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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93)화 (492/1,192)

제493화

이천행은 호리호리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나?”

“남제화입니다.”

“남씨라.”

이천행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동월에 남씨 성은 그리 많지 않지. 서북에는 더욱 적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간 서북에서 지내다 보니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적지 않네. 남원의 황족이 남씨라고 들었네만.”

“남원의 황족이요?”

사장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로 향유를 생산하는 작은 나라 말씀이십니까?”

이천행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남원에서 무얼 만드는지도 훤히 꿰고 있다니, 자네도 보고 들은 게 제법이군.”

“휴.”

사장풍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요즘 앵앵이 남원에 다녀오는 상인들에게 어찌나 열을 올리는지 모릅니다. 자그마한 향유 한 병에 은 다섯 냥은 벌 수 있다면서 온종일 귓가에 떠들어 대는데 모를 수 있겠습니까?”

* * *

늦가을의 끝자락을 늘리기라도 하려는 듯, 시월의 임안성에는 맑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반짝이는 햇살이라도 나뭇잎을 오래는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반쯤 누렇게 뜬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다 결국 푹신한 바닥에 내려앉았다. 꼭 누군가에게 버려진 듯 가련한 모양새였다.

연일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황궁만은 어둡게 침잠하고 있었다. 서 태후는 중추 이후로 몸이 영 시원치 않더니 급기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태의들이 매일 태후의 침대 앞을 지켰지만 그 어떤 치료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자연스레 황제의 안색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언제 목이 떨어져나갈지 모르기에, 태의들은 늘 살얼음 위를 걷듯 초조함에 시달려야 했다.

위중청은 따로 황제를 찾아가 태후의 증세를 설명했다. 태후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슬픔이 과한 나머지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 지속되다 점점 더 기력을 잃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의 병에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효과가 없는 법이다. 그저 마음을 다스리는 게 최선의 치료 방법이었다.

황제는 서 태후가 어찌 병이 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황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화를 내도 소용없고, 중추 때 자신이 데려온 수원상을 내쫓으며 체면을 깎였으니 화가 쌓여 이런 상태가 되었으리라.

곱게 나이가 들어 귀티가 흐르던 서 태후는 두 달 만에 뼈만 남을 만큼 급격히 쇠약해졌다. 매일 그녀를 찾아가 문안을 드리던 황제는 점차 앙상해지는 모습을 마주하자 가슴이 아릿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서 태후는 그를 몰아세울 정신이 없었기에 대부분 조용히 잠을 청했다.

황제는 앙상한 그녀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아니던가.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옥좌에 앉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핏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하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황제가 저리 넋을 놓은 것처럼 보여도 모두의 언행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방만해지면 곧장 황제의 시선이 내리꽂힐 터였다.

논의해야 할 일을 거의 끝마쳤을 때쯤, 도찰원 어사 채안화가 대열 앞으로 나와 진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신 다시 한번 간택을 간청드리옵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를 넘기시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천하와 사직의 안정을 위해 황태자의 존재가 필수라는 걸 잘 알고 계시리라 믿사옵니다. 동월국의 천추만대를 위해 부디 간택을 서두르시옵소서, 폐하…….”

지난번 황제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탓에 참형에 처하라는 호통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황제가 간택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섣부르게 저질렀다가 얼마나 많은 대신들이 돌아서겠는가?

황제는 현군이었다. 당시에는 홧김에 그를 감금했지만, 금세 풀어 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는 며칠 뒤 풀려났다. 고생을 한 탓일까? 더욱 대담해진 그는 한 달마다 황제에게 간택 이야기를 꺼냈다.

또 붙잡힌다 해도 겁날 것 없었다. 충신으로서,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마땅히 군주의 걱정을 나누고 제 본분을 다해 황제를 보필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지런한 그의 요청에, 황제는 늘 그렇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채안화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뜻밖에도 오늘은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윤허한다.”

그 말은 대전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쏠렸다. 황제는 간택 때문에 오랜 시간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무성한 지 오래였다.

어떤 이들은 황제가 백천범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홀아비의 길을 선택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선황처럼 후궁을 통해 대신을 끌어들이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전쟁을 할 때 중요한 부위를 다쳐 제대로 구실을 못한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첫 번째 소문에 대해 사람들은 대부분 코웃음을 쳤다. 사랑에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금란전에 있는 이만큼은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소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다만 대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기 아니니 사적인 자리에서만 시답잖은 이야깃거리로 쓰이곤 했다.

그 파다한 소문들은 ‘윤허’라는 단어로 산산이 조각났다. 정신을 차린 대신들이 곧장 바닥에 엎드려 만세를 외쳤다.

조회가 끝난 뒤, 신하들의 얼굴은 죄다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단체로 자신들이 부인을 들이기라도 하는 양 잔뜩 들뜬 모양새였다. 그들은 기쁨에 잠긴 채 집안에 시집을 올 만한 여인이 있는지 분주히 궁리했다. 황제의 후궁은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을 채울 수 있었다.

