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뒤, 방 안의 분위기는 곧바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도,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도 가구인 양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기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영구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기홍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영 대인, 좀 비켜 주십시오.”
그러나 영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를 제대로 바라본 게 언제였던가. 이제는 기억조차 어렴풋했다. 처음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나중엔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서로를 덤덤하게 대할 수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스스로 잘 견뎌 냈다고 여겼다.
지금 그녀는 금방이라도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감정에 그마저도 당혹감을 느꼈다.
한참 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동의하셨습니까?”
기홍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예친왕과의 혼인에 동의하셨습니까?”
다시 고개를 숙인 기홍은 한참 뒤에야 그렇다고 답했다.
그 순간, 영구는 누군가가 숨통을 틀어쥔 듯 목이 메었다. 그는 이 기분을 어찌 해소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영구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결정하신 겁니까?”
기홍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영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평소와 달리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는 어화원 뒤쪽 벽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췄다. 계속해서 심호흡을 한 덕에 답답함은 많이 가셨지만, 이제는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듯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가 혼인을 한다. 자신과 아닌 다른 이와.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는 너무나도 나약해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는 손 내밀면 닿을 행복을 남에게 내어 주지 않았던가.
백천범에게 변고가 생긴 뒤, 영구는 줄곧 묵용감의 곁을 지키며 그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지켜보았다. 사흘간 두문불출하던 묵용감이 밖으로 나온 순간, 하얗게 세어 버린 그의 두 귀밑머리에 영구는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묵용감은 늘 영구의 우상이었다. 뭐든 그를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습관과 취향까지 은연중에 따라 할 정도였다.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정 때문에 망가지다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영구는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두려워졌다. 어쩌면 자신도 그리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홍과 함께하는 앞날이 흐릿하게 번져 버렸다.
예부터 충심과 효도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충성을 다하려면 온전한 마음이 중요했다. 그에게 묵용감은 영원토록 가장 중요한 사람이리라. 자연스레 기홍에 대한 마음이 옅어져 갔다. 황제가 고독한 군주로 남는다면, 그는 더욱이 혈혈단신으로 남아 충심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기홍이 혼인을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기홍도 자신처럼 홀로 궁을 지킬 줄만 알았다.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지금처럼 지낼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말았다.
그러나 동월국의 여인과 사내는 입장이 달랐다. 세월 앞에서 누군들 늙고 쇠약해지기 마련이니,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정착할 곳을 찾고자 했다. 도망쳐 버린 영구와 달리, 기홍은 나름대로 선택을 한 것이다.
친왕의 저택에 들어간다면 기홍에게도 잘된 일이다. 예친왕은 이번 혼사를 유독 중시했으니. 규율대로라면 친왕은 적비 한 명, 측비 두 명, 서비 세 명을 들일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부인으로 통칭했다.
일찍이 왕비 자리를 다 채운 예친왕은 황제에게 서비의 자리를 하나 늘려 달라는 청을 올렸다. 기홍이 명문가 규수는 아니었지만 아들을 낳는다면 지위가 높아질 여지는 있었다.
예친왕을 수소문해 보니 됨됨이가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기홍이 시집을 간다면 고생할 일은 없으리라. 기홍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니, 그는 응당 기쁘게 받아들이며 보내주어야 했다. 알고 있는데도, 어째서 이리 괴롭단 말인가?
* * *
시월의 서북은 이따금 눈꽃이 내려 산봉우리와 지붕을 하얗게 피워 냈다. 긴 복도에 줄줄이 걸린 홍등에 흰 눈이 비치니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처음엔 서북의 정취가 가득한 역참이었지만, 지금은 사앵앵의 손을 거쳐 완벽한 강남풍 객잔이 되어 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운치 있고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길게 이어진 홍등이었다. 어여쁜 주황빛을 뿜어내는 홍등은 거친 서북의 사내들마저도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곤 했다.
등불이 켜지기 시작할 때가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먼 길을 오가는 상인들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이곳의 여주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이었다.
여주인과 웃고 떠들다 보면 긴 여정에 지친 피로와 따분함이 싹 다 사라지는 듯했다. 그녀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마시는 독한 노백간 한 사발은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 주었다. 맛 좋은 안주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다 보면 강남의 번화한 주루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부지런한 가게 점원은 어깨에 새하얀 행주를 걸치고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누비며 음식을 나르고 탁자를 치웠다. 이따금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대꾸를 하기도 했다. 북적거리며 사람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머무는 이들은 꼭 집에 돌아온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어둠이 가라앉을 무렵,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탁자마다 손님들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같이 온 일행이 아니라 해도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금세 친구가 되었다.
사앵앵은 계산대 앞에 서서 흐뭇하게 웃었다. 손님이 많으니 장사가 제법 잘되었고, 자연스레 은자도 많이 벌었다. 예전에는 사장풍이 월말마다 천엽성 전장錢莊(옛날 개인이 운영하던 금융 기관)에 돈을 맡기러 갔는데, 지금은 보름마다 다녀와야 할 정도였다.
땅딸막한 상인 한 명이 보따리를 들고 계산대 앞에 다가왔다. 그가 금니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어 보였다.
“사 주인장, 지난번에 필요하다고 했던 향유香油를 가져왔으니 한번 보게.”
