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화
“과민 반응?”
백천범의 까만 눈망울에 걱정이 어렸다.
“심한 거야?”
“그냥, 꽃가루 때문에 그런 거야.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백천범이 서둘러 그를 잡아끌었다.
“꽃가루 때문에 그러는 걸 알면서도 왜 꽃 앞에 있는 거야?”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옷을 잡아끈 순간, 남문우는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녀와 닿는 게 처음은 아님에도, 그녀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리 당혹스러운 순간이 잦아졌다. 지금껏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남 장군은, 자신을 지배한 이 감정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재빨리 비켜선 그는 공을 집어 들고 허공으로 던졌다. 그러자 점박이가 쏜살같이 뛰어오르더니 허공에서 공을 낚아채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뿐히 걸어왔다.
남문우가 소고기 조림 한 조각을 내밀며 웃었다.
“익힌 고기를 먹는 맹수는 점박이가 유일할걸.”
탁자 앞에 앉아 꽃가지를 잘라낸 백천범은 꽃을 길이 별로 나눠 꽃병에 담았다.
“원래 온순한 성격이잖아. 익힌 음식을 먹는 게 뭐 어때서?”
“언젠가 널 원망할까 봐 두렵지 않아?”
백천범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날고기 맛도 모르는데 어떻게 날 원망하겠어?”
“그래도 알게 된다면?”
백천범이 고기를 먹고 있는 점박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자애롭고 따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설령 야생성을 회복한다 해도 점박이는 착한 아이야. 함부로 달려들진 않을 거야.”
“점박이를 그렇게나 믿는 거야?”
“물론이지, 내가 먹여 키운 아인데.”
남문우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그럼 나도 믿어?”
백천범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야 늘 믿지.”
남문우는 감정을 감춘 뒤,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화령절에 내가 네 화령을 가져갔던 거 기억해?”
“응.”
“난 네게 비수를 주었고 넌 내게 손수건을 주었잖아.”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수는 기억나는데 손수건은…….”
“이 손수건 말이야.”
남문우가 소매에서 연분홍색 매화가 수 놓인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제 와서 발뺌하면 안 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화령절에는 오랜 규율이 있거든. 내가 네 화령을 가져왔고 서로 증표도 교환했으니까.”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넌 나한테 시집와야 해.”
애써 태연스레 내뱉었지만, 그는 누군가가 심장을 꽉 움켜쥔 듯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응.”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남문우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알겠다는 건… 무슨 뜻이야?”
“너한테 시집가야 한다며, 가면 되지.”
남문우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가 어쩐지 무성의하게 들렸다.
“원치 않는 거야? 혹 규율을 어겨서 무서운 거라면…….”
백천범이 마지막 남은 꽃을 꽃병에 꽂더니 실소를 흘렸다.
“대체 왜 그래? 너한테 시집을 가야 한다길래 가겠다고 한 건데, 뭘 그리 의심하는 거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진지하게 생각할 게 뭐 있어.”
백천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고 너랑은 청매죽마라며.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알고,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그녀의 대답은 어쩐지 그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했다. 남문우는 꽃가지를 집어 들고 울적한 얼굴로 잎사귀를 뜯었다.
“난 널 좋아하는데 넌 나랑 있는 게 편하다니. 네 마음을 편하게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칠 텐데, 마음이 편하기만 하면 누가 됐든 혼인할 수 있는 거 아냐?”
“내 마음이 편하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전부 날 좋아하진 않겠지.”
순간적으로 가시에 찔린 듯해, 남문우의 손이 멈칫했다. 어쩐지 운 좋게 얻어걸린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입을 꾹 다물자 백천범이 운을 떼었다.
“물론, 혼사는 그리 작은 일이 아니니까 내 생각엔…….”
“이미 승낙했으니까 무르는 건 안 돼.”
남문우가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점박이가 증인이야.”
“네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 봐도 좋아. 어쨌든 널 좋아하는 여인은 많잖아.”
남문우는 곧장 웃음을 되찾았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분신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수밖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멋스러운 말이었지만, 백천범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점박이를 품에 안은 채 다정하게 쓰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크흠, 그럼 별다른 의견 없으면.”
멋쩍어진 남문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백천범의 품에 안겨 눈을 가늘게 뜬 점박이를 빠르게 훑었다.
“폐하께 아뢸게. 날을 정해 혼사를 올리겠다고 말이야.”
“응.”
“…….”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무성의했다.
“혼사에 원하는 게 있거든…….”
“없어. 네가 다 알아서 해.”
