 없거늘, 무엇 하러 짐에게 사정을 고한단 말인가?”

수민이 쓴웃음을 삼켰다. 황제는 이번에도 수원상을 잊은 것이다.

“황상,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여식은 초왕부에 머무는 원상입니다.”

그의 말에 황제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아, 측비 말인가.”

“예, 원상이는 폐하께서 잠룡 시절에 들이신 측비입니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지만, 아직 입궁을 허락하지 않으셨지요. 그렇다고 폐위하지도 않으셨으니, 이토록 모호한 처지로 저택에 머물러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줄곧 다망하시어 미처 다 돌보실 수 없음을 신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신 또한 여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 일로 감히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간택을 윤허하셨으니 원상이를 궁에 들여 달라 간청을 드리려 합니다. 높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사옵니다. 그저 그 애가 폐하를 진심으로 모실 수 있게만 허락해 주시옵소서. 폐하를 향한 신의 충심은 그 애가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만 못하옵니다…….”

수민은 무릎을 꿇어앉은 채 간곡하게 청했다. 지금도 고통받는 자신의 딸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청을 올리는 것을 어찌 과한 언행이라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침묵하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 대인의 말도 일리가 있네. 이제 측비도 궁으로 들이게.”

수민에게는 너무나도 길고도 괴로운 침묵이었다. 결국 그가 눈물을 흘리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그만 물러나라는 뜻을 전했다. 밖으로 나가는 수민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마음에 품었던 일이 드디어 윤곽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원상에게 어떤 자리를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황제는 영민한 사람이니 분명 생각해 둔 바가 있으리라.

마음의 병은 역시 마음으로 치유되는 법이다. 황제가 간택을 윤허했다는 말은 서 태후의 마음을 치료한 듯 그녀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매일 담백한 보양식을 먹던 그녀는 사흘이 지나자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을 수 있었고, 닷새째에는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던 그녀는 수민을 불렀다. 그녀에게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누워서 기다릴 수 없었던 그녀는 멀구슬나무 의자에 앉아 문을 바라보았다.

영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마마, 그리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말씀하신 일이니 번복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해까진 좀 더 기다려야 하니 시간은 충분합니다.”

서 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남쪽은 그렇지 않을까 봐 걱정이네. 거리도 멀고 날도 추워지지 않는가? 아무리 서둘러도 두세 달은 걸릴 테지. 다들 천금 같은 이들인데 길 위에서 고생을 할까…….”

그때, 수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서 태후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 대인 왔는가.”

수민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노불야께서 많이 회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줄곧 찾아와 문안을 여쭙고 싶었지만 일이 너무 많아 짬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상께서 수 대인에게 간택을 맡겼으니 바쁠 수밖에. 애가가 자네를 부른 것은 상의를 하고 싶어서일세. 측비를 궁으로 들이려면 황상께 어찌 청해야 할지…….”

“노불야께서 마음을 써 주신 덕분에 이미 황상께 원상이를 입궁시켜 달라 간청을 올렸습니다. 황상께서도 윤허해 주셨지요.”

“세상에, 이리 좋은 일이.”

서 태후가 활짝 웃으며 궁녀가 내어온 약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황상께서 이제야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게야. 그래, 어느 자리에 봉하시겠다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사옵니다. 황상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있으실 테니 그리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수민은 활기가 넘치는 서 태후의 모습에 웃음을 삼켰다. 그간 어떤 약을 써도 차도가 없더니, 황제가 간택을 하겠다는 결정이 특효약인 모양이었다.

“걱정 말게. 애가가 황상께 잘 말해 두겠네. 내 측비를 서운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오랜 시간 얼마나 억울했을꼬. 백천… 콜록, 크흠, 어쨌든 참으로 잘되었네. 황상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더는 속 끓이지 말게.”

서 태후가 기침을 했다. 궁 안에서 백천범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었다. 설령 황제 앞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수민이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신은 그저 노불야께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원상이를 이리 아껴 주시니 이 은혜를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애가는 정말 그 애가 좋네.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데 상황 파악까지 잘하지 않는가. 저택에서 몇 년이나 홀로 머물다니, 어느 누가 이런 인내심을 가졌겠는가? 이런 여인이 황후가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아이지요. 그 애는 그저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서 태후는 수원상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잠시 수민과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던 서 태후가 다시 간택 이야기를 꺼냈다.

“황상께서 이제야 마음을 열었는데 시간이 부족할까 걱정이라네. 우선은 북쪽부터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권력이 막강한 대신들도 대부분 북쪽에 있으니 고려해 보세. 수 대인 생각은 어떠한가?”

“폐하께서 이 일은 노신에게 맡겨 주셨으니 온 힘을 다해 처리하고자 합니다. 우선 수가 충분하다면 남쪽에선 내년에 간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수가 부족하다면 황상의 뜻을 따를 생각입니다. 노불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서 태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도 황제의 생각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강남은 피해야 했다. 그곳에는 황제의 아픈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물론 간택에 필요한 인원이 부족할 리도 없었다. 젊고 예쁜 여인들이 후궁에 가득 차면 황궁은 다시 떠들썩해질 테고, 황제 곁에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으리라. 그러다 보면 황제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 터였다. 그리되면 내년 가을에 다시 전국적으로 간택을 시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더 이상 남과 북을 나누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 * *

황제가 장생전에서 눈물을 흘린 일은 학평관과 영구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누구도 황제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의 통곡은 응당 한 해 전에 쏟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백천범이 떠났을 때, 묵용감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그저 양쪽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감정을 억누른 채 임안성을 쳤다. 또 묵용한을 압박해 죽게 하고, 묵용연을 죽였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서야,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토해 냈으리라.

그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유지했지만, 학평관만은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간 삼켜 왔던 울음을 쏟아냈으니, 이는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했다. 그는 비로소 정상적인 황제로 발돋움할 터였다.

역대 군왕들처럼 후궁을 채우고 많은 자식을 낳아, 강산과 사직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황제. 청사에 이름을 남기는 데 급급해하지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그런 황제가 되지 않겠는가.

수원상은 마침내 궁에 들어왔다. 오는 길 내내 감정을 억눌렀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가마에 앉아 보석이 박힌 호갑투를 어루만졌다. 머리에 붉은 면사를 쓰지도 않았는데 혼사를 치르던 날처럼 가슴이 요동쳤다.

황제가 그의 입궁을 허락했으니, 그녀를 다시 받아 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백천범이 없으니 황제도… 조금은 다르게 대해 주지 않을까.

그녀가 긴 숨을 내쉬었다. 긴 고생 끝에, 마침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간의 노력과 인내가 헛되지 않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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