보따리 안에는 열 병 남짓의 청옥색 병이 들어 있었다. 색이 조금씩 다른 청옥색 병은 입구가 꼼꼼히 밀봉되어 있었지만 은은한 향이 새어나왔다.
그녀가 한 병을 집어 들더니 유심히 살폈다.
“남원에서 가져온 거 맞겠죠?”
“남원에서 만든 게 확실하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다른 사람을 속여도 어찌 사 주인장을 속일까?”
상인이 병 하나를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손에 한번 발라 보게나. 동월이나 몽달국의 것과는 딴판이니까.”
사앵앵은 새끼손가락에 향유를 살짝 발라 손등에 문질렀다. 부드럽고 매끈하게 발라지는 건 물론이고 기분 좋은 향까지 났다. 한눈에 봐도 진품이었다. 그녀는 모든 병에 찍힌 도장을 유심히 살핀 뒤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제가 물건 볼 줄은 몰라도 마馬 사장님 말은 믿지요. 그럼 처음에 얘기했던 가격으로 하겠습니다.”
마 사장이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내가 이래서 사 주인장이랑 거래하는 게 좋다니까. 사실 이걸 들여온다고 인맥을 좀 쓰긴 했지만, 사 주인장을 위해서라면야 기꺼이 내고말고.”
두 사람은 계산을 끝내고 기분 좋게 거래를 마쳤다.
사앵앵은 향유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그녀에게 이 향유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돈줄 그 자체였다. 남원의 향유는 동월에서 귀하디 귀한 취급을 받았다. 값이 얼마나 비싸든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녀가 직접 남원에 가서 사 올 수 없으니 중간에서 가격 차익으로 돈을 벌었다. 그녀는 점차 상인들에게 수단이 뛰어난 여인으로 인식되었고, 그 덕에 남들이 구하지 못하는 물건도 그녀라면 비교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업은 역참 운영, 부업으로 각종 진귀한 물품을 파는 중간상을 하는 셈이었다. 그녀는 중간상만으로도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어느새 사장풍이 다가와 입술을 삐죽였다.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여인이 어찌 남들과 못 사귀어서 안달이란 말입니까? 남들이 수군댈까 무섭지도 않은지, 원.”
“전부 가게에 찾아온 손님일 뿐인데요. 당신 말고 또 누가 쑥덕대겠어요?”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다 당신 잘되라고 하는 소립니다, 사 주인장.”
“예, 수고가 많으시네요. 사 주인장.”
두 사람은 하루라도 말다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지 매일 투덕거렸다. 그러나 사장풍은 영원히 사앵앵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가 막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치려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사장풍이 곧장 맞이했다.
그는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별실로 들어갔다. 사장풍은 직접 차를 내어와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장군님.”
다름 아닌 이천행이었다. 몸을 회복한 뒤 그는 줄곧 서북에 머물렀다. 이 역참을 지을 때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이천행이 역참에 자주 온 덕에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됐다.
“요즘은 어떠한가, 별 소식은 없고?”
사장풍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서북의 찻잎은 향이 짙었다. 갈색빛을 띠는 맑은 찻물은 처음엔 조금 떫지만 끝 맛이 달아 갈증을 해소하는 데 제격이었다.
“의심이 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장풍은 그에게 찻잔을 건네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몽달의 병사들은 아직도 국경 지대에서 빈둥거리고 있습니까?”
이천행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몽달은 겁낼 게 못 되지. 서북은 본 장군이 폐하 대신 잘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가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서쪽에서 남쪽까지 소국이 많고 환경도 워낙 복잡하지. 폐하께서 이곳에 역참을 세우신 건 정말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네.”
사장풍도 미소를 머금었다.
“소인도 처음엔 폐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참으로 멀리 내다보셨습니다.”
묵용감이 이곳에 역참을 세운 목적을 사장풍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역참의 일을 하고 있지만, 이곳은 사실 동월국 서북 지역의 정보 기지였다. 그중에서도 주로 몽달국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았다. 어쨌든 몽달국은 전투력이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니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역참의 규모가 워낙 크니 남북을 오가는 이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자연스레 각종 소식이 흘러들어왔다. 사장풍은 상인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도 귀담아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소식일지라도 헤아려 보면 유용한 정보가 많았다. 사장풍이 정보의 경중을 나누어 정리해 두면 역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임안성에 소식을 전했다.
“아, 번거로우시겠지만 장군님께서 알아보셔야 할 이가 한 명 있습니다.”
사장풍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후원에 걸린 등불이 장작을 패는 한 사내의 모습을 비추었다. 사장풍이 가볍게 턱끝으로 가리켰다.
“저자입니다.”
이천행도 창가로 다가와 그가 가리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구인가?”
“남제화라는 사람입니다. 강호의 검객인데 실력이 제법입니다. 사막에서 저와 앵앵이를 구해준 뒤로 줄곧 역참에서 힘쓰는 일을 하며 지내고 있지요. 한동안 떠나 있기도 합니다. 본인 말로는 강호에서 의로운 일을 하고 돌아온다는데 어쩐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저자가 첩자일 것 같은가?”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그럼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인가?”
“검술이 뛰어난 걸 보면 검객이 틀림없는 것 같지만, 저자에게서…….”
잠시 고민하던 사장풍이 입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기질이 느껴집니다. 꼭 부잣집 공자 같달까요. 사소한 부분까지 감추려고 노력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