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화
점박이를 때린 후, 백천범은 며칠 동안이나 남문우를 보려 하지 않았다. 늘 자신만만하던 남 장군은 그녀에게 수도 없이 퇴짜를 맞았고, 그럴 때마다 잔뜩 풀이 죽어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길에 시종이 다가왔다. 금전으로 들라는 여제의 명이었다.
남류청은 언제나 화려한 의상과 정교한 화장을 즐겼다. 그녀에게서는 차가우면서도 고귀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금전에 도달한 남문우는 그녀의 화려한 치맛자락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별안간 백천범이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라, 그는 속으로 탄색을 내뱉었다. 모녀의 성정이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닙닙이와 말다툼을 했다지?”
“아닙니다.”
남문우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워낙 아이 같은 성격이니, 며칠 뒤면 괜찮아질 겁니다.”
“화령절도 지났는데, 그 애가 동의는 하던가?”
남문우가 잠시 침묵하더니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예……. 그런 셈이지요.”
“그런 셈이라니?”
남류청이 오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 장군답지 않군.”
남문우가 곧 자신 있게 말했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대제사 쪽은 대체로 괜찮으니, 이제 남 장군 쪽의 상황을 봐야지.”
“조금의 빈틈도 없어야 하겠지요.”
“대제사가 하는 일은 마음 놓게.”
남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대황자 쪽의 소식은 없습니까?”
“모든 게 순조롭지. 계획이 시행되기 전까진 동월국이 우리를 의심하진 못할 터. 어쨌든.”
남류청이 자조하듯 미소를 보였다.
“남원은 약소국이라 늘 다른 나라의 업신여김을 당했지. 초왕비가 우리 손에 있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까!”
남문우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신, 폐하께서 승리를 거두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다른 일이 없으시면 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남류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를 뜨려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질문을 건넸다.
“그 애는 괜찮은가?”
남문우가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 직접 보러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남류청의 얼굴이 우울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 애가 짐을 밀어내지 않는가. 짐은 아직도 걱정이라네.”
“신이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렇다니 다행이군.”
남류청이 쓴웃음을 삼켰다.
“대제사마저 애를 먹는 아이가 아닌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은 처음이라 어찌 손을 댈 수가 없다더군.”
남문우도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너무 단순하니, 본능적인 약점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도 그녀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백 승상의 저택에서 고통을 겪은 어린 계집은 단 한 번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다. 환경이 어떻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그녀를, 하늘이 돌보는 것일까? 그녀에겐 항상 복이 따랐다.
세상에 이렇게 단순하고 한결같이 사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리 생각하면 그녀가 더욱더 귀하게 느껴졌다. 누구든 속세에 나오면 점차 세속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사내는 공명과 녹봉을 좇고 여인들은 총애를 얻기 위해 다툼을 일삼았다.
그런 인세의 진흙탕 속에서, 그녀만이 고고하게 피어난 연꽃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늘 당당하게 지냈다. 그러니 묵용감도 그녀를 보석처럼 귀하게 여겼을 테지. 그리고 그는…….
남문우는 나무 아래에 서서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서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궁의 남서쪽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아주 신기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다. 황궁의 다른 나무들이 뙤약볕에 축 처져 있을 때에도 이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무성한 잎을 늘어뜨리곤 했다.
각종 진귀한 꽃과 풀이 자랐기 때문에 새나 짐승들도 늘 이곳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공작이 가장 많았다. 평소에 자주 볼 수 있는 청공작 외에 진공작과 백공작도 볼 수 있었다.
공작은 천천히 숲속을 누비거나 나뭇가지에 기댄 채 여유를 부렸다. 그 외에 꽃사슴처럼 온순한 초식 동물들도 많아, 눈길을 돌리면 닿는 곳마다 꽃사슴의 자태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숲 한가운데에는 흰 건물이 있었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지붕은 뾰족한 형태였지만 그리 크지도, 금으로 장식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건물과 다른 놀랄 만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다름 아닌 백옥으로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리쬘 때면 건물 전체가 투명하게 빛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듯 흩날리는 버들가지까지 벽 위를 훤히 비추곤 했다.
이곳은 황궁보다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다. 보초 한 명도 없는 곳이지만 함부로 찾아오는 이가 없는 곳이다. 황궁 내에서도 금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주인은 여제조차 우러러보는 사람, 남원의 대제사였다.
여제 앞에서마저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남문우라도, 이곳에서는 경건한 태도를 보여야 대제사를 만날 수 있었다.
