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흥이 사라진 청년은 골목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집은 성 서쪽에 있었다. 골목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집까지 일각쯤 걸렸다.
돌아가는 내내, 면사 너머로 보였던 아름다운 미소가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던 그는 차마 그녀에게 화령을 구실로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두고 깊은 밤 그녀가 생각날 때 한 번씩 떠올려 볼 생각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주변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 갑작스레 옆쪽에서 팔이 날아오더니 청년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청년도 제법 민첩했기 때문에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그 사람은 퇴로까지 계산해둔 듯 다른 쪽 손으로 등을 힘껏 내리쳤다. 결국 청년은 옷깃을 틀어잡혀 꺽꺽댔다.
“간도 크지.”
느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잘생긴 얼굴이 청년의 시야에 담겼다. 경박하리만치 밝은 웃음과 달리, 옷깃을 틀어쥔 힘은 점점 더 세지고 있었다.
청년은 그와 대화를 나눠 보려 했다.
“남 장군, 장군께서 먼저 규율을…….”
“규율은 무슨 망할 규율?”
남문우가 방만하게 웃었다.
“본 장군이 곧 규율이다.”
그가 힘껏 손을 뿌리치자 청년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남문우가 그를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본 장군의 여인을 넘보았으니 너야말로 내 규율을 어긴 것이다.”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손을 뻗었다.
“내놓거라.”
“뭘요?”
청년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모르는 체했다.
남문우는 가차없이 발을 들어 힘껏 내리꽂았다. 손을 짓밟힌 청년이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남문우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이제 알겠느냐?”
결국 청년은 품에서 백천범의 화령을 꺼내 마지못해 건넸다. 남문우는 히죽거리며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을.”
다시 한번 발에 힘을 실어 보인 후, 그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 청년이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무슨 수가 있으랴. 이렇게 당한다 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옥면소호의 위력이야 소문이 자자했지만 겪어 보니 소문보다 대단했다. 대제사에게 끌고 가 그를 고발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간 정말 뼈도 추리지 못했을 터였다.
남문우가 다리로 돌아왔을 때, 백천범은 보이지 않았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호위병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백천범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얕은 물가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남문우는 실소를 흘렸다. 금지옥엽인 공주가 시골 계집처럼 행동하다니. 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묵용감은 어찌 이런 성격의 여인을 그리도 끔찍이 사랑했을까?
“뭐 찾아?”
그는 훌쩍 뛰어내려 물가 옆의 바위 위에 착지했다.
“내가 도와줄게.”
“작고 투명한 새우가 엄청 많아.”
백천범이 그에게 물가의 새우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어망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자신 있게 말했다.
“어망만 있으면 한가득 잡았을 거야.”
“이렇게 작은 새우를 잡아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니까 네가 뭘 모른다는 거야. 깨끗이 씻어서 소금에 버무렸다가 구우면 바삭한 게 얼마나 맛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꼭 그렇게 해 본 것처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곱게 자란 공주가 어찌 그런 음식을 먹어 봤겠는가.
남문우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만 나와. 물속에서 오래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는 그녀가 생각에 잠긴 틈을 타 뭍으로 끌어올렸다.
남원은 전족을 하지 않으니 백천범의 맨발을 봐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하얗고 예쁜 발이 남문우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그는 백천범이 자신의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을까 싶어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어서 신발 신어. 이제 돌아가야지.”
백천범은 돌 위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
“광장에 춤추러 안 갈 거야?”
“안 가.”
남문우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미 이걸 가졌으니깐.”
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던 백천범이 깜짝 놀랐다.
“남농화의 화령을 가져온 거야?”
“…….”
어찌 남농화의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당연히 본인의 것이거늘…….
백천범이 화령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내 거랑 똑같아.”
“네 거니까.”
“내 거?”
백천범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내를 찾아가 내 화령을 찾아왔구나?”
“네 화령은 나만 가질 수 있으니까.”
남문우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닙닙아, 내 말… 이해했어?”
백천범은 크고 까만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남문우가 화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널 갖고 싶어.”
백천범은 천천히 시선을 피하더니 수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난 그간 너무 제멋대로 살았어. 돈, 권력, 여인, 뭐든 부족한 줄 몰랐지. 널 만나기 전까진 말이야. 닙닙아, 내겐 네가 정말 필요해.”