관직이 높은 이들은 사비 중 한자리를 노렸고, 관직이 낮은 이들은 첩여婕妤나 귀인貴人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황제의 눈에 들기만 하면, 백천범이 받았던 총애 못지않은 영화를 누릴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테니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이 소란과는 무관하다는 듯,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단폐를 내려갔다. 그는 평소처럼 남서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좁은 길을 나서 꽃담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곧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역대 묵용씨 가문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었다.

문 앞을 지키던 소태감은 황제를 보고 곤두박질치듯 인사를 올렸다.

“소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가 손을 가로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다들 물러나거라. 잠시 혼자 있겠다.”

소태감이 고개를 돌려 학평관을 바라보았다. 학평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태감은 얼른 조용히 물러났다.

계단을 오른 황제가 직접 두꺼운 문을 밀었다.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긴 세월의 강이 열렸다. 바짝 말라 있던 강바닥에 서서히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황제는 두 눈을 힘껏 감았다 떴다. 그의 두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둡고 흐릿한 대전 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자, 그는 금세 탁자 앞에 다다랐다. 빽빽하게 놓인 위패에는 금칠로 저마다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단 두 개의 위패만 텅 빈 채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두 위패가 장생전에 놓인 뒤, 황제는 이곳에 처음 발길을 주었다. 며칠 전 일주기 때에도 학평관이 기홍과 월규만 데리고 이곳에서 향을 피우고 지전을 태웠다. 그는 줄곧 회피하기만 할 뿐,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일국의 황제로서 어찌 한평생 도망만 칠 수 있을까? 그의 지위, 그의 환경, 그의 신분과 현실이 주는 압박감은 끝내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자색 구리 향로에 향을 꽂은 그는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린 뒤 허리를 숙였다. 그의 허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다시 펴질 줄 몰랐다. 그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천범, 그대를 따라가지 않아 원망스러운 것이오? 이리 오랜 시간 꿈에도 한 번 찾아 오질 않다니. 부인, 나는 정말 그대의 얼굴을 잊을까 겁이 나오…….

혹 애당초 떠나지 않은 것이오? 지난 일 년간 온 동월을 파헤치며 그대를 찾았지만, 그대는 어디에도 없었소. 대체 그대는 어디에 있단 말이오? 황릉 옆 무덤에 누워 있는 게 진정 그대란 말이오? 만약 그대가 맞다면 꿈에서라도 한 번만 얼굴을 보여 주시오. 한 번이면 되거늘, 어찌 단 한 번도…….

천범, 오늘 그대를 찾아온 것은 그대와의 약속을 어긴 죄를 고하기 위해서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소. 황제가 되고 난 뒤에야 어깨에 실린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알게 되었다오. 홧김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직은 결코 소꿉장난이 아니었소.

이곳의 위패를 보시오.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모두 나를 지켜보고 천하의 백성들도 나만을 바라보고 있소. 결국 나는 스스로 판 우물에 갇혀,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가 되고 말았다오.

꿋꿋이 한 해를 버텨냈지만… 천범,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소. 내게는 아내와 아들이 필요 없지만 동월은 그렇지 않소. 누군가 이 강산을 이어 가야 하니, 나는 곧 그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려 하오. 하지만 천범, 이것만큼은 알아주시오. 그 여인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내 아내는 영원히 그대 하나뿐이오.

태후가 오랜 시간 병을 앓고 계시오. 위중청이 치료를 하고 있지만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소. 어찌해야 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소. 마음의 병은 마음으로 다스릴 수밖에.

늘 손자를 갖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결국 그 또한 내가 백성들에게 버림받지 않고, 묵용 가문의 죄인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소. 부모 된 자라면 누구든 자녀를 향한 마음뿐이니. 천범, 태후는 이제 내 곁에 남은 마지막 가족이오. 부디 알아주시오. 천범, 정말 미안하오. 그대에게 몇 번을 사죄해도 모자라지만, 다시 만나는 날엔 부디…….’

황제의 발끝에 비가 내리는 듯했다. 황제는 천천히 허리를 굽히더니 끝내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일 년 동안 그는 자신을 철벽 안에 가둔 채 굳건한 마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단단히 둘렀던 철벽은 비에 젖은 흙담처럼 무너져 내려 쓸려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는 한 나라의 황제가 아닌, 아내를 잃어 슬픔에 잠긴 사내에 불과했다.

좁은 문틈 사이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학평관은 연신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영구는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한평생 목 놓아 울어본 적 없는 그조차도 황제를 보면 몇 차례나 씁쓸한 고비를 맞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장생전 앞에 자리잡은 거대한 나무는 잎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쭉 뻗어올린 가지가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부르짖는 듯했다.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잠시 쉬는가 싶더니, 이내 날개를 파닥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작은 몸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마한 점으로 변하더니 푸른 하늘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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