“…….”
남문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리도 관심이 없단 말인가? 그녀가 이럴수록 그의 불안함은 점점 더 커져 갔다.
* * *
가부좌를 틀고 앉은 대제사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러나 한참 뒤, 눈을 뜬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제가 급히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대제사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 생각은 접으셔야 합니다. 묵용린의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제의 대답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짐의 외손자네. 짐이 어찌 그 애의 목숨을 해하겠는가? 하지만 묵용씨의 성을 가지는 건 절대 안 될 일일세.”
그들의 주변으로 향의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눈길을 주던 대제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보내졌으니, 그 애의 운을 지켜봐야겠지요.”
* * *
승덕전에 드는 예친왕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그를 알아본 학평관이 활짝 웃으며 예를 갖췄다.
“아이고, 예친왕 전하,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드시지요.”
예친왕은 학평관에게 몇 마디 인사치레를 건넨 뒤 옷자락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갑작스레 등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맹수를 마주한 듯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옷을 입은 영구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예친왕은 황제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늘 예를 갖췄다. 그가 웃으며 영구에게 말을 건넸다.
“영 대인, 어찌 이런 곳에 서 있는가? 본왕이 미처 보지 못해 깜짝 놀랐네.”
영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귀신도 두렵지 않은 법이지요. 왕야께서는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
“…….”
영구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저 2품 신하에 불과했다. 자신은 친왕이 아니던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영구는 서 태후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놈이었다.
그런 자가 친왕인 제게 예의를 지키는 게 더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래, 무시하면 그만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싹한 눈빛은 계속해서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었다. 꼭 그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영구에게 딱히 원한을 산 일도 없는데 어찌…….
예친왕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뒤로한 채 서둘러 내전으로 들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영구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학평관이 한숨을 내쉬며 타일렀다.
“예친왕 전하를 그리 노려보면 어찌하나. 애당초 자네가 먼저 손을 뗀 일이니 기홍도, 더더욱 예친왕은 탓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영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학평관은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향했다.
가동은 예친왕의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황제보다 몇 살 더 많을 뿐이었다. 그는 혼인을 일찍 한 탓에 처첩도 많았고 자식들도 제법 장성했다. 올해 열여섯인 장남은 정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여인을 향한 마음이 식을 줄 몰랐다.
묵용감이 초왕이던 시절, 기홍을 마음에 둔 그가 혼인을 청했지만 묵용감은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은 초왕이 황제가 되었고 기홍도 나이가 찼으니, 묵용감은 기홍이 원한다면 기꺼이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영구는 날마다 황제 곁을 지켰지만 이 일만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날 가동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기홍과는 그녀가 황제에게 올릴 차를 가지고 올 때만 마주쳤다. 종종 시선이 맞닿을 때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초왕의 저택에서 지낼 때처럼 데면데면한 사이로 돌아간 것이다. 황제의 곁을 오랜 시간 지킨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두 사람이 혼인을 약속했던 사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혼사가 틀어진 이유도 얄궂었다. 도중에 너무 많은 일이 생긴 탓에 두 사람은 서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조금씩 거리가 생겼고, 두 사람 다 속을 터놓는 성격이 아니기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얼마 전, 황제는 그에게 혼사를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혼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황제가 기홍에게도 물었는진 모르겠지만 결국 그들의 혼사는 이리 흐지부지되었다.
때마침 기홍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둘은 두 갈래로 나뉜 물줄기처럼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영구는 곁눈으로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받아들여야 하건만, 차오르는 씁쓸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녀는 어딘가 기뻐 보였다. 늘 덤덤하기만 하던 얼굴에 생기가 넘쳐흘렀고, 그를 스쳐 가는 걸음걸이마저 가벼웠다. 옅은 한란 향만이 그녀가 있었음을 말해 주었다.
별안간 어금니를 꽉 깨문 영구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가 복도로 나가니 마침 당직실로 들어가는 기홍이 보였다. 영구는 곧장 그녀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기홍뿐만 아니라 월규와 소복자도 함께였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영구가 갑작스레 뛰어 들어오니,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눈만 휘둥그레 떴다.
두 사람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월규가 소복자에게 운을 떼었다.
“내무부에 갈 일이 있는데 짐이 많으니 좀 도와주게.”
소복자가 넉살 좋게 말했다.
“아이고, 무얼 들고 가시려고요. 제가 다녀오면 되니 고고께서는 가실 필요 없습니다.”
월규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밖으로 향했다.
“녹하 언니를 보러 가려는 것이니 어서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