대제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의 신분을 따지지 않았지만, 모든 이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때문에 백성들이 대제사를 만나고 싶을 땐, 궁문 앞의 보초를 찾아와 청을 드려야 했다. 다만 어느 보초도 이 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예전에 한 보초가 대제사를 만나러 온 가난한 백성들에게 악담을 퍼붓고 쫓아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초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한참 뒤 천천히 정신을 차린 그는 그제야 대제사가 그에게 벌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어느 보초든 대제사를 만나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지 않게 되었다.
남문우는 숲 밖에 서서 나무에 걸린 은색 종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가 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문우가 또다시 종을 울렸다. 대제사는 상대적으로 귀족들에게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데 더 마음을 쓰는 이였다.
허공을 가르는 종소리는 무색하게 잦아들었다.
남문우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세 번째 종이 울리자, 이번엔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한 사동이 꽃사슴을 타고 버들가지를 가르며 오더니 그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대제사께서 안으로 드시랍니다.”
남문우도 합장으로 답례한 뒤, 사동의 뒤를 따랐다. 숲을 가로질러 건물 앞에 다다르자 또 다른 사동이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햇살이 백옥을 뚫고 내리쬐는지라, 내부는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더불어 따스한 온기가 어깨를 어루만지듯 내려앉았다.
포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은 대제사는 흰 옷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선명한 대비가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더욱이 그의 두 눈은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맑은 눈빛은 꼭 흐르는 물 같아서 보는 이를 하염없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다들 남 장군을 남원의 미남이라고 칭송했지만, 대제사 앞에서는 그의 미모마저 빛이 바랠 정도였다.
워낙 미모가 뛰어나니, 대제사의 성별을 두고 남원 백성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남문우는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남 장군, 백천범의 일로 오시었소?”
남문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제사는 따로 듣지 않아도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뜻을 헤아리는 이였다.
“무엇을 알고 싶소?”
“그 애가 앞으로 행복할지 궁금합니다.”
대제사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한 이는 스스로 행복을 구하는 법.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지요.”
남문우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제 곁에서도 행복할까요?”
“남 장군은 본인에게 자신이 없는 것이오?”
“…….”
“그녀는 똑똑한 여인이오. 원하는 게 적을수록 행복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
대제사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알 듯 말 듯 한 말을 내뱉었다.
“장군은 스스로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좋겠소. 장군이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 * *
백천범은 꽃이 한 아름 담긴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군가 표범과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남문우가 꽃무늬 공을 허공에 던지면 점박이가 잽싸게 달려가 공을 받았다.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으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다. 남문우와 점박이가 자주 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점박이는 어찌나 날쌘지 매번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공을 물었다. 그러나 남문우는 짓궂게 여러 개의 공을 동시에 던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공을 바라보던 점박이가 남문우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그의 얼굴을 핥았다.
힘으로 점박이를 당해낼 수 없던 남문우는 얼굴을 가린 채 애원했다.
“안 돼, 그만. 저리 가…….”
기둥 옆에 서 있던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녀를 발견한 점박이는 신이 난 얼굴로 달려왔다.
그 틈에 잽싸게 일어난 남문우는 비뚤어진 금관과 옷매무새를 매만진 뒤 점박이를 나무랐다.
“이 녀석, 어찌 점점 장난기만 심해진단 말이냐? 아주 제멋대로야.”
“네가 이렇게 길들였으면서 왜 점박이 탓을 해.”
백천범이 깔깔 웃으며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우리 점박이는 말을 잘 듣는 편이야, 그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점박이가 고개를 아래로 끄덕였다. 이내 꽃바구니에서 꽃 한 송이를 물어 백천범에게 가져다준 점박이가 기대 가득한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꽃을 받아 들어 머리에 꽂았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점박이가 바닥을 뒹굴다 다시 한 송이를 물어 남문우에게 가져갔다.
얼떨결에 꽃을 받아 든 남문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진지한 얼굴로 점박이에게 말했다.
“난…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꽃을 꽂을 수 없어.”
점박이는 고집을 피우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꽃을 꽂기 전까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보다 못한 백천범이 그에게 다가와 꽃을 빼앗더니 머리에 꽂으려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따귀를 날렸겠지만, 백천범이 제 머리에 꽃을 꽂으니 그는 바보같이 굳은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아. 아주 예뻐.”
예쁘다는 표현도 남문우가 심히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부끄럽고 간지러운 단어였다. 그녀의 흰 손가락이 귀를 스치는 순간, 그는 거의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진 그는 서둘러 꽃바구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부터 꽃을 꺾으러 간 거야?”
“응. 꽃병에 꽂아 두려고.”
백천범도 꽃바구니 옆으로 향했다.
“근데 귀가 왜 이렇게 빨개?”
“…과민 반응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