남문우의 까만 눈망울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었다. 불타오르는 벌판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그윽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뒤,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청매죽마였다며. 함께 자랐을 텐데 왜 날 만나기 전까지라고 하는 거야? 우린 늘 함께였잖아.”
남문우는 이렇게 허점을 찔릴 줄은 몰랐다. 그간 그는 여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지만, 제 마음을 고백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듣기 좋은 말은 무의미했고, 돌려 말하면 닿지도 않을 듯했다.
“같이 자란 건 맞지. 하지만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잖아. 그래서 이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어. 여인들은 자라면서 수도 없이 변한다고 하잖아. 그래서 네가…….”
“내가 예뻐지니까 그제야 좋아하게 되었다고?”
“…….”
왜일까. 남녀의 애정 문제만큼은 자신 있었건만, 그녀 앞에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게 아니라, 넌 특별하니까.”
“내가 뭐가 특별한데?”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가잖아. 다른 여인들은 못 해.”
백천범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눈치였다.
“이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였구나.”
남문우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어렵사리 진지한 고백을 꺼냈는데 백천범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마치… 그간 제게 고백한 여인들을 비웃었던 것처럼, 백천범도 그를 비웃는 듯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역시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남문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은 더욱더 짙어졌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녀가 기회를 준다면, 묵용감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미리 준비했던 비수를 건넸다.
“이거 가져.”
백천범은 역시나 관심을 보이며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비수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쁘다.”
“마음에 들어?”
“응.”
남문우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날이 너무 덥네. 손수건 좀 빌려줄래?”
백천범은 별생각 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는 완전히 비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렇게 예쁜 걸 선물해 줘서 고마워.”
“그랬다니 다행이군.”
남문우는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몇 번 하더니 슬쩍 자신의 소매에 집어넣었다.
백천범은 풀 한 가닥을 뽑아 비수의 예리함을 시험해 보았다. 한 번의 휘두름에 여린 풀잎은 깔끔하게 둘로 나뉘었다. 비수가 몇 차례 허공을 스치니 잘게 잘린 풀잎이 싱그러운 향을 내며 흩날렸다.
“그만 돌아가야겠어.”
그녀가 치마를 털며 일어났다.
“점박이한테 밥을 줘야 하거든.”
“여옥이가 있잖아. 알아서 잘 돌봐줄 텐데?”
“내가 없으면 점박이가 서운해할 거야.”
그녀는 비수를 허리춤에 꽂고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남문우는 아쉬움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궁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궁보다 자유로운 바깥이라면 감정을 틔우기도 훨씬 수월하건만.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표범보다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마음의 크기가 서로 다를 땐, 먼저 사랑한 사람이 지는 법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세 달 사이에 점박이는 부쩍 자라났다. 이제는 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어엿한 맹수의 형상을 제법 갖추고 있었다. 금빛 털에 검은 흑점, 뾰족 솟은 귀에 커다란 눈까지. 점박이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문 앞을 지키곤 했다. 저 멀리 백천범이 보이자 점박이는 곧장 내달렸다. 공중으로 겅중 뛰어오르는 모습이 그렇게 씩씩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점박이는 백천범을 바닥에 쓰러뜨리더니 그녀의 목을 물려고 했다.
그 모습에 남문우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그가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런 못된 짐승 새끼가, 저리 꺼져!”
피할 새도 없이 채찍을 맞은 점박이가 울부짖었다. 고통스러운 통증에 곧장 한쪽으로 도망친 점박이가 꼬리를 늘어뜨리며 눈치를 살폈다.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남문우는 한 번 더 채찍을 휘두르려 했지만, 백천범이 그를 힘껏 걷어찼다. 이내 그녀가 표범 앞으로 걸어가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지키는 모습 같았다.
“때리지 마. 점박이는 나랑 노는 것뿐이야.”
남문우가 급히 해명했다.
“닙닙아, 어쨌든 짐승이야. 본능은 길들이기 어렵다고. 널 다치게 할까 봐 겁나.”
“점박이는 안 그래. 내가 키운 애야. 내 아이…….”
백천범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표범을 바라보았다. 그래, 점박이를 아이로 여겼으니 그런 말이 튀어나왔으리라. 그 때문에 채찍을 맞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던 거겠지.
갑작스레 분노가 치민 그녀는 남문우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네가 뭔데 점박이를 때려. 한 번만 더 점박이를 괴롭히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